신문 기사 하나를 우선 읽어 보자. 다소 길지만 혹시라도 개입될지 모를 자의성을 경계하기 위해 전문을 인용하겠다.
‘문학의 시대는 과연 갔는가.’ 지난 몇 주간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의 앞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작품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최소한 현단계 국내 문학의 작가 역량 분포도를 보자면, ‘정말 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중진들과 대조적으로 스타급의 젊은 작가들의 역량은 너무도 현저하게 취약하다는 세론이 여실히 확인되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분포도는 문학 장르가 예전의 위엄과 영향력을 잃고, ‘조락(凋落)한 동네’로 곤두박질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그리고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문학의 부침에 대한 극명한 상징이다. 우선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문학 텍스트로 거론이 불가능할 정도의 낮은 완성도인 은희경, 공지영의 경우다. 믿기 어렵겠지만 대중적 인기도와 상관없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기본인 문장부터 ‘하자 덩어리’의 불량품들이다. 은희경 소설은 대학강사 독신녀의 냉소적이고 분방한 남성 행각이 그려졌다. 이 소재상의 선정성 때문에 팔리고 있지만,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이 플롯상의 단선적인 틀이다. 엉성한 서사구조 속에 그려지는 주인공들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서사구조라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벽돌’인 문장은 대학생 습작 수준이다. 공연한 폄하가 아니다. 감칠맛은 고사하고 악문(惡文)이 즐비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불현듯 걸음이 느려진다”(15쪽) “죄의식을 자청한다”(29쪽). ‘불현듯’은 생각의 순간적 착상을 표현할 때 구사하는 용어. 이것은 공연히 행동의 묘사하는 대목에 들어가 영 어색한 것이 앞문장이다. 또 ‘죄의식을 갖는다’고 하면 명쾌할 것을 적확하지 않은 한자어를 구사해 꼬인 경우가 뒷문장이다. 문제는 이런 문장이 거의 전부다. 마치 잘못된 번역소설을 읽듯 껄끄러운 것이 이 때문이다. 묘사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순정만화풍의 남자 친구’라는 ‘현석’은 이렇게 유치하게 그려진다. “갸름한 얼굴에 긴 속눈썹, 날카로운 콧날의 그의 얼굴은 투명해서 손바닥을 대면 그대로 통과해버릴 것 같다.” ‘순정만화 수준의 필력’은 따라서 악문을 거듭 만들어낸다. “노란 회초리처럼 개나리가 담벼락을 후려치며 가득 피어 있다.” 세상에 담벼락의 개나리가 핀 것을 이렇게 엉뚱하고 억지스럽게 묘사하는 것은 문장이 아니다. 억지 묘사는 주인공 한 명이 택시를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연극적이었다”(29쪽)는 포복절도할 엉터리 묘사를 낳는다. 공지영 역시 비문이 많기로 소문이 난 작가. <봉순이 언니>는 은희경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지만 사정은 매일반. “하얗게 눈앞으로 다가오는 아직 풀냄새가 풀풀 나는 새 집의 낯선 벽지……”(7~8쪽) 도대체 어떤 벽지가 ‘하얗게 다가서는’가. 이런 문장은 “새 집의 흰색 벽지에서 풀냄새가 남아 있다”고 하면 된다. 사정이 이러니 60년대생 여성이 바라본 ‘그때를 아시나요’식의 성장소설이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작품에 대한 평론도 믿을 게 못 된다. 안목과 상관없으니 평론 행위는 여과 기능을 잃고 있어 독자의 혼란을 부채질한다. 반면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노작가의 승리이다. 근․현대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고령에 작품이 생산된 이 소설집은 과연 ‘인간 풍속의 세목에 통달한 사실주의’(평론가 황종연)이다. 염무웅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한 작품에 대해 ‘전설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했다’고 했지만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한 세대 이후 현저하게 역량이 떨어진 젊은 작가들의 불량품 문학에 더욱 그 성취가 도드라져, 문학의 위엄을 간직한 경우가 이 작가다. <‘문학의 위기’ 보여 주는 스타급 젊은 작가들> 문화일보 1999년 1월 20일․조우석 기자
나는 이 기사의 논지 자체에 대해 논할 처지에 있지 않다. 나는 ‘문학적 성취도’라는 잣대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소위 ‘낮은 완성도’라거나 ‘플롯상의 단선적 틀’이라거나, ‘엉성한 서사구조’라거나 하는 조우석 기자의 판단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입장도 아니거나와 그럴 의사도 전혀 없다.
그러나 나도 ‘문장’에 대해서만큼은 안다면 꽤 아는 편이다. 그런데 적어도 위의 기사들에 열거된 예문들이 왜 ‘악문’이고 ‘비문’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일상적인 한국어 문법보다 훨씬 더 엄격한 ‘소설 한국어 문법’이라는 게 따로 있어, ‘소설에 쓰인 문장’만은 다른 텍스트에 쓰인 문장과는 달리 그 문법의 적용을 받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국어의 문법으로는 비문도 아니고 ‘잘못된 번역소설을 읽듯 껄끄러’울 만큼 ‘꼬여 있는’ 악문도 아니다. 그러니 ‘비문’이니 ‘악문’이니 하는 평가는 언필칭 “공연한 폄하”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어와 조우석 기자가 알고 있는 한국어가 다른가? 하긴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문장들을 ‘비문’이라고 매몰차게 비판하는 기사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국어의 문법으로는 ‘비문’임에 틀림없는 이런 문장들이 발견되니 말이다. “이것은 공연히 행동의 묘사하는 대목에 들어가 영 어색한 것이 앞문장이다.” “문제는 이런 문장이 거의 전부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기본인 문장부터 ‘하자 덩어리’의 불량품들이다.” (흥미롭게도 이 세 문장의 공통점은 주어를 받는 서술어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조우석 기자의 말을 빌자면, “이건 문장이 아니다”! 게다가 더욱 ‘엉뚱하고 억지스럽’게도, ‘어떤 벽지가 다가서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조우석 기자식으로 표현하자면 ‘포복절도’를 했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이런 ‘유치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유치원생 수준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순정만화 수준의 필력’이니 ‘대학생 습작 수준’이니를 나무라는 비판이 그의 말마따나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예시된 문장 중에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는 건 ‘불현듯’의 경우다.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자면 조우석 기자의 지적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이 경우조차도 ‘선의’로 보자면, 그런 표현 자체가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다른 문장들은 아예 언급할 필요도 없다. 예컨대 나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청’한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알고 있다. 적확하지 않아서 꼬이기는커녕 무릎을 칠 만큼 적확한 묘사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다. 문제는 ‘비문’이니 ‘악문’이니가 아니라, 조우석 기자가 텍스트에 대해 전혀 ‘선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이 기사를 찬찬히 뜯어보자. 조우석 기자는 결코 ‘문장’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예컨대 개나리가 핀 모습을 ‘회초리가 후려치듯’이라고 묘사하면 안 된단다. 벽지가 ‘다가온다’고 느껴서도 안 된단다. 그러니까 그가 어색하고 불편해 하는 것은 그가 ‘엉터리’라고 늘어놓은 ‘문장’이 아니라, 소위 ‘순정만화풍’의 묘사와, 보다 정확히는 그러한 묘사를 낳은 감수성이다.
좋다. 나는 조우석 기자의 그런 불편함을 존중한다. 그거야 그야말로 그의 취향 아닌가. 나는 누군가의 취향에 대해서까지 왈가왈부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무모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면 애매한 ‘문장’을 트집잡지 말고 솔직하게 그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그 때문이다. (사실 나만 하더라도 은희경과 박완서에게는 많은 공감을 느끼지만, 공지영의 감수성은 선뜻 공감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공지영의 문장을 악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뿐더러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내가 공지영의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 건 그저 내 취향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만 말한다면 도대체 누가 내게 뭐라겠는가. 혹 공지영씨가 개인적으로 좀 섭섭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처지도 아니니 문제가 될 게 없다.)
만일 이 기사가 특정 작가의 감수성에 대한 조우석 기자의 불편함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독자는 자신의 감수성에 비추어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된다. 조우석 기자와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득력이 있을 것이고, 은희경이나 공지영과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어쩌면 반감마저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우석 기자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들의 소설은 ‘베스트셀러’다. 이 경우 솔직담백한 정공법이란 ‘대중의 감수성’을 싸잡아 ‘적’으로 돌리는 무모함일 뿐 아닌가.
그러나 유명 작가의 문장이 알고 보니 순 엉터리라고 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 풍토에서 표현 능력을 제대로 훈련받아 본 적도 없고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한 대다수의 대중은 ‘문법’을 들이대면 꺼벅 죽으며 주눅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문 기자이고 하물며 책을 상대하는 출판 담당 기자인데 어련히 잘 알아서 비판했을라구, 하는 게 아마도 대다수의 반응일 것이다. * 내 글 <말만 보면 말도 못 본다 - 이오덕의 ‘우리글 쥐어짜기’는 정당한가>에서 상세히 논한 바 있지만, 한국어에 대한 과학적 천착이 결여된 순환논리로 일관하는 이오덕류의 ‘작문 지침’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수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다. 같은 말이라도 ‘문장이 꼬였다’ ‘어색한 묘사다’라고 해야 한다. 그래도 ‘정확한 문장’에 대해 영 자신이 없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그게 같은 말인 줄은 모른다. 그저 큰일났군, 정말 문학의 시대는 갔나 봐, 라고 선동된다. 그리고 조우석 기자 같은 이가 불편해할 만한 어떤 감수성에 대해 ‘문장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주제에’라고 폄하하게 된다. 보라, ‘공연한 폄하가 아니’라지 않는가. 더 처참한 것은 그러한 폄하의 대상에 독자 자신의 감수성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어디에 내놓기도 창피하고 남부끄러운 ‘유치한 순정만화풍’이라고!
이 기사에 어이없어 하며 한창 화를 내고 있는 판국에 ‘후속타’가 또 터져나왔다. 마저 감상해 보자. 역시 전문을 인용한다.
'스타급 젊은 작가들, 문학의 위기 보여 주나‘라는 제목의 기사는 실은 ’반쪽‘에 불과했다. 지면이 짧기도 했지만, 본래 짚어 보려 했던 ’문학다운 문학은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성찰이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90년대 스타작가의 베스트셀러물인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문학동네),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푸른숲)를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창작과 비평)과 함께 읽으면서 변화된 문학동네 지형지물까지도 읽어 내는 작업이다. 보자. 기자는 두 작가가 ‘문학행위의 기본인 문장 구사와 묘사조차 안 되는 불량품 문학’의 장본인이라고 지적했지만, 이 규정은 80년대 이후 등단한 상당수 작가들에게도 해당된다. 정말 걱정되는 것은 문학의 직무유기 현상이다. 즉 사회 각 영역이 생산성 내지 사회기여도를 잣대로 검증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문학은 ‘그들만의 문학’으로 변질돼 왔다. 출판사의 ‘스타 만들기’ 상업주의에 평론가들의 직무유기가 상승작용해 여과장치가 없는 상황, 특정 작가를 둘러싼 ‘가짜 신화’의 독서시장 유포 등이 그 사례다. 다시 밝히지만, 두 작가의 엉터리 문장과 묘사의 사례는 결코 ‘예외적인 실수 몇 개’를 침소봉대한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문장이 그렇다. 은희경을 재론하자면, 소설 뒷부분에 술에 취한 남자를 묘사하면서 “(그는) 마치 밤거리에서 멋진 탭댄스를 추고 있는 것 같다”(270쪽)고 말한다. ‘한 번 별나게 표현하려는’ 의도이겠지만, 취객의 헛걸음질을 정교한 발놀림의 탭댄스에 끌어다붙이는 억지 묘사는 공감은커녕 헛웃음을 유발한다. 또 이 작가는 봄기운을 말하는 대목에서 “공사장 인부들도 마치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를 낭송하면서 일하는 듯하다”(13쪽)식으로 표현한다. 말할 것도 없는 2.5류 문장이다. 공지영의 경우 이번 신간만이 아니고 출세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부터 고질적인 악문(惡文)을 예고했다. 다음은 이 작품 도입부의 첫 문장인데, 이 작가의 상황 묘사 능력 결여가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 주는 치명적 대목이다. “전화벨은 어둠 속에서 혼자 울리고 있었다. 식빵까지 사들고 오느라 짐이 많았던 혜완은 허둥지둥 열쇠를 밀어넣었지만 열쇠는 쉽게 따지지 않았다. 잠시 후 혜완이 가방을 팽개치며 수화기를 들었을 때 전화는 끊겨 있었다.” 무심히 읽어도 좀 이상할 것이다. 왜 그럴까. 우선 이 상황이 이뤄지고 있는 ‘집 현관’ ‘거실’에 대한 공간 설정 소재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빈칸을 번번이 채워 읽어야 하는 독자로선 짜증이 난다. 두번째와 끝문장 사이는 ‘낑낑댄 뒤 문을 열었다’는 식의 순차적 상황이 누락됐기 때문에 엉망이 된 경우다. ‘잠시 후’라는 말이 있지만 설명 부족은 마찬가지이다. 혹시 주인공이 신기한 순간이동 재주로 바람처럼 문을 통과했느냐고 작가에게 묻고 싶다. 이런 상식 이하의 졸문 때문에 ‘열쇠를 땄다’고 하는 실수는 차라리 애교다. 문장 단 3개, 그것도 소설의 첫 줄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발견은 충격적이다. 이런 역량의 작가에게 서사능력까지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리라. 하지만 바로 이런 것이 30대 작가들의 수준이다. ‘요절(妖折) 프리미엄’을 엎고 과대포장된 작가가 김소진. 지난해 7월 나온 <달팽이 사랑>(솔)은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역량이다. 이런 수준을 벗어난 작가는 윤대녕 신경숙 구효서 등 불과 몇 명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 등단한 방현석, 김영현 등도 ‘문장이 안 되는’ 전단(傳單) 수준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사안은 문단 내부를 떠나 실은 중차대한 문화적 현안이다. 근대 한글 문장은 불과 1백 년 내외에 불과한데, 한글 문장이 채 완성을 보기도 전에 다름아닌 ‘문장 지킴이’ 작가들 손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우려되고 개탄스럽다. 그러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가. 우선 예전의 엄격한 추천제와 달리 등단 과정상의 허술함이 지적돼야 한다. 그 결과 이제 문학은 ‘아무나 뛰어드는 일’이 됐다. 비평계의 직무유기도 문제다. 공정하고 투명한 여과장치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문학작품 유통상의 불행이다. 물론 상업주의도 큰일이다. 하지만 이런 요인만큼 중요한 것이 80년대 이후 양질의 인적 자원들이 문학동네에 유입되지 않는다는 시대변화, 그리고 기본적으로 전자미디어 시대 활자의 응전력이 떨어져가고 있다는 점도 결정적 요인이다. ‘과연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 특정작가에 대한 폄하가 아닌 이 질문은 우리를 거듭 우울하게 한다. <책과 사회:베스트셀러 작가 종합리뷰 Ⅱ> 문화일보 1999년 2월 3일․조우석 기자
나는 아직도 뭐가 ‘엉터리 문장’이고 ‘악문’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조우석 기자의 한국어와 나의 한국어가 다른 거나 아닐까 하는 실없는 의심은 하지 않는다. 애당초 조우석 기자가 문제삼고자 한 것이 ‘문장’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 마당이므로. 이 기사는 그저 그걸 더 분명히 해 줄 뿐이다. 그러니까 조우석 기자는 술주정뱅이의 걸음에서는 탭댄스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아니 안 된다고는 안 했다. ‘2.5류’란다. ‘3류’보다 반 등급씩이나 올려 평가해 준 걸 감지덕지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장담하지만, 그가 ‘이 수준을 벗어났다’고 평가한다는 일련의 작가들에게서도(심지어 나와 조우석 기자가 공히 인정하는 박완서에게서조차도) 조우석 기자식으로 따지자면 ‘악문’이 되는 문장을 나는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 페이지에 몇 개씩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 조우석 기자식의 ‘한국어 문장’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심히 읽어도 좀 이상하다’는 문장을 무심히, 또 꼼꼼히 수십 차례나 거듭 읽어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뭘까. 아마도 조우석 기자에게는 ‘짜증’을 유발하는 ‘빈칸’이 내게는 ‘상상의 여지’를 제공하는 ‘행간의 여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서두에 밝혔듯 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르므로, 어느 쪽이 더 잘 된 소설 작법인지를 따지지는 않겠다. 하지만 ‘설명 부족’이라는 투덜거림에 이어 ‘순간 이동’을 들먹이는 대목을 보고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는 건 덧붙이고 넘어가겠다. 앞서 ‘유치원생 수준’이라는 표현이 혹 지나친 건 아닌가 내심 찜찜했는데, 그야말로 ‘예외적인 실수를 침소봉대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쇠를 땄다’는 실수를 ‘애교’로 봐 주겠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다. 그 보답으로 나도 ‘한글 문장’과 같은 실수*는 ‘애교’로 봐 줘야겠다. * ‘열쇠를 땄다’를 굳이 ‘자물쇠를 땄다’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고 주장한다면, ‘한글 문장’도 ‘한국어 문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한글 문장’이라는 말처럼 ‘열쇠를 땄다’는 표현도 ‘실수’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통상 어법상 ‘자물쇠’는 고리에 걸어 사용하는 ‘자물통’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에 부착되어 있는 자물쇠는 ‘자물쇠’라고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조키’(혹은 ‘보조열쇠’)라는 영어권 사람들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릴 콩글리시도 생겨났을 것이다. 아마 조우석 기자는 ‘역전앞’이라는 표현은 안 쓸 것이고, ‘조간 신문’을 ‘조간’이라고 꽁무니를 잘라내지는 않을 것이다. 혹 ‘머리를 깎는다’고 하면 ‘머리카락을 깎지 어떻게 머리를 깎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애교로 봐 주기가 힘든, 아니 애교로 봐 줘서는 안 될 ‘실수’ 아닌 ‘고의’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조우석 기자의 글을 선의로 봐 주자면, 문단 일각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려다 보니 ‘실수’로 좀 ‘오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비판도 과녁을 빗나가는 바람에 고작해야 하나마나한 개탄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그런데 그가 과연 상업주의에 대해 그렇게 개탄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그가 특정 작가의 ‘정서’나 ‘감수성’ 혹은 좀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세계관’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직설화법으로 토로하지 않고 뜬금없이 ‘문장’에 시비를 건 것은 상업주의적 게산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혹 상업주의가 그에 대한 부당한 모욕이라면 ‘문화적 패권주의’라고 말하면 좀 덜 모욕적이려나. 어느 쪽이든 뭐 묻은 뭐가 뭐 나무라기는 매한가지다.
‘문화적 패권주의’에 대한 혐의는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하필 ‘등단 과정상의 허술함’에서 찾으려는 시도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그러니까 조 기자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 문학이 ‘아무나 뛰어드는 일’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도 이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 기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자가당착적 논리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비평이 직무 유기를 하고’ 있고, ‘공정하고 투명한 여과장치’가 없는 ‘불행한’ 상황에서 ‘예전의 엄격한 추천제’를 들먹이는 것은, 조 기자 자신이 지적한 바 공정하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문단 권력’을 옹호하자는 속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조 기자는 비평가들의 잣대를 신뢰하는가 신뢰하지 않는가. 정확히 말하라. 만일 신뢰하지 않는다면, ‘엄격한 등단 절차’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혹은 공정성과 투명성에 의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뢰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일부의 ‘문필 귀족’들만이 문학 행위를 독점하는 ‘전근대적인’ 질서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패권주의’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이 문제에 관하여는 <통신글쓰기와 새로운 작가집단의 출현>에서 자세히 썼고, 또한 <사이버문학의 매체, 공간, 그리고 주체>(<버전업> 1996 여름)에서도 다룬 바 있다.
게다가 나는 상업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억하심정이 없다.* 그러나 비열한 상업주의에 대해서만큼은 크게 분노한다. 왜냐하면 그 ‘비열함’에 대한 혐오가 ‘상업주의’ 자체에 대한 부당한 폄하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의 질을 재는 잣대로서 ‘시장’이 가진 문제점도 매우 크지만, 적어도 소수 문필 귀족이 독점한 문단 권력의 ‘추천’을 빙자한 ‘겸열’보다는 훨씬 더 공정하고 투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우석 기자가 개탄해 마지않는 문단 일각의 상업주의와 조우석 기자의 상업주의(혹은 ‘문화적 패권주의’)는 그런 점에서 아주 다르다고 생각한다. 설령 일부 베스트셀러 소설이 함량에 비해 ‘과대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명색 기자가 생사람 잡을 엉뚱한 잣대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비할 수 있을까. 최근의 ‘최장집 죽이기’ 사건을 돌이켜보더라도 그 대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적반하장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 이러한 내 생각은 내 글 < TV 속의 운동권 상품화>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바 있고, <강준만, 불온한 합리주의자와의 만남>에도 그 일단을 드러낸 바 있다. **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글에 지면을 할애해 줄 매체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어 보았다. 이런 걱정이 쓸 데 없는 기우이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였다. 나 역시도 출판계에서 오래 일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의 게재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심정적으로 이해한다. 요컨대 조우석 기자에게는 다소 미안한 얘기지만, 조우석 기자는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미 출판사들에게는 공개적 비판의 ‘성역’이다. 나는 조우석 기자에게 일간지 출판 담당 기자로서 가지게 된 그 ‘권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그가 그 권력에 대해 스스로 투명해질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본의든 아니든 자신이 가진 그런 막강한 힘에 대해 조금만 더 심사숙고했다면, 심지어 ‘문장’을 트집잡지 않고 그저 자신의 ‘취향’을 표현할 뿐인 내용의 기사를 쓰는 데도 훨씬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생사람을 잡다 못해 이미 고인이 된 김소진을 가리켜 ‘요절 프리미엄’이라고 못박은 것은 그야말로 ‘가히 경악할 만한 수준’의 폭언이다. 김소진의 유작집 <달팽이 사랑>의 ‘소설적 완성도’에 대해 그가 어떻게 평가하든지는 물론 그의 자유이다. 나는 그걸 시비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내게는 그럴 만한 ‘역량’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다. 조우석 기자는 김소진이 생전에 발표한 소설에 대한 사후 평가가 과장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유작집에만 국한해서 말한 것인가.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기사의 문맥은 매우 모호하다.
만일 전자라면, 그 근거를 은희경과 공지영의 경우처럼 낱낱이 해부해 주기 바란다(물론 나는 그 근거가 마찬가지로 전혀 터무니없는 ‘문장론’에 기인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비판해 드리겠다). 김소진의 ‘문장’에 대한 찬사를 여러 경로로 접해 왔던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게다가 일간신문사의 교열기자로 꽤 오래 일했던 그의 경력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 그 모든 사전 정보를 떠나서, 근거를 생략한 채 그런 식으로 못을 박는 건 폭언이다.
만일 후자라면 그건 더 심각한 폭언이다. 그건 단지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악의’를 가지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힘든 발상이기 때문이다. ‘요절 프리미엄’이라는 말을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살아 있었다면 작품으로 발표되지 못했을 글이 버젓이 출판되었다’는 의미로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이나 예술 일반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일반인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유작’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죽은 사람이 퇴고를 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닐 테고, 그렇다면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고인의 자취를 애써 되짚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국 ‘생전의 작품에 대한 평가’라는 전자의 문제로 돌아가 버리지 않는가. 아하, 그래서 기사의 문맥이 그렇게 모호한 건가! 이거야말로 ‘가히 경악할 만한 수준’으로 꼬여 버린 문장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라. 생전의 작품에 대한 ‘과장된’ 평가에 이견이 있다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하라. 공연히 ‘유작’을 가지고 ‘요절 프리미엄’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건 아주 비열하다.
나는 조우석 기자가 은희경이나 공지영 같은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 세계(와 그에 드러난 ‘감수성’과 ‘정서’ 혹은 ‘세계관’)에 대해 못마땅해하거나 불편해한다면, 그건 그의 ‘사상의 자유’로서 존중한다. 그가 김소진을 그저 일찍 죽어서 유명해졌을 뿐인 그저그런 소설가라고 평가한다고 해도, 김소진을 무척 좋아하고 그의 때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나로서는 전혀 동의할 수는 없을망정 그의 그런 의견을 존중한다. 그가 박완서를 높이 평가한다면 그러한 판단 또한 얼마든지 존중할뿐더러 심지어 동의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대중 앞에 공공연히 드러낼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서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을 권리도 나는 역시 존중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결코 그 누구도 사용해서는 안 될 아주 위험한 잣대를 동원해서 자신의 속내를 교묘하게 드러내고야 말았다. * 예컨대, 최근에 나온 <조선일보를 아십니까?>(개마고원)에 실린 김정란 교수의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를 보자. 이 글에서 김 교수가 은희경을 비판하는 잣대로 사용한 김 교수의 문학관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요컨대 김 교수와 나는 ‘취향’이 다르다. 그러나 나는 김 교수의 그런 ‘취향’을 존중하고, 그러한 문학관을 표현할 자유를 인정한다.
조우석 기자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누군가의 ‘문장’을 ‘악문’이니 ‘비문’이니 ‘엉터리’니라며 함부로 재단할 권리는 없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속내를 한편으로 감추면서 또 한편으로 드러내기 위한 교묘한 사기에 지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설령 그의 말마따나 ‘문장 지킴이’인 작가에 대해서라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아니 작가는 ‘문장 지킴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언어학의 아주 초보적인 ‘대학생 리포트 수준’의 상식 한 가지:말은 변한다. 시시각각 ‘변화’할뿐더러 상황과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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