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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진한 딸들을 유혹하는 한 그릇의 짜장면
작성자 똥개
요란한 선전문구 그대로 여성들이 드디어 반란을 시작한 것일까? 그들은 비도 오지 않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의 뜨거운 슬라브 옥상바닥에서 농성(그들에게 농성의도가 있었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겠다. 80년대의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던 숱한 점거농성들, 특히 그 가운데에서 ‘과격’이라는 여론재판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몇 건의 대형사고들은 바로 이 영화에서처럼 얼떨결에 밀려올라간 것이었음을 기억하자.)을 하고, 그들을 옥상으로 내몬 채 변함없이 돌아가는 지상의 세상과 대치하면서 연대를 확인하고,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자진해산한다. 과연 영화 속의 대사 그대로 “할 만큼 한” 것인가.

그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관객의 입장으로 이 영화를 보자.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에게 함께 분노를 느끼고, 다소 과장된 몸짓의 집단폭행에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마누라를 졸병쯤으로 취급하는 기동대장에게서 실소를 터뜨리다가는 시종 농성자들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마음껏 조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모에 따른 취업차별이니 남편의 두세 배 열심히 일하고도 자기 재산 하나 없는 불평등이니 또는 독신여성이나 작부에 대한 편견이니 심지어 성정체성의 문제까지 건드려 대는 주인공들의 살아온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강제진압을 가로막으며 몰려오는 시위대열에서 가슴뭉클한 감동을 느끼기까지 하겠지. 그리고 자막이 올라갈 때 과연 무엇이 남았을까.

영화 밖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다. 안 죽을 만큼씩 맞고 사는 여성들이 하나둘이 아니건만 누가 알새라 벙어리 냉가슴에 시달릴 뿐 맞다 못해 ‘이웃의 시선’ 안으로 뛰어들기까지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 것이며, 또는 그렇다고 해서 ‘남의 부부싸움’에 공연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뒷걸음질치지 않고 죽도록 몰매를 놓을 만큼 정의로운 이웃은 또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들의 이야기에 고질적인 선정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언론이 있을 것이며, 그 상황에 고무되어 집안일을 내팽개칠 주부들이 ‘식당이 때아닌 호황을 누릴 만큼’ 나타날까. 하물며 강제진압을 끝내 막아낼 수 있는 규모의 항의시위대가 조직될 것이며, 설령 그렇다 한들 저들이 강제진압을 포기할 것인가. 여성단체의 항의가 없어서 종군위안부 문제가 제자리 걸음이고, 성희롱 재판이 그 꼴로 끝났는가. 현실은 여전히 견고하고 또한 연대의 길은 더더욱 멀다.

옥상 위에서의 화해는 또 얼마나 어설픈가. 고립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남편 출근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주부들이 다시 그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과연 작부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송두리째 철회하는 것이 가능할까. 남편의 외도라는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 해도 아내와 정부가 공동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서로를 이해하며 손을 맞잡고 함께 대응할 수 있을까. 부녀회장이 지역의원에라도 출마하면 모든 현실적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투표할 수 있을까. 두 시간 동안이나마 현실을 떠나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는 기억 말고 도대체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래도 웃을 일 하나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영화라는 허구를 빌어서나마 웃음이 허락된 공간이라도 있다는 것은 미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함정이 있다. 방향을 거꾸로 돌려 영화 속의 문제제기에 동의할 수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영화를 보자. “여자가 남자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모셔주던 좋은 세상은 다 갔다”고 씁쓰레하게 자조하며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에게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이 아니”라고, “당신들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다”고 아무리 현실적인 근거를 들이대 봤자 공연한 피해의식을 상쇄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간 큰 남자’ 시리즈의 이면에서 남성중심 사회의 조작된 공포를 발견한다. ‘간 큰 남자’는 사실 우리 시대의 평범한 남성의 모습일 뿐 특별히 용감한(?) 남성이 아니다. 그러한 묘사를 두고 ‘간이 크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들 사이에서 이 시리즈가 선망의 대리충족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통해 회자되고 있는 반면, 남성들에게는 초라한 자신에 대한 냉소와 ‘간 큰 여자’들에 대한 적대감의 확인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리즈는 ‘높아가는 여성의 목소리, 위축되는 남성’이라는 허위와 과장으로 가득찬 상징 조작인 셈이다.

이 시리즈가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가상의 공포를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여전히 엄연한 현실에서의 성파별 구조는 교묘하게 은폐된다. “이만하면 남녀평등은 고사하고 이미 여성상위 아닌가.” 가상의 공포, 현실과 동떨어진 피해의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 역사적 증거들은 숱하게 널려 있다. 독일인의 유대인에 대한 피해의식을 강화조작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대학살이 자행될 수 있었음을 기억하자.

이쯤되면 속 시원하게 펼쳐지는 화면을 놓고 마음놓고 웃을 수조차 없게 된다. 그 웃음마저도 영화 속의 어법을 빌자면 ‘짜장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옥상의 어머니와 지상의 딸 사이에 가능할 수도 있었던 연대가 짜장면 한 그릇과 손쉽게 맞바꿔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바람피운 아버지를 따라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주문에 어린 딸은 천진하게 대답한다. “아버지 말 잘 들어야 짜장면 사준댔어.” ‘간 큰 남자’ 시리즈의 대리만족에나 머물러야 하고 고작해야 코메디 영화나 보면서 즐거워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면 짜장면 한 그릇에 어머니를 외면하는 천진함일 뿐 아닌가.

게다가 이 모든 상황들이 영화 도입부의 타이틀백이 암시하듯 단지 날씨가 더워서 벌어진 극단적인 해프닝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미덕은 있다고 인정해 줄 수 있는 그 모든 암시조차도 사실은 한 판의 코메디였을 뿐이라고까지 스스로 말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이 영화가 코메디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그들의 투쟁이 좀더 외로왔더라면, 그들 내부의 갈등이 어설프게 화해되지 않고 문제제기로 남겨졌더라면, 아니 그들이 끝내 강제진압의 상황에 버려졌더라면, 안 그래도 답답한 여성관객들을 더욱 답답하게만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답답함이야말로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힘의 출발점이 아닐는지.
발표지면 (넷) 1995.
단행본수록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대상 개 같은 날의 오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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