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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리의 ‘적’(?)은 우리 안에 있다
작성자 똥개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원색적인 독설로 조롱해 댄 책을 읽으며, 나는 오히려 우리로서는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미국 사회의 ‘두께’를 실감하며 솔직히 부럽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내가 부러웠던 건 ‘왕도둑’이 대통령 자리를 훔치고, 천하의 머저리들이 세계를 쥐락펴락하도록 내버려 두는 ‘파렴치한’ 미국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좀 에둘러 얘기를 해 보자. 우리 사회에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는 없지 않고, 때로 그것은 가슴이 후련한 독설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나마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비판들을 잘 뜯어 보면 언제나 ‘대다수의 대중’은 선량한데 일부 ‘나쁜 놈들’이 문제라는 식이다. 만일 예컨대 흔한 말로 ‘엽전들은 안 돼’라는 식으로 대중들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다면, 그런 내용의 책이 주목을 받는다는 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미국 사회라고 별다를까.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바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멍청한 백인들>의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윤리적이지도 않고, 섬세한 지적인 논리성도 없으며, 미사여구도 보이지 않는”(<로스엔젤레스 타임스>) 이 책을 출간 한 달만에 아마존을 비롯해 미국 유력 일간지가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1위를 평균 8주 동안 지키게 한 미국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좀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냉전 논리에 찌들어 있는 시대 착오적 정당에서 내놓은 심지어 성폭력의 의혹까지 제기된 후보에게 70퍼센트에 가까운 몰표가 쏟아져 나왔는데도, 우리는 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투표 행태를 내놓고 ‘멍청하다’고 감히 조롱할 수 없다. 혹시 누군가가 용감하게도 그런 시도를 한다면, 베스트셀러는커녕 ‘지식 사회’에서 그야말로 ‘매장’당할 것이다. 가장 호의적인 반응이라야 아마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는 냉소(!)쯤일 게다. 학살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소위 ‘5공화국 헌법’에 90퍼센트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그 ‘민중’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지를 질문하는 (‘조롱’이나 ‘비난’조차도 아닌) 조심스러운 ‘자성’의 목소리에 대해서조차도 “민중을 적으로 돌린다”는 반격이 뒤따라다니는 것이 에누리없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 아닌가.

예컨대 누가 감히 ‘멍청한 영남인’이라고 함부로 말을 할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가장 직설적인 공격의 선봉에 섰던 강준만 교수조차도, ‘혹세무민하는 언론’에 결정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그 ‘악마적 범죄’에 놀아나는 ‘우중’(愚衆)에게 직격탄을 날려야 하는 부담에서 슬쩍 벗어나지 않았던가.(물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이클 무어가 백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멍청한 백인들>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멍청한 남성들’, ‘파렴치한 비장애인들’, ‘낯 두꺼운 이성애자들’ 등등에 이르러서는 아무 할 말이 없어진다. 설령 아무리 치열한 문제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아니 문제 의식이 치열하다면 더더욱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불문율’이다.

이 ‘불문율’이 단지 심각한 문제일수록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엄숙주의적 강박’에만 기인하는 것 같지도 않다. 예컨대 엄숙주의를 조롱하고 ‘발랄한 일탈’을 모토로 내건 <딴지일보>의 경우를 보라. <딴지일보>에 대한 열광은, ‘야유’와 ‘조롱’이 주는 카타르시스에만 있지 않다. 그들은 끊임없이 ‘야유’하는 한편으로 ‘멍청이’들을 달래고 얼르고 구스르려는 제스처를 언제나 잊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런 제스처가 생략되었다면, 이 ‘천재적인 풍자’조차도 그렇게까지 선풍적인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멍청한 백인들>과 같은 조롱과 야유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런 야유를 받는다고 정신 차릴 사람들이라면 애당초 멍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마이클 무어 역시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그는 쓸 수 있고, 한국 사회에서 나는(혹은 그 누구도) 쓸 수 없다(혹은 써 봤자 안 통한다). 이 새삼스러운 차이에서 미국 사회의 ‘두께’를 실감하는 것도 혹시 ‘기지촌 근성’일까? 아무려면 어떤가. ‘멍청한’ 것으로 치면 세게 수준급인 한국의 남성(아마도 ‘미국 백인’과 ‘한국 남성’이 누가 더 멍청한지 겨루면 월드컵 한미전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주제에 ‘기지촌 근성’ 아니라 그보다 더한 멍청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빙상 선수가 금메달을 강탈당한 데 대한 분노로 ‘반미’(?) 정서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되었다는 ‘씁쓸한 농담거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마이클 무어가 미국 사회를 향애 쏟아낸 노골적인 야유가 ‘제3세계’의 ‘유색 인종’에게 속이 후련한 통쾌함으로 다가오리라는 것쯤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통쾌한가. 나는 차라리 부럽고 부끄럽다. 백인은 백인을 비난하고 조롱하는데, 왜 우리는 서울대 출신들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서울대 출신을 볼 수 없는가. 백인이 “백인놈들을 죽여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그렇게 통쾌한 일인가, “비장애인놈들을 죽이라”는 비장애인이 없다는 것이, “이성애자놈들을 죽이라”고 외치는 이성애자가 없다는 것이 실은 더 참담하지 않은가.

나는 소망한다. 설령 그것이 내게 금지된 것일지라도. <멍청한 영남인들>, <서울대, 니들끼리 다 해먹어라>, <남자놈들을 죽여라>, <빌어먹을 비장애인들>, <엿먹어라, 이성애자놈들>, 같은 직설적인 제목을 달고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실은 우리 자신임을 까발겨 주는’ 책이 시내 대형 서점에서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런 책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최소한 그쯤은 돼야 <멍청한 백인들>을 읽으며 마음놓고 키득거리며 공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발표지면 말, 2002.7.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대상 마이클 무어, <멍청한 백인들>, 김현후 옮김, 나무와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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