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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작성자 똥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쉬리>의 흥행 기록을 경신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남북 정상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지는 납북관계의 급진전 상황과 맞물려 호소력을 더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이 씌어진 것은 <쉬리>의 개봉보다도 훨씬 전의 일이다. 적어도 남북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는 면에서 <쉬리>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의 원작이 실은 <쉬리>보다 먼저 씌어졌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선은 소설적 상상력과 영화적 상상력 사이에 일정한 시간적 지체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의아스러운 것은 통상은 좀더 대중과 밀착해 있기에 시류에 빠르게 반응하게 마련인 영화쪽이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내기 위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정돈할 여유가 필요한 소설보다 오히려 앞서가곤 하지만 이 경우 반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소재 자체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서 영화가 문학보다는 소재 선택에 있어 훨씬 자유롭지 못하다는 정황이 있다. 오죽하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제작사 사무실이 습격당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나겠는가.

이와 관련하여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은 발표 당시 ‘오늘의 작가상’ 후보로 최종심에까지 올라갔지만, 현실적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상작이 되지 못했다는 작가 이문열씨의 전언이다. 그러나 이문열씨도 지적했듯이 이 소설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되었던 부분은 1년 후 이른바 ‘김훈 중위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사실로 밝혀져 충격을 던지며 화제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니 명필름을 습격한 제대 군인들은 이미 1년 전에 만천하에 드러났던 사실에 시치미를 떼면서 뒷북을 치듯이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해댄 셈이다.)

이렇듯 영화와 소설의 속성이 다른 탓에 사실 영화는 원각 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소재만을 차용해 왔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그리고 그것이 3년 전에 나온 책을 새삼스럽게 이 지면에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담아낸 문제의식은 남과 북의 화해에 초점을 두면서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소설의 문제의식은 조금은 다른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 에둘러 말하자면, 영화는 ‘이산가족 상봉’의 감동이라는 시류를 강하게 탈 수 있는 요소를 분명히 포함하고 있지만, 소설은 남북 정상 회담이나 이산 가족 상봉 따위의 이슈와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영화를 보면서도 혹 예민한 관객이라면 ‘중립국’의 무력한 위상을 설명하거나 ‘제3국행 포로’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영화 안의 맥락에서는 주변적인 배경 설정에 그친다. 그에 반해 소설은 좀더 깊숙한 지점에서 <광장>의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으며, 약간의 과장이 허락된다면 <광장>의 전쟁 미체험 세대 버전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다.

이 점은 저자 박상연씨가 소설 말미에 뭍여둔 <작가의 말>을 통해 좀더 직설적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영화가 이 즈음의 ‘통일 무드’를 타고 있다는(혹은 그러한 무드를 증폭해내는 데 한몫하고 있다는) 데 이견을 가질 관객은 거의 없겠지만, 소설의 작가는 오히려 “통일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것은 결코 역설적이거나 위악적인 표현이 아니다. 작가는 좀더 분명한 어조로 “나의 관심은 통일이 아니라 분단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이 말이 한낱 말장난으로 여겨지는 독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를 가장 귀기울여 들어야 할 사람이다. 바로 그런 식의 ‘분단 극복 = 통일’이라는 무의식적인 등치조차도 실은 ‘분단 체제’가 우리 안에 각인해 버린 ‘조건 반사’일 뿐이라는 게 작가의 판단이다. 작가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시를 음미해 보자.

“작년이던가, 어떤 기관에서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하는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중 비교적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 중에 이런 것들이 기억난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 다리가 길어지고 싶다, 날신해지고 싶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삐삐를 갖고 싶다, 등등 그것은 매우 다양했고 특별히 압도적인 것은 없었다. 내가 그 기사를 관심있게 본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같은 내용의 설문 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80퍼센트 이상의 응답을 얻어내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 소원은 바로 통일, 통일이었다. 내가 그 설문지를 받았더라도 그 당시엔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설문 조사 결과가 조금도 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거대하고도 무서운 폭력이다.”

생각해 보면 실로 어이없고 끔직하기까지 한 일이다. 왜 우리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던 것일까. 지난 봄 어느 신문의 창간 특집호 1면 머릿기사를 보면서 아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신세대 의식 조사를 했더니 ‘통일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이 40% 가량 나왔다고 지적하면서 ‘통일 교육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다수의 국민이 통일이 굳이 필요없다고 판단한다면 구태여 통일 교육을 할 필요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다는 것인가. 이 기사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분단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옅어지고 있다는 세태를 개탄하고 있지만, 예컨대 만일 적대의 해소를 포함한 ‘분단의 극복’을 물었더라도 ‘필요없다’는 응답이 그렇게까지 나왔을지는 사실 의문이다. 단지 통일이 구태여 필요없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그것이 왜 ‘분단이니 통일이니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극단적인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통일’이라는 형식은 분단 극복의 유일한 대안이 아닐 수 있으며 심지어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통일에의 염원’으로 환원되는 것은 사실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엄청난 비약이다. 그리고 무엇이 그런 무의식적인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 소설은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대폭 생략되어 그 원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조건 반사’이다. 거제도에서 또 판문점에서, 그리고 주인공이 군견을 사육하는 과정에서, 조건 반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반복되며 서로 중첩되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맹목적인 ‘반북’ 선동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매우 의미있는 진전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가 보여준 무시할 수 없는 미덕은 결코 폄하될 수 없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통일’을 향한 거대한 행보의 첫걸음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만다면, 우리는 사실 분단 체제가 우리에게 각인한 피폐한 상처로부터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셈이다.

특히나 통일 무드가 무르익으면서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의 통일 못지않게 문화적 차원의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부의 시각은 일견 적절한 문제 제기로 오인되곤 하지만 사실은 아주 위험하다. 도대체 문화를 ‘통일’한다는 폭력적 발상이야말로 바로 지난 50년간의 분단 체제가 낳은 적자(嫡子)가 아닌가. 두 개의 문화가 하나의 문화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로지 둘뿐이었던(영화 속의 표현을 빌자면 ‘빨갱이와 빨갱이의 적이 존재할 뿐 중립은 없다’는) 문화가 다양한 여러 문화로 분화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탈분단’이지 않겠는가.

발표지면 인물과 사상, 2000.12.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대상 박상연, <DMZ>,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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