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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발랄하지만 진지한 말걸기
작성자 똥개
우리 사회에서 성(性)에 관한 담론은 오랜 금기의 사슬에 묶여 있다. 이 금기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했다가 사회적 왕따는 물론 법적 처벌까지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은 성 담론이 왜곡된 양상으로 상업주의의 제물이 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군가에게는 쏠쏠한 돈벌이가 되는 장사 밑천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난과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결단이 되기도 하는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관건은 무엇일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그 담론이 담고 있는 내용과 지향이 결과적으로 가부장적 성 차별에 기반한 사회 체제에 위협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일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러한 담론에 참여하는 당사자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바꿔 말하면 사회 구성원 개개인, 특히나 성적 억압의 직접적 담지자인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성을 인식하는 데 매개가 되는 일체의 담론은 위험하다. 오로지 여성을 대상화하고, 주변화하며, 여성의 성 자체를 상품으로 소비하는 데 이바지하는 담론만이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한 욕망의 하수구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 뿐더러 그 과정에서 이윤을 만들어낸다.

이 책 <즐거운 딸들>은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 쪽에 속하는 책이다. 여성의 성을 여성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다지 급진적이랄 것도 없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는다뿐이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일 때조차도,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하물며 이 책에는 공동 필자 중의 한 사람인 ‘제시’가 그러하듯이 때로 같은 여성에게조차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들도 담겨 있다.

성애가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한다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도발적인 통찰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성애를 ‘로맨틱 이벤트’로, 그리하여 ‘섬씽 스패셜’로 여기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의 성을 여성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도록 쳐 놓은 가장 견고한 덫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무도 종족 번식과 관련된 성애만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낡은 관념에 매몰되어 있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다. 그 최후의 보루마저 돌파하고 나면 더 이상 (여성의) 성은 남성의 일방적인 시선에 갇혀 있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팍시’가 “섹스는 일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여성의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고작해야 “아이를 낳을 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손을 털어 버리곤 하는 저 유명한 구성애가 주장하는 “섹스는 일상”이라는 말과 겉으로 드러난 표현은 붕어빵처럼 같되 그 의미는 정반대 방향을 겨냥하는 것이다. 좀더 친절하게 부언하자면, 구성애가 주장하듯 성애를 일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는 포르노그라피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왜곡된 환상일 뿐이라면, 실은 성애를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두어두려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 역시도 성애를 일상으로부터 떼어놓기는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남성 중심 사회가 유포하는 이러한 관념이 흔히 마치 여성 고유의 것인 양 오해되곤 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딜레마가 있다. ‘제시’처럼 “섹스는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보다 은밀하고 은근한 이심전심으로 소통이 이루어질 때 더 만족스럽고 짜릿하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섹스가 밥 먹는 것처럼 별 거 아닌 일이 돼 버리는 것”을 꺼리는 이들에게 ‘팍시’처럼 “밥 먹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팍시’가 정확히 지적했듯 “생활이 된 섹스는 더 이상 로맨틱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돋보이는 대목은 바로 이곳이다. 이 딜레마의 극복이야말로 이 책의 존재 가치이기 때문이다. ‘팍시’의 말을 빌자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로맨틱한 감성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고, 그 즐거움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방법은 “육체를 정신의 억압으로부터 놓아 주자”는 것이다. “섹스는 근본적으로 육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장 이 책의 제목이 중의적으로 암시하는 ‘자위’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자위’를, 하물며 ‘여성의 자위’를 입에 담는 것을 불온시하는 데 대한 ‘팍시’의 일갈은 통렬하다. “자위에 대해서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섹스에 대해서 솔직하게 파트너와 대화하고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대답이 궁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는 참 쉽다. ‘제시’의 불만처럼 “당위와 격려가 부족해서 벙어리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것이 이 책이 가지는 두 번째 커다란 미덕이다. 이 책은 때로 급진적이기까지 한 어떤 의견을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그렇게만 넘겨짚는다면, 당장은 혹 참신한 발상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이내 “지겨운 충고”의 목록 속에 처박히고 말 것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책 속의 글자들을 넘어서 책을 읽고 난 뒤의 삶까지로 연결될 때에만 진정한 가치가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 담론, 심지어 급진적인 성 담론에 대한 관념 유희에 만족하고 싶은 자, 이 책을 덮으라!

그리고 나아가 혹시나 이 책에서 여성들의 ‘은밀한’ 성을 엿볼 수 있을까 침을 꼴깍 삼키며 기웃거리는 남성들에게도 차분하지만 준엄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려고 상대가 자세를 잡으면, 귀 기울여 듣든가. 탐구적인 자세로 겸손하게 물어오든가 해야지”!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당신에게 ‘말을 거는’ 책이지, 당신의 값싼 호기심에 부응하여 ‘고자질’을 해 주는 책이 아니다. 이 발랄하지만 진지한 ‘말걸기’에 당신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책을 덮고 난 뒤의 당신의 삶에로 열려 있다.

덕담만 늘어놓기 민망하니 옥에 티를 한두 가지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필자들이 ‘처녀막’을 ‘질막’으로 바꾸어 부르자는 제안을 할 정도의 뛰어난 정치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면, 아무리 이 책이 강력한 여성주의적 주장을 담은 ‘정치 선전물’이 아니라 해도, ‘폐경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도 ‘완경기’라는 대체 용어에 대한 아무 부언이 없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무신경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산부인과’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를 토로하는 대목에서라면 ‘여성의학과’로의 개칭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꾀하자는 주장 한 자락쯤은 넌지시 던져 두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피임에 대한 알차고 실용적인 정보가 풍성하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 중의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지만, ‘사후 피임’이라는 통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한 것이나 “질외 사정은 결코 피임 방법이 아님”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은 것도 눈에 걸린다.

끝으로 ‘즐거운 딸들’을 강력하게 가로막고 있는 정부 당국에 간절하게 필자들의 호소를 다시 한 번 전한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사회에 민폐 안 끼치고 열심히 살아왔으나 결국 고독한 섹스리스 독신 여성이 된 이 여자들의 눈물을 누가 닦아줄 것인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겠다는 의사는 추호도 없고, 제 몸을 가지고 소소하게 놀아보겠다는 시도조차도 검열하고 금지하는 이 사회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대한민국에 바이브레이터를 허하란 말이다!
발표지면 <즐거운 딸들> 해설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이연희 지은숙, <즐거운 딸들>, 영언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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