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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야인시대>, 남근적 욕망 혹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
작성자 똥개

역사 왜곡이니 뭐니 하는 뻔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 의식을 지레 걱정하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없다. 이미 이렇게 남성 호르몬이 흘러넘치다 못해 범벅을 해서 떡을 친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촌스러운 미감을 가진 이들이 이런 유의 드라마를 전혀 안 본다고 해서 제대로 돼먹은 ‘역사 의식’을 가질 거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어차피 역사란 ‘남성의 서사’(his story!)이기도 하거니와,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한다”는 그야말로 계몽적인 ‘역사 의식’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들은 차라리 ‘남자답게’ 화끈하게 살다 화끈하게 죽는 모습의 ‘아름다움’만을 볼 테니까. 오히려 그런 아주 독특한 미감을 가진 이들이 이런 드라마를 줄기차게 보면서 대리 충족이라도 하지 않았을 때, 이런 드라마를 침을 질질 흘리며 즐겨 보도록 이끌고 있는 그들의 ‘욕망’이 현실에서 어떤 왜곡된 모습으로 현상할지 차라리 그것을 상상하는 편이 훨씬 더 끔찍하다.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어차피 허구에 지나지 않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배경 설정이나 등장 인물들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느냐 따위가 아니라 그것이 설령 말짱 거짓말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전혀 반감하지 않을 그 ‘재미’(또는 그런 재미를 추구하는 ‘욕망’)의 정체다. 도대체 시커먼 ‘어깨’들이 ‘후까시’ 잔뜩 잡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걸 보면서 혐오감이나 불쾌감이 들거나 또는 정반대로 그 우스꽝스러움에 비웃음이 새나오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여기는 그 감성이 나로서는 좀체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려나 아무리 촌스러워도 ‘취향’은 어디까지나 취향인즉 남의 취향을 놓고 이해가 가네 안 가네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런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영화 <친구>에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선사하다 못해 숱한 아류들로 충무로에 ‘조폭 신드롬’을 몰아치게 하더니, 급기야 시청율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공중파 방송에까지 버젓이 진출해서 장수만세하고 있을 만큼이나 수두룩뻑적하다는 데 있다. 사태가 이러하니 천지가 진동하는 ‘대~한민국’의 환호에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극심한 공포의 전율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그저 타인의 취향일 뿐이라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오해하지 말지니, 나는 <야인시대>를 즐겨 시청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을 도마 위에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당신들 개개인의 취향을 얼마든지 존중한다. 그것도 취향이랍시고 실제로 어깨에 힘주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사람을 패고 겁주는 것보다야 그런 광경이 나오는 드라마나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하고 있는 게 차라리 낫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독특한 취향의 사회적 연원과 심지어 결코 ‘소수’가 아닌 그들이 자신들의 취향을 이리도 요란하게 사회적으로 시위하고 있는 꼴사나운 풍경의 문화적 기저쯤은 꼭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왜 하필 김두한이냐는 질문(이 질문에는 일제 때는 한낱 건달패 두목에 불과한 별볼일 없는 인물인데다가 심지어 해방 이후에는 좌익들에 대한 극악한 테러에 앞장선 ‘정치 깡패’로 돌변하여 온갖 패악을 저지른 인물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은 이 대목에서 어리석다. 에스에프가 미래 사회를 ‘상상’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불안을 미래에 투영한 것이듯, 역사물 역시 과거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과거의 사건에 투영한 것일 뿐이라는 상식을 새삼스럽게 다시 들춰내야 하는가. 소위 ‘역사 왜곡’은 시청율에 목매고 있는 서울방송이나 ‘선 굵은 남성 드라마’에 안달난 작가 이환경이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고작 그런 이력을 가진 인물상을 무덤에서 불러내고야 마는 이 시대의 대중들이 이미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박정희를 무덤 속에서 불러내고 있는 그들이 아닌가. 박정희가 장사한 지 20년 만에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판국에 이미 3편까지 제작되어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영화의 주인공인 김두한쯤을 불러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차라리 이인화의 <인간의 길>이나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드라마화되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 아닌가.(혹시 멍청한 방송 기획자가 이 글을 읽고 정말 그렇게 할까봐 겁난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물인 김두한을 미화하려 한다는 지적은 사태의 표피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너절한(그가 저질렀던 정치 테러들의 실상을 마주하자면 ‘너절하다’는 말조차도 너무나 완곡한 표현이다) 이력을 가진 인물‘이어야만’(!) 미화될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이른바 ‘맞장’으로 상징되는 원초적인 힘에 대한 숭배의 이면에는, 순수한 물리력 말고는 다른 아무런 ‘폭력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실은 그렇게 믿고 싶은) 소시민들의 열패감이 도사리고 있다. ‘사회적 분노’가 그 어떤 사회적 방법으로도 조직되지 않는(또는 조직될 수 없는) 사회에서, 일상은 늘 불만스럽지만 그걸 사회적으로 표현할 방법은 없다. 예컨대 직장의 ‘상사’에게는 함부로 대들 수 없어도 그 ‘관계’만 아니라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고 과도한 자신감(?)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언제나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개인은, 차라리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 설 때 그나마 ‘댓거리라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야 설령 깨지더라도 비로소 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먹’에 대한 과신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물리력’만이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혹여 ‘물리력’이 모자라 밀리더라도 ‘남’을 탓할 수가 없게 된다. 그게 바로 <야인시대>에 열광하는 대중들이 ‘꿈꾸는’ 사회이다. 어느 오락 프로그램에서 벌써 몇 년째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도 않는 눈요깃거리 게임에 거창하게도 내걸고 있는 카피마냥 “최선을 다해 싸우고 결과에 승복하는” 이 ‘맞장’의 법칙은 <야인시대>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묘사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요컨대 ‘정글’만도 못한 ‘협잡’이 판을 치는 사회보다는 차라리 ‘정직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이 낫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주 정직한(?) 물리력의 최고 조직 형태라 할 수 있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른바 ‘국가와 민족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이 당파싸움에나 골몰하는 정치 모리배’들을 싹쓸이해 버린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없었던 대중들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꽤나 이름 있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로부터조차도 기대를 모았으며(반대로 미국은 바로 이 점에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후에도 ‘논두렁’과 ‘막걸리’로 상징되는 ‘서민적 이미지’를 정치적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아이러니칼하게도 이번 대톨령 선거판에서 이 지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선점하면서 적어도 집단 무의식의 층위에서 ‘박정희 망령’의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은 의식적 층위에서는 명백하게 정치적으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노무현 후보이다.)

<야인시대>의 김두한도 그렇거니와 건달들이란 ‘나와바리’의 상인들로부터 받는 세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드라마 안에서 종로의 상인들이 마치 김두한에게는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는 듯이 묘사되고 있지만, 실은 장사 곱게 하고 싶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내놔야 하는 게 그 세계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정직하게 대답해 보자. 당신은 뭐 빠져라 장사해서 번 돈으로 세금을 내는 편에 속하고 싶은가, 아니면 ‘주먹’ 하나를 무기로 세금을 받는 편에 속하고 싶은가. 적어도 세금을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이 세계의 법칙을 현실로 인정하는 한 대답은 자명하다. 이것이 바로 ‘건달’ 영화/드라마에 환장을 하고 있는 대중 심리의 핵심일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안에서조차 '세금‘이라는 명시적인 명칭으로 묘사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비단 건달패의 존재 방식만이 아니라 심각하게 말하자면 ‘국가 권력’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명징하다. 미처 스스로에게 ‘의식’되기도 전에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제약으로 좌절되어 버린 소시민들의 ‘권력’을 향한 욕망이, 자신들을 배제한 채 그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정직하게(!) 선망하는 (혐오 내지 적대의 대상을 선망해야 하는 양가적 갈등으로 인한) 곤혹을 마주하기보다는, 그 대신 그 존재 방식에 있어 ‘국가 권력’을 그대로 모사했을 뿐인 ‘건달’에 대한 열광으로 왜곡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드라마 안에서 김두한이 ‘독립 투사’ 비슷하게 묘사된다고 해서 역사 왜곡이라고 타박할 일이 결코 아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하물며 ‘조선총독부’의 권력을 드러내놓고 선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차라리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면 <야인시대>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사회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건강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공정한 분점,’ 그것뿐이 아닌가. 설령 그것이 사회주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상’일 뿐이라 할지라도, 기실 대중들이 원하는 권력 분점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돈 없고 빽 없고 배운 것 없다고 결코 무시당하지도 않고 꿀릴 것도 없는, ‘정글’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에 대한 실낱만한 기대라도 있다면, 원초적 물리력이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을 차라리 정직하게 여길 넋 나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게다가 이것은 단기적인, 지금 당장 눈앞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일 뿐이다. 오죽하면 ‘어깨’들이나 선망하는 것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할 수밖에 없는 ‘권력’을 향한 그 끝없는 ‘남근적 욕망’ 그 자체가 해체되고 역사가 ‘남성의 이야기’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즉 ‘국가 권력’의 존재 방식을 불가피하게 현실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이 타파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지난한 ‘정치적 상상력 계발’의 과정이 필요하겠는가!

발표지면 컬티즌, 2002.10.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대상 야인시대,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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