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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죽은 어른들의 사회’에 부치는 계몽의 전언
작성자 똥개

몇 해 전부터 ‘키덜트(kidult)’라는 신조어가 대중매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아이(kid)와 어른(adult)이 조합된 키덜트는 흔히 정서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아이와 같은 취향이나 기호에 탐닉하는 어른들을 가리키는 말쯤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다 큰 어른’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의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진로지도를 해왔던 경험에 근거하여, 그것이 단지 정서나 취향 또는 기호, 나아가 소비성향에 국한시켜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문제라 여긴다. 교육 수준으로만 보자면 ‘배울 만큼 배운’ 이들이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자신의 독립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의 ‘어른’을 마주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현상 자체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단지 ‘어른스러움’에 대해 강의를 할 뿐인데도 분위기가 눈에 띄게 무거워지면서 어느 수강생의 표현을 빌자면 ‘도 닦는 분위기’가 되기 일쑤라는 점이다. 요컨대 받아들이는 처지에서만 보자면, ‘어른이 된다는 것’이 마치 ‘보통사람들로서는 좀체 도달하기 어려운 대단히 훌륭한 인격자의 경지’라도 되는 양 여기더라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의 저자 김어준에 따르면, 이것은 당연하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 기본 태도에 관한 입장이어야 한다. 우린 그런 거 안 배운다.” 이것은 비단 공교육의 부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 게다. 근대적 교육 제도가 성립된 이래 적어도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과정을 적절한 방법으로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공교육이 부실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유독 이즈음에야 ‘키덜트’가 새삼스러운 이야깃거리가 될 까닭은 못 된다. 다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무한 경쟁이 전면화되기 이전까지는, 그런 것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누가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그저 주변의 ‘어른’들과 접촉하면서 일종의 문화적 습득으로서 스스로 깨쳤을 것이다. 따라서 “우린 그런 거 안 배운다. 대신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다는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된다.”라는 저자의 지적은, 우리 사회의 아이들이 성장기에 접촉하는 대다수의 ‘어른’들이 그러한 문화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준엄하게도 그 ‘어른’들 또한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닌 ‘키덜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처연한 사실을 웅변한다. ‘키덜트’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종의 돌연변이가 아니라 오로지 ‘어른’이 사라진 ‘키덜트’ 사회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물론 ‘압축적 근대화’를 겪은 우리 사회에서 ‘성공은 곧 돈’이라고 대부분의 ‘어른’들이 입을 모아 가르치지 않은 적도 없었다. 하물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건 논리 이전에 삶의 경험 속에서 사무치게 각인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이었다. 60년 전에도, 4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어차피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 소수의 몫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으로만 거슬러올라가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쯤 귀기울일 가치는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근대적 자의식(김어준 식으로 표현하면, ‘자기객관화’)이 내면화되지 못한 ‘키덜트’일망정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어른’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나 이제나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공교육의 현장에서도 “학교에서 우등생이 사회에서 우등생은 아니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은 얼마간 사실이기도 했다. 더러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들켜버린 민망함을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라”고 짐짓 달래던 어른들도 적지 않았다. 실상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른스럽지 못한 ‘키덜트’였음에도 불구하고, 허위의식일망정 ‘어른’으로서의 품위는 잃지 않으려 했고 특히나 후속 세대에게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서라도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했다.

김어준이 지적하듯 “해결방법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난생 처음 겪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각자 타고난 본연의 문제해결능력이 그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저자는 이것을 개인의 경우에 한정하여 말했지만, 내 생각엔 사회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직업의 ‘귀천’을 막론하고 가장 왕성한 경제 활동을 펼치며 사회의 중추를 담당했던 40대까지도 졸지에 ‘사오정’의 불안에 직면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앙상한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다. 자신의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에 대한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사라졌고, 어른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은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심지어 식자 든 자들까지 나서서 그것을 시대착오적인 ‘계몽의 폭력’이라 매도하기 바빴다. 그리하여 이 사회는 늙은 ‘키덜트’들이 젊은 ‘키덜트’들에게 도무지 ‘어른스럽지 못한’ 생떼나 쓰는 것을 ‘어른(부모, 선생, 선배) 노릇’이라고 착각하는 ‘죽은 어른들의 사회’로 치닫고 말았다.

이 징후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즈음의 드라마 트랜드들이다. 우선 <베토벤 바이러스>나 <파스타>처럼 ‘멘토십’을 소재로 하는 성장 드라마들이 젊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자신을 ‘어른들의 세계’로 이끌어줄 역할 모델에 대한 갈증을 반영한다. 이와 함께 지적해야 할 것은 가족 드라마들의 세대간 갈등 구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부모 세대는 자식 세대에게 “네가 어려서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는 ‘보수적/현실주의적’ 가치관을 시위하며 입발린 소리일망정 “다 네 행복을 위해서”라고 타일렀다. 물론 자식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다른 ‘대안적’ 가치관을 내세워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내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맞섰다.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가치관 갈등, 이념 갈등을 표상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이 갈등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부모 세대는 노골적으로 “이만큼 키운 게 누군데 너만 행복하면 다냐”고 떼를 쓰고, 자식 세대는 또 그들대로 마치 갖고 싶은 장난감 사달라는 듯이 떼를 쓰는 식의 갈등이 대세다. 이것은 그 드라마의 시청자들이 무의식 속에서나마 스스로를 포함하여 도통 ‘어른’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일상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는 방증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정면돌파 인생 매뉴얼’이라는 부제만을 보고 그저 제 앞가림이 벅찬 사회초년생들에게 일상의 소소한 고민거리를 상담해주는 내용으로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나는 이 책이 ‘도 닦는 분위기’가 되기 일쑤인 내 강의의 핵심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 땅에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어디에서도 따로 배울 길 없는’ 어른이 되는 길을 알려주는 매우 유용한 ‘교과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강제로’라도 읽혀야겠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이나 반가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계몽적’으로 보이지 않는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불친절한” 말투를 구사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은 그 자체로 매우 ‘계몽’적이다. 이 책이 설파하고 있는 ‘어른스러움’의 정체란 기실 ‘계몽된 자의식’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김어준이라는 우리 사회에서 보기드문 ‘근대인’이 철저하게 ‘근대정신’에 기반하여 다름아닌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위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바로 ‘어른’이라고 말할 때, 정작 이 책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이제 막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1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이들만이 아니다. 그들에게 어른 구실을 전혀 못하고 있는 40~50대의 기성세대들에게야말로 훨씬 더 이 책이 필요하다. 물론 “제발 젊은이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너나 잘하세요!”다.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는 세대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이 복원된다면, 그래서 후속 세대들도 일상 주변에서 최소한 ‘어른’은 못 되더라도 ‘어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쉽사리 접촉할 수 있다면, ‘정면돌파 인생 매뉴얼’ 따위를 따로 구해서 읽을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발표지면 <20대, 한국사회의 최전선>, 북바이북, 2011.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김어준, <건투를 빈다>, 푸룬숲,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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