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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여성은 '남장'을 해도 그저 여성일 뿐?
작성자 똥개

아무리 생각해도 ‘소재’를 중심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무릇 기호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으니, 외견상 똑같은 소재가 동원되었다 해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일 터이다. 예컨대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고은찬(윤은혜)이 취직을 위해 성별을 감추고 남자인 척한 것은 일견 10여 년 전의 영화 <가슴달린 남자>에서 김혜선(박선영)이 남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물론 <가슴달린 남자> 역시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이 영화의 초점은 너무나도 성차별적인 고용 환경과 주인공의 사회적 성취 욕구 사이의 갈등에 놓여 있다. 다만 주제가 지나치게 진지한 나머지 그것을 우회하기 위해 ‘로맨틱 코미디’의 장치를 차용했던 것뿐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성싶다. 반면에 <커피프린스 1호점>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애 관계’를 둘러싼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빚어내는 갈등에 초점을 둔 드라마라는 것은 굳이 꼬집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바람의 화원>에 이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성별 위계가 지금보다 훨씬 견고했던 조선 시대로 시간적 배경을 옮겨놓은 <바람의 화원>은 적어도 <커피프린스 1호점>보다는 <가슴달린 남자>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적어도 드라마 속의 신윤복(문근영)에게는 “왜 자신이 여성이어서는 곤란하고 남성이어야만(남자로 꾸며야만) 하는지”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이 고은찬에게서보다 더 결여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이 드라마의 초점은 김홍도(박신양)와 신윤복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들은 모두 그것을 부각하기 위한 보조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금의 거의 대부분의 영상적 서사물, 특히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모조리 ‘로맨스 판타지’들이다. 오죽하면 ‘전문직 드라마’를 요란하게 표방한 몇몇 드라마들을 놓고도, 한국에서 메디컬 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얘기’이고, 법조 드라마는 ‘법정 주변에서 연애하는 얘기’이며, 음악 드라마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애하는 얘기’일 뿐이라고 할까. 방송 제작의 세계를 다루겠다는 드라마도 결국 ‘방송사에서 연애하는 얘기’였고, 심지어 사극조차도 ‘조선시대에 연애하는 얘기’일 뿐이다. (그나마 공전의 히트를 친 <하얀 거탑>은 ‘연애하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메디컬 드라마는 아니었으니, 아마도 전통적인 사극들이 그러하뜻 고작해야 ‘병원에서 정치하는 얘기’쯤이었을까.) 그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어떻든 천편일률적인 ‘쌍팔년도 스타일’의 ‘연애 얘기’에서 벗어나 소재나 배경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다원화를 반영하는 것일 테니까. 다만 모든 드라마(대중적 서사)에는 대중의 욕망이 투영되게 마련이라는 대전제를 환기하려는 것뿐이다.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면 도무지 장사가 안 되는 희한한 풍경을 통해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대중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좀더 명료하게 해명하지 않고서는, 윤은혜와 문근영(또는 <미인도>의 김민선)으로 하여금 ‘남장’을 하게 한 대중의 욕망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드라마가 아니라 그 드라마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 자신의 욕망이다.

사실 ‘로맨스 판타지’가 소비되는 사회문화적 배경은 복잡한 분석이 필요없을 만큼 명징하다. 무슨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무슨 심오한 극적 장치를 배치하건 간에 결국 ‘연애하는 얘기’일 수밖에 없는 드라마들의 주요 시청자는 ‘여성’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청자들은 여주인공이 드라마 속에서 처한 상황과 그에 수반되는 감정선의 변화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욕망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남성 중심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욕망, 다시 말해 여성들이 그런 욕망을 가기기를 바라는 남성들의 욕망이기도 하다는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잘난 여자건 그렇지 않건, 부자건 가난하건, 성격이 부드럽건 까칠하건, 직업이 무엇이고 어떤 성취 동기를 가지고 있건, 그와 전혀 무관하게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과의 그럴듯한 로맨스를 꿈꿔야 하고 드라마라는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야 한다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고은찬이나 신윤복이 적어도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인 이상, 이들이 드라마 속에서 ‘남장’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설령 그들의 삶의 목표가 결코 ‘한 남성과의 연애’에만 있지 않고 ‘바리스타’나 ‘화원’으로서의 성취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해도 그 사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로맨스’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그 모든 ‘개성’들을 통째로 빨아들여 ‘여성’으로 구조화해 버리고 마는 ‘블랙홀’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들이 ‘남장’이라는 설정을 통해 말하는 바는 ‘심지어 남장을 통해 성별적 정체성을 감춘 여성도 그저 여성일 뿐’이라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로망스>나 <건빵선생과 별사탕>을 통해 ‘선생님’조차도 기어코 ‘여성’으로 환원시키고야 말았던 것과 한 치도 다름없는,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시도하는 남근적 욕망의 발현인 것이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더이상 신기한 일이 아닌 사회에서,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성을 (잠재적인) 연애 상대로 여겨서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여전히 직장 내 성희롱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남성의 입장에서는 동료(나 거래 관계의 파트너)가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그를 ‘여성’으로 의식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렇게 구축된 일상의 관계망들이 남녀 모두에게 평등하지는 않다. 세상의 질서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고, 따라서 남성은 여전히 그저 ‘남성’인 것으로 족하지만 여성은 더이상 ‘여성’이 아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제발 여자로 보지 말고 그저 사람으로, 동료로 여겨 달라.”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요구, 이것이 바로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성별적 정체성을 감추는 ‘남장’이라는 기호의 함의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남장 여자’의 상대 짝인 ‘여장 남자’가 적어도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대중적 서사에 좀체로 등장하는 일이 없으며 간혹 있더라도 주요한 갈등 축이 아닌 주변적 장치나 사소한 에피소드에 머무를 뿐이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이준기가 ‘여장’을 해서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공길이 ‘로맨스’의 주인공은 아니었으며(즉 공길의 ‘여장’과 신윤복의 ‘남장’이 대중 사회에서 소비되는 양상이 전혀 다르며), 해피엔드로 마무리되는 ‘로맨틱 코미디’임에 분명한 <찜>에서조차 준혁(안재욱)이 ‘여장’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구애’의 한 방편이었을 뿐 주인공의 내면에서 성별적 정체성에 관한 어떤 긴장도 매개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짜증나는 ‘스토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성들의 ‘구애’ 행태가 버젓이 ‘열렬한 사랑의 표현’으로 둔갑해 버리는 드라마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여장’을 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려는 시도가 뭐 그리 대단한 얘깃거리나 되겠는가.

따라서 고은찬에게 “네가 외계인이건 남자건 상관없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최한결(공유)의 인상적인 대사는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네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내게는 ‘사랑의 대상’인 여성으로밖에 안 보여!” 이 대사가 로맨틱하게 들렸다면(즉 누군가가 내게도 그렇게 열렬히 고백해주기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남성 중심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고는 있지만, 아무리 내가 꽁꽁 감춰도 그 ‘포장’ 속에 숨겨진 나의 ‘여성성’을 알아채고 나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 다름아니다. 물론 본질적으로 그것은 ‘여성들이란 그렇게 사실은 들키고 싶어한다’고 한사코 믿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이다.

작금의 ‘남장 트랜드’에서 성별적 질서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는 조짐을 읽으려는 시도는 그래서 순진하고 어리석다. 차라리 김홍도와 신윤복 사이에, 고은찬과 최한결 사이에 아무런 ‘성(별)적 긴장’이 없다면,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더이상 ‘로맨스 판타지’일 수 없다면, 그리고 드라마를 그 따위(?)로 만들어도 얼마든지 그 나름의 소구력을 가지고 소비될 수 있다면, 혹시 조심스럽게나마 그런 분석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성애적인 긴장이 넘쳐나는 가운데 ‘감추고 싶으면서도 들키고 싶은’ 양가적 욕망이 갈등의 가장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드라마에서라면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외게인이건 남자건”이라는 대사를 통해 남녀 사이의 성(별)적 긴장에 기초한 ‘이성애’를 넘어서는 전망을 발견하려는 시도 또한 어설프기 짝이 없다.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은 물라도 시청자들은 상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고, 겉보기에(실은 상대의 성별적 정체성을 까맣게 모르는 남자 주인공의 시선에) 남성과 남성 사이에 빚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닭살스러운’ 에피소드들은 그 두 사람이 이성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드라마 속에서 언젠가 그 사실이 드러나리라고) 전제해야만 극적으로 의미가 있는, 철저하게 이성애자의 시선에 기반한 ‘로맨스’일 뿐이다.

이 점은, 왜 굳이 ‘역사 왜곡’이라는 생뚱맞기 짝이 없는 문제 제기를 무릅쓰면서까지 신윤복을 ‘여성’으로 설정해야 했는지, 왜 신윤복이 지금까지의 통념대로 ‘남성’이어서는 김홍도와 신윤복 사이에 흐르는 ‘야릇한 감정선’을 갈등의 주축으로 삼는 그 스토리를 결코 고스란히 살려낼 수 없는지를 되짚어 살피면 자명해진다. 또는 가령 시청자들이 뻔히 ‘여성’임을 알고 있는 윤은혜가 아니라,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인 연기자가 ‘신비주의 마케팅’을 통해 성별조차도 베일 속에 묻어둔 채(물론 드라마 속에서도 그의 성별이 드러나는 모든 배경들을 지워버린 채) 고은찬을 연기했어도 최한결이 안심하고(!) “네가 외계인이건 남자건”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지를 상상해 봐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이 대사는 외견상 ‘동성애’(의 가능성)에 대한 전향적인 긍정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과 정반대로 교묘하게 위장된 ‘호모 포비아(동성애 공포)’의 일면일 뿐이다.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가 철저하게 이성애에 기반한 남근적 욕망의 재현물일진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로맨스’라는 틀 안에서는 기존의 성별적 통념에서 벗어난 그 어떤 설정조차도 성별적 질서를 더욱 교묘하게 공고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로 환원되지 않는 인격과 인격 사이에 ‘로맨스’를 기대하는 욕망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도 그들을 주인공으로 충분히 드라마적인 긴장을 전개할 수 있을 때라야만 우리는 비로소 조금이라도 다른 가능성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 판타지’에 기반한 ‘러브라인’이 빠져버린 드라마를 도대체 누가 재미있어 할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밍밍한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과 상상력이 이미 ‘로맨스’를 매개로 한 성별적 질서에 철저하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

발표지면 함께가는 여성, 2008.11.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커피프린스 1호점, MBC; 바람의 화원,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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