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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작성자 똥개

분단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면면한 계보에 포함시켜도 될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만일 주인공 선호와 연화의 엇갈림이 '분단된 이 땅의 현실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식으로 모든 문제의 근원을 '분단'으로 환원시키는 데서 그치고 만다면, 나는 단연코 위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내놓겠다. <국경의 남쪽>은, <웰컴 투 동막골>이 그렇듯이 '분단'이라는 소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영화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웰컴 투 동막골>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던 남북 군인들의 '화해'만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복잡한 삶의 구체성에 비추어 너무나 얄팍한 이해일 따름이다. 문제는 '화해'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이다. '외세'에 함께 맞서기 위해서라는 대답도 궁색하긴 매한가지다. 동막골에 폭격을 하려는 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남 또는 북 어느 일방이었다고 해서 그 동막골을 지키려는 패잔병들의 연합 작전이 불가능했을까. 또는 그 연합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스미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전쟁 또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투원'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미신을 옹호할 의사는 전혀 없지만, 설령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전투원'(민간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 부합해야만 한다는 의미까지를 읽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웰컴 투 동막골>은 과연 '분단'에 관한 영화로만 이해될 수 있을까? 좀더 오버를 하자면, 끊임없이 '어느 쪽'인가를 캐물으며 자기 편의 '전투원'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보호해야 할 민간인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해 버리는 데 어느샌가 익숙해져 버린 우리 시대의 초상을 향한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였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식의 조악한 '적아(敵我) 이분법', 정작 왜 싸우는지도 잊어버린 채 싸움 자체에만 매몰되어 '비전투원'의 존재를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 강퍅함이, 심지어 '개혁'이니 '진보'니를 떠드는 이들에게까지 팽배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추궁해 들어가자면, 다시 '분단'이라는 벽을 만날 수밖에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인상적인 대사처럼 "세상에는 빨갱이와 빨갱이의 적이 있을 뿐, 중립은 없다."라는 윽박지름에 반세기를 길들여졌던 탓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지평에서 '분단'의 문제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예컨대 남과 북이라는 현실적 적대 세력 사이의 '화해'라는 주제와는 거리가 사못 멀어진다. 오히려 그보다는 '분단'으로 인해 초래된 획일적이고 자기 순환적인 사회가 어떻게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삶들 사이에서 적군이나 아군이 아닌 다양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찬찬히 배워 나갈 것인가라는 '우리 안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렇다면, 기실 그러한 성찰의 단초를 마련해 주는, 다시 말해 '다름'으로 인해 극심한 배제와 차별, 편견과 불이익에 직면해 있는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 주는 모든 영화는 '분단'에 관한(좀더 정확히는 '탈분단'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국경의 남쪽>을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터이다. 선호나 연화가 굳이 북한 출신이 아니라 다른 동남아시아 출신이었다 해도, 영화의 성격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선호와 연화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나면, 가령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점에서 '어린애'와 다름없는 선호(들)의 등을 치려고 눈을 번득이는 사기꾼들이 득시글거리고(사기꾼들에게는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 미처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신참 이주민들이다), 교향악단에서 호른을 연주하던 '전문 기능'을 가지고도 그것을 활용할 기회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술집 삐끼에서부터 오토바이 배달까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해 봤자 역시 '전공'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식당 경영일 수밖에 없으며(하물며 변변한 기술조차 없는 이주민들의 처지는 말해 무엇하랴), 목숨을 걸고 찾아온 엣 연인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하필 '담당 형사와 눈이 맞을' 수밖에 없을 만큼('하고 많은 사람 다 놔두고'라고 덧붙일 계제조차 아닌, '하고 많은 사람'과 눈이 맞을 기회조차 없었을) 피폐할 것으로 충분히 짐작되는 연화의 삶……, 이런 문제들은 관객의 가시권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 어느 사회보다 이주민에게 배타적인 한국 사회를 성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못한다면, 이 영화가 도대체 '분단' 또는 나아가 '탈분단'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이주민이 토박이들과 말 그대로 똑같이 대우받는 사회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토박이들을 폭력적으로 내쫓은 자리에 이민자들의 손으로 세웠다는 미국 사회에서조차 앵글로섹슨계가 아닌 이주민들이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사람조차도 낯선 땅에서 수퍼마켓 종업원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재미 교포들의 눈물 겨운 이민사도 있고 보면, <국경의 남쪽>에서 선호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것쯤은 지구 위 어디에서나 이주민이라면 감수해야 하는 핸디캡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그뿐일까. 이렇게 되물어보자. 표면상으로는 여느 '토박이'들의 가정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도록 설정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정착'에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선호의 표정에 쓸쓸함이 스쳐가는 것은 단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기만 할까. 그런 '애닲은 비련'의 사연만 없었다면(어차피 청춘 남녀를 둘러싼 '운명의 장난'을 유독 이주민들만 독하게 경험해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선호는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혹시나 문제가 있다 해도, 토박이들이라고 해서 별다를 리 없는 종류의 문제들만 남은) 평범한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된 것일까. 아니 좀더 노골적으로 도대체 이주민이 한국 사회에 '정착'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주민이 자신의 성장 과정을 지배해 온 문화적 정체성을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 중의 하나로서 한국 사회에 '정착'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딱히 이주민이 아니라 해도,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이 '차별'의 표지로 작동하는, 또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개성이 존중되는' 것은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계층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일 뿐이며 그러다 보니 그만한 배경도 가지지 못한 처지에서 공연히 '개성'을 드러내면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한다"는 경원에 직면하게 마련인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한 남들과 '다른' 점은 감추고 억압하도록 길들여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이 과정을 삶의 방식으로 내면화하지 않는 한, 하물며 이주민은 그저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이질적이고 예외적인 존재일 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지지 못할 것이 뻔하다.


비유하자면, 김선호가 이연화와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것을 가슴아파하는 한 그는 그의 '단란한 가족'에 온전히 섞일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지만, 반대로 그것을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전생'의 일쯤으로 덤덤히 여길 수 있다 해도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질감을 잃어버린 허깨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연화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딱히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낸 '탈북자'여서가 아니라, 하필 이주민에게 악랄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한국 사회에 뛰어든 이주민이며 하필 사회적 소수자에게 고유의 정체성을 포기하든가 왕따를 감수하든가 극단적인 양자택일만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 내던져진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쓸쓸함이고 황폐함이다.


단지 '분단'의 견고한 장벽을 유지하는 남과 북의 정권(또는 '외세')만이 이 비극의 주범인가. 이주민이 존재하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형성되게 마련인 독특한 이주민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기 무척 어려운(어렵사리 형성되는 커뮤니티는 어김없이 게토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폐쇄적인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김선호 동무''의 삶을 쓸쓸하게 몰아가는 공범인 것이나 아닐까.

발표지면 월간 비정규노동, 2006.7.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국경의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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