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가입에는 이메일 주소 외에 어떤 신상 정보도 필요하지 앟습니다.
똥개네집 통합검색
편집자 광장
책마을 소식
진로 상담
출판실무 Q&A
예비편집자 공부방
강의실
참고자료
비평적 산문
출판칼럼
매체 비평
인물론 & 인터뷰
사적 진술
주목을 바라는 글
저작목록
똥개와 수다떨기
일상 속 단상
퍼온글 모음
노출광의 일기
똥개를 소개합니다
똥개의 즐겨찾기

  매체 비평  Media rewview & preview
책, 영화,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 대한 장르비평을 올려두겠습니다.
이 게시판의 게시물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으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단, 영리/비영리 목적을 막론하고 고형물(인쇄물, CD 등)의 형태로 복제하여 배포하려면 운영자의 사전 승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책] 말하는 척 외면하기, 침묵하는 척 웅변하기
작성자 똥개

동성애라는 화두가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의미 있게 언급되기 시작한 뒤로 벌써 강산이 한 번은 바뀌었다. 그 세월 동안, 나름대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마치 자신의 '진보적 의식'의 표지이기라도 한 양,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동성애에 대한 오래된 터부를 공박할 줄 알게 되었다. 또는 특별히 거창한 사회 의식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더라도, "그건 그저 개인의 취향 아닌가요?"라고 깜찍하게 대꾸할 줄 아는 '쿨한' 젊은이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어쩌면 이제 그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구태의연한 태도가 '촌스러운 짓'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어쩌면 다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원주의' 만세!??

천만에! 착각하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의 인권 현실은 10년 전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중이다. 아직도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아우팅'의 공포 속에서 숨죽이고 있으며,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이 척박한 현실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불과 3년 전의 일이지만,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는 물론 소비자본주의의 총아인 상업 광고에까지 당당하게 출몰하는 '동성애 코드'를 무슨 절묘한 해학의 장치쯤으로 기꺼이 수용하는 대중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한 무심한 표정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동성애자'는 대다수의 이성애자들에게 여전히 그 존재를 애써 지워야 할 만큼이나 불편한 존재이지만, '담론'으로서의 '동성애'는 이제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편하게 웃고 떠들고 즐길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소재'이며, 심지어 진보적 사회 의식이나 쿨한 태도를 내보일 수 있는 '고급스러운' 화제일 뿐이다. 이 참혹한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아니 이토록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이 지면이 내게 할애된 취지와는 어쩌면 정반대의 엉뚱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아니 틀림없이 그러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동성애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기가 싫다. 아니 말하지 않겠다. 동성애자들의 실존적 현실은 요지부동인데, 담론만 끝간 데 없이 '쿨'해지고 있는 이 기묘한 풍경은, 동성애에 '관해' 말하기가 빠져든 치명적인 함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동성애에 '관해' 말하는 사람을(또는 텍스트를), 적어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가령,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를 석권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과 그 원작 소설이 표제작으로 수록된 애니 프루의 단편집 <브로크백 마운틴>(미디어2.0)이 동성애에 관한 텍스트인가? 또는 2003년 4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사무실에서 자살한 고 육우당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이경화의 <나>(바람의아이들)가 동성애에 관한 책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에 수록된 단편들은 와이오밍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삶의 양상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표제작은 그 중의 한 편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어떤 '와이오밍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한 청년의 치열한 성장 과정을 담아낸 <나>가 가령 <전태일 평전>과 달리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 생활 속에서 제시되는 교리 때문에 실제로 적지않은 내면적 갈등을 경험해야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 동성애자들에게 한 줄기 빛을 던진 도미니끄 신부의 <성서 속의 동성애>(해울)는 그저 대중적 신학서이면 안 되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성애자의 존재에 침묵하는, '연애'라고 하면 그저 당연히 '이성애'를 뜻하게 마련인 숱한 텍스트들은, 과연 동성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든 텍스트들이 실은 동성애에 관해 '완강한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이성애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실은 동시에 동성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사람과 사람의 사랑'에 관해 말한다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관해서만 말해 버리고 마는 것은, 또는 거꾸로 고작해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관해 말해 놓고서 그것을 '이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동성애에 '관해'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동성애(또는 동성애자)를 '소재'로 삼았느냐를 가지고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라거나 아니라거나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니 '동성애를 다룬 책'이란 없다. 그것은 이성애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아니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텍스트가 '동성애를 다룬 책'이다. 물론 이성애자들의 편협하고 심지어 뻔뻔스럽도록 위선적인 관점에서!


물론 현실에서 극심한 억압과 배제, 차별 속에 고통받는 동성애자들이 존재하는 한, 더 힘있는 목소리로 동성애자를 비롯한 모든 성 소수자들의 삶을 말해야 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는 그런 노력 이면의 선의(善意)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라고 성 소수자에 '관해' 말하려 했던 노력의 결과가 무엇인가. 단 한 번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실은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너그러워질 수 있는, 아니 실은 마음놓고 너그러운 척할 수 있는, 이성애자들에게 일종의 '면죄부'가 되었을 뿐이다. 무릇 유사 이래로 사회적인 문제가 선의에 의해 해결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터넷 소개 페이지에 달린 네티즌 평의 한 구절, "동성애에는 여전히 반대하지만, 이 영화는 좀 다른 것 같아요."가 단적으로 웅변하듯이, 한국의 영화 관객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일종의 신화적 공간, 와이오밍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들은,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성이 거세된 인물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히 '감상'하고 심지어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라며 눈물을 흘힐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아니 굳이 낭만주의의 핵심적 장치인 '이국 정서'까지 들먹일 것도 없다. 바로 함께 발딛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분명한 {나}를 읽고도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저 "참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죠."라며 입빠르게 거드는 것으로 손을 털어 버리고는 자신의 견고한 일상 속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 버린다면, 엊그제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도 와이오밍보다 더 멀리 떨어진 우주의 어느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일어났을 법한) '신화'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선의에 넘치지만, 실은 가장 악랄한 '배제'의 정치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엄연한 현실의 실존을 신화적 공간으로 승천시켜 내쫓아 버리기!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아니 실은 다른 얘기일 것도 없지만), 예컨대 <전태일 평전>을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다는 젊은이가 '박정희 시대'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기존의 태도를 전혀 수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희한한 풍경이 빚어지는 것도 그래서이다. 자신의 현재적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역사적 사건' 또는 '허구적 재현'을 그저 감동적으로 감상하는 데서 그칠 때, '전태일'은 감동적이지만 현실의 수많은 전태일들은 여전히 '배부른 노동귀족들'이라는 욕설의 대상일 뿐이며, '육우당'은 눈물겹지만 현실의 수많은 육우당들은 여전히 '더러운 호모××들'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동성애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심지어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말하면 말할수록 동성애자의 삶은 점점 더 대상화·타자화되어 파편화되고, 우호적이면 우호적일수록 현실에서 내쫓겨 비가시화(非可視化)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또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비장애인이 자신의 '비장애'가 누리는 특권을 스스로 성찰하지 못할 때, 모든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저 시혜적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일 뿐이다. 이성애자가 자신의 '이성애'가 누리고 있는 사회적 특권을 스스로 성찰하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모든 텍스트에서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새 무임승차하고 있는 기득권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 불편해질 수 있다면, 그 모든 텍스트는 장애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소설도, 온통 이성애자들뿐인 영화도, 모두 장애에 '관한' 것이고 동성애에 '관한' 것이 된다.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타자와 관계를 맺고 타자의 삶이 자신에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는 첫 출발점이다. 아무도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는 '소수자 담론'이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실존은, 그 어떤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의 범주로도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다. 비장애인의 삶이 서로 다르듯 장애인의 삶도 당연히 서로 다르며, 이성애자들의 사랑이 서로 다르듯 동성애자의 사랑도 당연히 서로 다르다. 그런 점에서 한데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동성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라는 범주가 비장애인들이 만들어낸 허구이듯, 동성애라는 범주도 이성애자들의 시선이 투영된 허구인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표제작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다만 '어떤 동성애자들'의 삶, 그것의 지극히 작은 단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동성애에 '관해' 말하는 텍스트란 존재할 수 없다.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가진 개인의 삶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이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가진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신기하고 낯선 '대상'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삶이 내게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 되는 유일한 이유란, 그의 존재가 내 삶에 특별한 의미를 던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건 그저 개인의 취향 아닌가요?"라고 쉽게 말하지 말지니, 적어도 그것이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죠. 누군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내 삶에서 무슨 의미인가요? 관심 없어요."라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면, 당신은 동성애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며, 나아가 동성애에 '관해' 표면적 의미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장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등 뒤에서도, "소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상업 광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다. 동성애는 그저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고 믿는 쿨한 분들은 "세상 많이 좋아진"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지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호모 포비아'들도 현실에서는 득시글거리지만)은 물론 아니다. 과연 저 광고가 가령 (노골적인 성적 표현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시절이었다면 혹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성애를 연상시키는 '흔해 빠진' 묘사였다 해도 의도한 만큼의 '반전' 효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지금만큼 화제거리가 될 수 있었을까. 또는 설령 그렇다 해도, 과연 그 광고가 동원한 '동성애 코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의 서사적 장치로서 맘 편하게 즐겨도 될 만큼 우리 사회의 현실이 동성애자들의 삶에 충분히 개방적인가. 이 두 질문과 그에 대한 아무래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대답이 나를 몹시도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논지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다.

발표지면 기획회의, 2006.5.5.
단행본수록 출판생태계 살리기
대상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