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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가을소나기>에 관한 불온한 상상
작성자
똥개
한 남자(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남자)가 벌이는 '사랑의 줄다리기' 또는 두 여자(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남자(여자)의 갈등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때로 '진부하고 도식적인 삼각관계'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울궈먹어도 식상하지 않는 소재임에도 틀림없다. 문화방송의 <가을 소나기>의 이야기구조는 사실 지나치게 단순하다. 다른 아무런 복잡한 갈등 구조 없이 오로지 순수하게 전형적인 삼각관계에만 정공법으로 집중하고 있는 근래 보기 드문 정통 멜로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는 쉽게 눈길을 거두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전형적인 구성에서 볼 때는 틀림없이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인물 간에 실제적인 '경쟁'이나 '대립적 갈등'이 전혀 없다는 독특한 설정에 기인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물과 인물이 맞부딪치며 만들어내는 갈등이 아니라,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만나듯 사랑에 빠져버린 두 남녀의 내면적 갈등에 집중적으로 천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소나기'라는 상징적 표현이 웅변하듯 일종의 '사고'처럼 일어난 사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무슨 '초자연적인 힘'쯤으로 바라보는 낭만적 판타지의 문법에 전혀 유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비판조차 삼각관계라는 소재만큼이나 식상한 메뉴일 테니 일단 접어 두자. 그보다는 이 드라마를 함께 보던 이가 문득 내뱉은 "그냥 셋이서 같이 살면 안 되나?"라는 중얼거림에 뒤통수가 시큰해 오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그냥 셋이서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삼각관계는 더이상 갈등의 소재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두 라이벌은 어쩌면 남편(또는 애인)과의 관계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우정을 키워 왔던 친구 사이다. 물론 뜻하지 않은 삼각관계로 인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한다는 이야기 구조가 훨씬 더 일반적이겠지만, 또 그만큼 상투적이기도 하다. 삼각관계 아니라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정이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관계라는 것은 실은 궁색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자면 병석의 친구(아내)를 두고 친구의 남편(아내의 친구)과 '소나기'를 함께 맞는 것은 사회적으로 허용이 되는 일인가.
하기는 그래서 주인공들은 '죄책감'을 동반한 심적 갈등에 휩싸여 있는 것이겠지만, 그 죄책감의 근거는 다분히 순환 논리적이다. 애당초 그것을 '배반'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느낄 까닭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사랑에 대한, 우정에 대한 '배반'이라고만 생각하고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것일까. 혹시 그들은, 또는 이 드라마의 갈등 구조에 감정을 이입하는 우리들 모두가 '사랑'과 '소유'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