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가입에는 이메일 주소 외에 어떤 신상 정보도 필요하지 앟습니다.
똥개네집 통합검색
편집자 광장
책마을 소식
진로 상담
출판실무 Q&A
예비편집자 공부방
강의실
참고자료
비평적 산문
출판칼럼
매체 비평
인물론 & 인터뷰
사적 진술
주목을 바라는 글
저작목록
똥개와 수다떨기
일상 속 단상
퍼온글 모음
노출광의 일기
똥개를 소개합니다
똥개의 즐겨찾기

  매체 비평  Media rewview & preview
책, 영화,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 대한 장르비평을 올려두겠습니다.
이 게시판의 게시물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으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단, 영리/비영리 목적을 막론하고 고형물(인쇄물, CD 등)의 형태로 복제하여 배포하려면 운영자의 사전 승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책] '제 눈의 들보'를 보기 위하여
작성자 똥개
지난 2001년 여름, 이웃 나라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그네들 정부에 검정을 신청한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 문제로 온 나라가 벌집 쑤시듯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동네 구멍가게에 걸린 '일본 상품을 판매하지 않습니다'라는 고지문부터,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거의 반강제로 떠넘겨받은 그 이름도 쟁쟁한 단체들이 연명한 전단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분노와 항의의 물결 앞에서, 나는 도무지 주체할 길이 없는 낯뜨거움을 느끼며 어느 매체에 <제 눈의 들보를 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글을 쓰기도 했다.

그것은 문제가 된 교과서에 드러난 위험천만한 역사관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그에 대한 분노나 항의가 추호라도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일본에서 고작(?) 10퍼센트의 채택을 '목표'(!)로 운동을 벌인다는(실제 채택률은 1퍼센트 미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교과서에 그토록 분개해 마지않는 분들이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에서 일률적으로 똑같은 내용으로 가르쳐지는 국정(!) 역사 교과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웃 나라의 '어느' 교과서가 '난징 대학살' 부분을 축소하고 '종군 위안부' 문제를 누락시킨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유일한' 역사 교과서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또는 '라이 따이한'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도 '즉각 시정'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꿈 같은 얘기라는 걸 몰라서 했던 얘기는 아니다. 교과서는커녕 대중 매체에서 그 문제를 언급했다고 백주대낮에 떼거리로 몰려가서 두들겨부숴 버리지 않나, 그러고도 모자라서 전국에 생방송 되는 텔레비전에까지 나와 "적아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양민'이 어딨느냐"는, '난징 대학살'에 가담한 구 일본군 장교나 입에 올릴 법한 말을 뻔뻔스럽게 내지르기까지 하는 판국이니, 교과서에 그 내용을 싣고 반성하자는 말은 감히(!) 꺼낼 게제도 아니거니와 국정 교과서 제도를 폐지하자는 논의조차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기까지 험난한 앞길이 놓여 있는 것이 어김없는 현실이다.

요컨대 일본에서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들자고 법석을 피워 문제거리가 된다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교과서에 '이미 담겨 있는' 위험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대안 교과서를 만들자고 하는 분들이 '불온하다'고 감옥에까지 가야 했으며, 지금도 '교과 내용' 이외의 것을 가르친다고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이거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재무장화는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걸 걱정하는 목소리의 반의 반이라도 한반도의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는, 혹은 일본 정부가 위험한 내용의 교과서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걸 항의하는 목소리의 반의 반이라도 그 어떤 '다른' 생각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위험한 대한민국 '국정' 교과서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는, 그리고 이웃 나라에서 국가주의자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해 가는 것이 결코 '티끌'에 비유할 만큼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국가주의자들이 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이미 부동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제 나라의 '들보'나 어떻게든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해가 채 가기 전인 지난 해 여름, 또다시 온 나라가 '대∼한민국'의 환호로 물결쳤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다시 묻고 싶어졌다. '대한민국'이 걸어온 역사의 부끄러운 일면을 알면서도 그것까지도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랑스러운 일면만을 추앙하기에도 바빠 그런 것들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인지. 만일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부각시킨 교과서와 적어도 양자를 균형 있게 서술한 교과서 사이에 채택 경쟁이 벌어진다면, 과연 전자의 채택률이 (그토록 분노하고 항의해 마지않던 이웃 나라에서처럼) 단지 1퍼센트에 머무르게 될지. 나아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면, 도대체 어떤 자기 정당성의 근거로 이웃 나라의 역사 왜곡에 분노하고 항의할 수 있을지.

물론 이것은 순전히 가정법으로 이루어진 질문이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정직하게 스스로 답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공정하게 말하자면, 실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해야 옳겠지만!). 만일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를 읽고 그 내용에 조금이라도 불편해하거나 그 내용을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는 이가 있다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쏟아냈던 분노가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간다 해도 조금도 서운해할 일이 아닐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고사하고 아직 실체 규명조차 되지 않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의 "무덤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을, 일제가 침략의 교두보로 건설한 괴뢰 국가 만주국의 체제를 "교과서 삼아" 빚어낸 대한민국을, 그 부끄러운 역사를 똑바로 응시하기 전에는 이른바 '자학 사관'을 문제삼으며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일본 극우파들의 사상적 아버지들이 우리의 의식과 습속 깊숙이에 심어 놓은 국가주의의 망령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 맞서 저항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근거가 있는데 그야말로 '자학'이 너무 심하지 않냐고? 천만에!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초등학교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이 '상식' 아닌 '상식'부터 일거에 뒤집어 보인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진영의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오른쪽에 자리잡은 보수적인 세력"이었지만, 저자의 정확한 지적처럼 "1980년대 급진·좌경·용공으로 탄압받았던 재야단체들이나 1950년대의 진보당에서 오늘날의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 이후 이남에 출현했던 어떤 진보 정당의 정강정책보다 급진적인" 토지 국유화, 중요 산업과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파업의 자유 등의 정책을 내걸고 있었다! 하물며 "여기에 휠씬 못 미치는 생존권 차원의 주장을 편 사람조차 빨갱이로 몰아 국가보안법의 먹이가 되곤 했"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실상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했던 다른 수많은 집단의 역사적 의미를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는 저자조차도 "임시정부의 법통이라도 제대로 계승했다면"이라고 생각할까. 이렇듯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이 아무리 선의로 보아야 '심각한 농담'이고 악의로 보자면 '새빨간 거짓말'일진대, '제 눈의 들보'를 보라는, 그것부터 치우라는 말 말고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발표지면 참여사회, 2003.5.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대상 한홍구, <대한민국사>, 한겨레출판, 2003.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