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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수학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작성자 똥개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수학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문과와 이과 중에 진로를 선택해야 할 때 단지 수학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문과를 선택하는 아이들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딱히 그 이유만은 아니긴 했지만 수학에 대한 염증이 주저없이 문과를 선택하게 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소위 ‘주요 과목’으로서 수학의 중요성이 강조될 때마다, 도대체 이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는 건지 모르겠다는 딴엔 제법 이유있는 항변을 해 보기도 했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만 할 줄 알면 됐지 도대체 로그니 미적분이니 하는 것을 왜 모두가 알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 불행한 일은 이런 항변에 대해서 돌아오곤 했던 대답이라는 것이 궁색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납득은커녕 오히려 그 치떨리는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심만 부풀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라도 해내는 것도 공부라거나 지겨운 일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도 귀중한 경험이라는 따위로, 수학이 ‘수신(修身)’도 아닐텐데 마치 무슨 ‘인내심 훈련’이기라도 한 양 얼버무리는 억지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수학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대학 입시도 무사히 통과하고 그야말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같은 간단한 산수의 수준을 넘어서는 수학은 이제 더이상 거들떠볼 필요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의 일이다.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이 계산을 잘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빈틈없이 치밀하게 생각하는’ 것이 실은 ‘수학적 사고’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체득하기 위해 수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왜 아무도 진즉 내게 일러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늦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는 문과 전공 답지 않게도 대학 다니는 동안 내내 수학을 가르쳐 학비를 버는가 하면, 수학의 재미에 푹 빠져들어 잠이 안 오는 밤이면 고등학교때는 그토록 지겨워하던 수학 문제집을 꺼내 놓고 문제를 푸느라 밤을 꼬박 새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현실적인 골치거리들에 직면해서 머리가 복잡할 때 머리를 식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장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골라서 몇 문제 풀어 보고 나면 머리가 개운해지곤 한다.

수학에 넌덜머리를 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를 듣고 별 희한한 취미도 다 있다고 신기해할지도 모르지만, 수학이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예컨대 추리소설에 탐닉하는 것이나 혹은 ‘지뢰찾기’나 ‘프리셀’ 같은 퍼즐 게임을 즐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취미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추리소설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이 ‘수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대한 신뢰와 낙관이 가장 팽배했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신뢰와 낙관이 얼마나 강력했으면, 자연 현상이 아닌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데도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원용하여 이른바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이 성립했을까.


기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문명은 수학의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예컨대 인공위성을 쏘아올린다거나 초고층 건물을 짓는다거나 지능망 컴퓨터가 사람이 몇 백 년 걸려서야 할 수 있는 일을 순식간에 대신한다거나 하는 과학기술의 발전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 만사가 사람이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는 ‘신의 의지’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 스스로의 사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인식이 중세로부터 근대를 구분짓는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아니었던가. 수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문과에서는 수학이 필요없다’거나 ‘수학을 싫어하니까 문과를 선택한다’거나 하는 통념은 정면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수학(굳이 말하자면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수학적 사유’)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인문사회과학’이라고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수학이 싫어서 학문(=과학)이 아니라 예술을 하겠다면 그건 혹 말이 될지 몰라도 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마치 중세 시대의 학문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 신학이었듯이, 적어도 우리 시대의 학문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 수학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과학자가 수학 책을 썼다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라는 책으로 80년대 후반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전력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난데없이 웬 수학?’이라고 의아해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이 제목에서부터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논한 책이라는 데 주목해 보자. 물론 이 책은 ‘논리적 정합성’에 치명적 흠결이 있는 ‘도그마’들을 사정없이 논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그는 새삼스럽게 수학에 눈길을 준 게 아니라 실은 10여 년 전 그때부터 이미 ‘수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학의 몽상>이 ‘책’으로서 가진 미덕은, 여전히 수학을 재미없어하고 지겨워하는 사람들조차도 전혀 거부감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 재기발랄한 사회과학자는 엉뚱하게도 ‘수학 이론은 수학적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명제를 ‘수학적’으로 보기좋게 증명해 주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한다. 수학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에게라면 이건 참으로 통쾌무비한 일이다. 그래서 어리둥절한 채로라도 한 번 저자의 생각의 결을 따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이진경씨가 실제로 ‘수학이 싫어서 문과를 택했다’는 숱한 이들을 주독자층으로 상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수학사의 중요한 고비들을 ‘무미건조한 수식’이 아니라 우화, 패러디 등을 동원한 구수한 ‘이야기’로 엮어서 보여 주고 있다. 미적분학이 탄생하는 대목에서는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튀어나오고, 해석학이 위기를 맞는 대목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뛰어다니고, ‘괴델의 정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에스에프 소설을 연상시키는 컴퓨터와의 게임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독자들은 저자의 이 ‘몽상’들을 따라가면서, 암기해야 할 골치아픈 공식이라고만 생각했던 수학 이론들이 처음에 어떤 발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기존의 수학을 뒤집는 기발한 ‘발상’들이야말로 저자가 독자에게 전해주고 싶어하는 ‘수학의 본질’이다. 요컨대 ‘수학의 본질은 자유’이다.(어라? 근대 정신의 요체도 ‘자유’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 수학이 본디 이토록 즐겁고 재미있는 것일진대, 도대체 누가 수학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충만한 세계로부터 빼내서 정해진 답을 구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과목으로 만들었는가. 복잡한 수식 계산과 암기해야 할 공식들을 짜증스럽게 되풀이하는 게 우리가 배웠던 수학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아무려나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무겁고 어두운 저 권위주의적인 수학의 얼굴을 내질러 버리고, 재미있고 유쾌한 수학의 얼굴을 새로이 떠올리게” 하는 데 <수학의 몽상>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발표지면 인물과 사상, 2000.8.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대상 이진경, <수학의 몽상>, 푸른숲,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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