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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지옥에는 비상구가 없다
작성자 똥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더라고 덜컥 겁부터 났다. 몇 해 전 <88만원 세대>를 꽤 인상깊게 읽었다는 대학생에게 좀더 구체적인 독후감을 주문했다가, 대략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부지런히 스펙 쌓기에 매진해야겠다.”는 투의 대꾸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던 선동적인 문구에 비추자면 이만저만한 역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직업교육 현장에서 늘 마주하는 그와 별다를 바 없는 청춘들이 이 책 <현시창>을 읽는다면 또 어떤 독후감을 내놓을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일은 아니니 그래도 또는 그럴수록 더 권하긴 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청년들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이 책을 읽었다면 어떻게 하라고 선동하는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성세대들에게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나 있느냐고 따져묻는 쪽에 가까우니 굳이 권한다면 내 학생들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에게 선생에게 선배에게 먼저 일독을 강권하는 게 올바른 순서일 터이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그들이야말로 ‘역효과’에 대한 노파심만 한껏 부풀린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뜻의 제목에서 충분히 짐작되듯 이 책이 서리서리 펼쳐내는 현실의 단면은 ‘지옥도’ 그 자체이고, 일말의 공포도 없이 이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단한 강심장의 소유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우리 모두를 이런 끔찍한 지옥으로 내모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공포다. 그리고 시궁창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공포에만 사로잡혀 있는 한, 어디에 있든 거기가 이미 지옥인 까닭이다. 역설적이지만, 공포는 현실의 시궁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만은(또는 내 자식만큼은)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의 거울상일 뿐이다.

나는 감히 오해를 무릅쓰고 차라리 ‘체념’을 권한다. ‘희망고문’에 떠밀린 기대가 사라져야 비로소 결코 회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으며 그것만이 공포에 맞서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꿈이라도 꿀 아주 작은 여력이라도 있거든, 헛된 기대에 쏟아붓는 대신 세상이 조금이라도 덜 시궁창스럽도록 하는 데 발휘할 것을 권한다. 적어도 현실이 시궁창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그래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울 수밖에 없다면,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여유조차도 불평등한 분배의 결과일 뿐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현실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 제안도 담겨 있지 않고 실천을 촉구하는 단 한 줅의 구호도 없는 이 책은, 그 어떤 주장보다도 무겁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며 정치적 상상력을 일깨운다. “지옥에는 비상구가 없다. 고통스럽다면 좀더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수밖에!”

발표지면 시사인(별책), 2013.1.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임지선, <현시창>, 알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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