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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장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청춘담
작성자 똥개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아니 꼭 그런 거창한 신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차마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더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이 먼저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현명해야 마땅하리라고 믿는다는 뜻이며 또한 그러기를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살아낸 시간의 두께만큼 쌓이게 마련인 경험의 양적 차이까지도 간단히 무시해치울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흔히 연장자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 앞에서 뽐내듯 입에 올리게 마련인 “내가 너만 할 때는…” 식으로 비교하는 맥락에서라면, 조금의 망설임이나 거리낌이 없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너보다 어리석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이 적어도 그 나이 때의 자신보다 한결 현명하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정반대의 태도, 요컨대 “왜 그 나이의 나만큼도 현명하지 못한가”라는 개탄이나 질타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것이 어김없는 현실이라고 최대한 선의로 해석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더 많은 시간 동안 그러한 현실의 ‘일부’로서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뼈아픈 성찰의 표현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런 개탄을 자아내는 현실적 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또한 젊은이들에게서 현명함의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어 아낌없이 지지하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앞뒤가 맞는 일일 터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조차도 “좀더 현명해지라”는 격려가 아니라 “까불지 말라”거나 심지어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엄포로 나타나기 일쑤여서, 오히려 젊은이들이 좀더 현명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견고하게 봉쇄하기 위한 핑계로 동원하는 일이 허다하다. 혹시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이고 앞으로 더 나빠지는 일만 남았다고 여기는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세계관의 발로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 아직 ‘살아낸 날들보다 살아낼 날들이 더 많은’ 그래서 ‘자서전’을 쓰기에는 한참이나 이른 나이의 저자가 ‘설익었음에 분명한 말투’로 털어놓은 ‘성장의 기록’에 새삼스러운 주목을 보내는 첫번째 까닭이 있다. 모름지기 기득권 질서에 대한 저항을 담론적으로 구성하는 일에는, 그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당사자(들)의 시선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만 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드러낸 ‘날것의 자의식’을 고스란히 되짚자면, 저자는 자신을 가령 ‘여성’ 또는 ‘주변부 계층’보다는 ‘청년 세대’의 당사자로 인식하고 있다. 세대론적 접근이 빠져들 수 있는 분명한 한계와 적지않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일단 저자의 시선이 이끄는 대로 ‘지금, 여기’의 어떤 단면을 엿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 시시콜콜한 속내를 들추어 해부하고 분석하고 재단하는 주제넘은 만용을 부리지는 않으려 한다. ‘남성’은 그저 ‘여성’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있을 뿐이듯, ‘기성세대’는 그저 ‘청년세대’의 이야기에 겸손하게 귀기울일 수 있을 뿐이다. 더 많은, 더 다양한 주체들이 자기 언어로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지지한다면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적어도 호의를 빌미삼아 ‘기득권의 언어’로 재식민화를 시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건성으로 흘려듣지 않고 ‘경청’하고 있음을 굳이 드러내는 것이 지지를 표현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면,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를 덧붙여두자. “저자가 제 또래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설령 흔치 않은 행운을 거머쥐었거나 반대로 아주 예외적으로 불운한 조건에 놓여 있던 것뿐이라 해도, 나는 안도한다. 나보다 스무 해 늦게 태어난 그가 꼭 스무 해 전의 나와 견주어, 훨씬 성숙한 자의식을 한결 또렷하게 벼려내고 있으며 부러울 만큼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고단한 일상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책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문득 미안해진다. 단지 이게 전부라면, 이 글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아까운 책’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령 이 책은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거니와 이 시리즈로 나온 모든 책들, 2011년으로 범위를 좁힌다 해도 <마토르시카, 모래섬에서 왈츠를>이나 <운동권 셀레브리티>도 (비록 저자들이 연배나 커리어가 상대적으로 만만찮기는 해도) 비슷한 이유로 주목받아 마땅하다. 또는 <20대 : 오늘, 한국 사회의 최전선>을 통해 소개된 책들 가운데 (적어도 ‘대상화’의 위험을 내포한 기성세대의 저작을 제외한) 대부분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며, 좀더 시야를 넓히면 숱한 당사자 들의 ‘마땅히 경청해야 할’ 목소리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필 이 책이 그 모든 책들의 대표격도 아니려니와, 다른 책들보다 더 특별한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도 사실 없다.

변명하자면, 그저 우연히도 이 책의 저자가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기에 더 눈길을 끌었던 것뿐이겠지만, 막상 출판산업에서 직업적 전망을 찾으려는 ‘취업 적령기’의 청년들에게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내 처지에서 ‘남 일 같지 않게’ 짚이는 대목들이 없지 않았다. 자칫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 ‘꼰대’의 백 마디 말보다 비슷한 또래가 자기 언어로 기록한 ‘경험담’이 훨씬 생동감 있는 울림을 자아낼 것이다. ‘책 만드는 사람’의 직업적 자의식을 애써 숨기지 않는 저자가 피력하는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꼭 ‘책 만드는 일’이 아니더라도 ‘의미를 생산하는 정신적 노동’에서 직업적 전망을 모색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새겨야 할 보석 같은 체험들로 반짝인다.

아쉬운 대로 서너 가지만 짚어보자.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하거나 단지 ‘하기 싫은 일’을 손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는 데 익숙한 ‘어른아이(키덜트: ’kid‘와 ’adult‘의 조어)들은 그가 어떤 직업을 꿈꾸건 아직 직업을 가질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소설가 은희경의 말을 빌자면,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보잘것없는 좌표를 읽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들은 일찍부터 자기라는 존재를 자각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소년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한 가지 연료는 환멸이다.”(<비밀과 거짓말>에서) 그래서 ‘자의식’의 출발은 ‘결핍’이다. 요컨대 스스로를 ‘강남 거지’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변부적인 삶의 조건’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을 체화시키는 거름이다. 한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이란 그저 ‘자신을 응시하는 (고유할 수밖에 없는) 시선’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독서 체험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게 진짜배기다. 체계적인 독서는 학업이든 취업이든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목적이 있을 때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도록 정보 획득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효율적인 교양’이 형용모순이라면, 적어도 독서 습관을 형성하는 청소년기의 독서란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중구난방인 편이 두고두고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골라주는 책, 체계화된 제도를 통해 ‘권장’하는 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스스로 책을 고르는 안목을 기를 수 없다.

게다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내용이기도 한 ‘다양한 알바 체험’은 단지 ‘비정규 노동’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청년 세대의 고단한 일상에 대한 고발로만 읽히지 않는다. 저자에게 알바는 ‘생계의 절박함’이기도 하지만 “내가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알바를 통해 배웠다”는 말로 집약되는 ‘지적 정서적 성장의 구체적 계기’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생계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건 하고, 그게 무슨 일이든 자신이 일생토록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가지 못 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삶이었다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책을 만드는 일을 할 준비가 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요컨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밥’을 가져다주는 일에서조차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과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의 글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를 읽어내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마도 ‘연극 동아리’ 활동에서 자연스럽게 이끌린 것이기 쉽겠지만,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점을 가장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다. 비유하자면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면서도 정작 축구를 할 생각은 않은 채 축구하는 법을 공부하겠다고 허송세월하는 요령부득과의 호된 씨름을 노상 되풀이하곤 하다 보니,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맨땅에 헤딩’하듯 덤벼들어 어떻게든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어떤 ‘전형성’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거꾸로 시대적 전형을 담지한 ‘거대 서사’만이 책으로서 큰 가치를 지니는지를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의 목적은 단지 이 책 <<은근리얼버라이어티 강남소녀>>에 대한 주목을 권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거창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기엔 지나치게 소소한 ‘개인적 기록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이 책에 대한 나의 주목을 통해, 더 많은 그리고 더 다양한 주체들에게 이 책과 유사한 작업을 부추기려는 것이다. 무릇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발표지면 <아까운 책 2012>, 부키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김류미, <은근리얼버라이어티 강남소녀>, 텍스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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