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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백인 중심 유럽사와 한족 중심 중국사의 짜깁기'를 넘어서
작성자 똥개

20년 전 우연찮게 잠시 미국에 머무를 때, 시리아 출신의 이민자 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의례적인 질문 몇 가지를 했고, 나 또한 의례적으로 간략하게 대꾸를 해주었다. 피차 영어가 서툴기는 매일반이어서 깊은 대화로 이어질 계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극히 의례적인 단문단답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조차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그는 한국 인구가 4천만이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고, 내 영어가 서툴러 1천4백만을 4천만으로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닌가(또는 '인구'라는 말을 내가 혹 다른 단어와 착각하여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은 아닌가)를 서너 차례 되풀이해 확인하다가는 지레 지쳐 손사레를 치며 다른 사람에게로 관심을 옮겨갔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고스란히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탓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고 이내 심상해졌다. 거꾸로 그의 나라 시리아가 화제가 되었다면 한국 출신의 이민자들이라고 해서 그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외국인을 만나면 마주치게 마련이라는 "한국에서는 일본어를 쓰는가, 중국어를 쓰는가"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도 생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유의 에피소드들 때문에 나라 밖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실없는 '애국주의적' 농담에 머물기에는 개운치 않다. 다시 입장을 바꿔 보면 나라 안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성싶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는 4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90만에 육박하는 외국인 체류자들이 있고 현재의 추세만 지속돼도 20년 뒤엔 이민 2세만 거의 1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들(또는 그들의 부모들)이 떠나온 나라들에 대해 초보적인 수준의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러한 무지에 기초했음에 틀림없는 상투적인 질문거리에조차 별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강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에서 되짚어보자면, 꼭 필요한 질문조차 생략되곤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쯤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또는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관심에 관한 문제이니 일단 논외로 제쳐놓더라도, 후자는 좀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필요한) 정보의 결핍'에 더하여 '(잘못된) 정보의 과잉'이라는 역설이 포개져야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무지'란 문제의 지극히 표피적인 일면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일상적인 관심의 용량을 지나치게 초과하는 '정보 과잉'에 노출되어 일방적인 수용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조건이 "꼭 알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더욱 본질적인 국면이다. 물론 이런 조건에서 '과잉된 정보'의 내용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따질 여력 따위는 없으므로 그것이 곧바로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무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이것이야말로 '대학 입시'에 발목잡힌 한국의 중등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反)교육'의 핵심이다. 한국어를 1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어느 과목보다도 많은 시간을 교육받고서도 '표현 능력'은 고사하고 '이해 능력'조차 의심스러운 이들이 양산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수없이 되뇌이고서도 정작 가장 초보적인 인권 개념을 설명하면 마치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70억 인구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어떤 문화적 맥락을 형성해 왔는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담고 있어야 할 '세계사 교과서'의 내용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우리가 배운(그리고 우리의 후속 세대들이 배우고 있는) '세계사'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세계사가 결코 아니다. '백인 중심 유럽사와 한(漢)족 중심 중국사의 어정쩡한 짜깁기'일 뿐이다. 그것이 언필칭 '세계사'이니, 유럽에 속하지 않으며 중국에서 변방으로 여겨졌던 세계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아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지엽적인 내용을 단순 나열하는 데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거나 때로 같은 내용을 지루할 정도로 중언부언하는 대목도 눈에 띄며, 무엇보다도 현재의 '세계사'를 지양하는 세계사적인 통찰의 깊이에 있어서 제가끔 특정 지역의 지역학(또는 지역사)의 전문가들인 7명의 저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편차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점 등, 완성도 면에서의 흠결이 사소하지만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무릇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면, 이 책의 출현은 그 소중한 단초라 할 한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설령 이 책의 문제 제기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명실상부한 '세계사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해도, '대학 입시'만 끝나면 깡그리 잊어먹어도 되는 암기 목록을 덧보태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라면, 아니 애당초 '다른 사회'에 대한, '역사문화적 배경이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거나 매개하는 '사회 교육'의 본령은 도외시한 채로 오히려 점점 더 견고한 '동종 집단'의 구축에만 여념이 없도록 강제하는 작금의 반사회적 세대 재생산 기제가 요지부동이라면, …….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세계'를 호흡하는 '세계인'은 고사하고, 그 이전에 '다른' 사람과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을 키워내는 것조차 요원한 현실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발표지면 기획회의, 2007.12.20.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이옥순 외,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 삼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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