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향한 오래된 편견
이제 막 출판에 입문하려는 젊은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무릇 세상의 모든 '가르침'이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뿐이라는 점에서, 명색 '선생'인 내 쪽에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을 때가 있다. 가령 며칠 전 출판 기획안을 만들어오라는 과제물을 받아 진행한 워크숍 형식의 강의에서 벌어졌던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도 내게는 무척이나 새삼스럽게 의미심장한 시사를 던져 주었다.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담은 책에 대한 기획안을 들고 나온 어느 여성 수강생은, 전통적으로 페미니즘의 핵심 주제를 구성해 왔던 이 주제에 관해 한사코 "페미니즘적 시각"을 지양하려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지양하고자 한다는 '페미니즘적 시각'이란, "남성 위주의 세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와 컨셉"을 통해 "비판만 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원한만을 곱씹는 것"으로서 "현실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남성 중심적인 이 사회가 '페미니즘'에 관해 형성해 온 가장 전형적이고 또한 가장 유력한 '표상' 중의 하나이며, 이 사회로부터 초월한 해방구에서 살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이 '표상'을 기정사실로 내면화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의 저자 정희진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니까.(35쪽)
문제는 이것이 오도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보여 주려 해도, 이미 알고 있는(실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이상을 보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여 줄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실은 그래서 그것이 '편견'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도 없고 사람이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도 없으므로, 누구나 '그릇된 앎'에 기반한 '그릇된 판단'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앎이 스스로에게 '의심할 나위 없는 진실'로 여겨질 때, '편견'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왕성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보여 주었던 페미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도,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강의하면서 가장 당황할 때는,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나의 강의를 '여성주의자가 되라, 저항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나의 주장은 그런 사유 방식과 가장 거리가 멀다. […] 여성주의는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단순한 '안티'(반대)도 아니고,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 여성주의는 세상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로잡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식하고 정치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요컨대 "저항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 수단"이라는 것이다.(43쪽)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 수강생이 '페미니즘적 시각'을 지양함으로써 구현하고자 한다는 방향의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이 기획안에 관한 토론에 참여한 거의 대부분의 수강생들 또한, "페미니즘을 지양해서 실은 페미니즘을 구현한다"는 놀랍도록 변증법적인(?) 이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러한 전제 아래 '페미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감을 애써 숨기지 않는 이도 있었다. 다시 고쳐 말하자면, 거의 예외 없이 '페미니즘'의 실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용감무쌍하게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 어린 '표상'을 움직일 수 없는, 의심할 나위 없는 기정 사실로 전제하더라는 것이다. 고작 한 사람 정도가 "페미니즘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는 토를 달기는 했지만, 토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모르긴 해도, 페미니즘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가 못마땅한 나머지 궁색하게 그저 한번 내질러 보는 일종의 '(실체 없는) 정치적 수사'쯤으로 치부되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자체가 새삼스러운 광경은 아니다. 나 자신 이미 10년 전에 비슷한 맥락에서 '담론의 교란'을 지적하며, "누가, 왜 페미니즘을 교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거니와(<'전여옥식 테러'의 미덕과 해악>), 그러한 교란으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페미니즘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접촉면이 오히려 점점 더 견고하게 봉쇄되어 왔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림짐작이 좀더 뚜렷한 실체로 감지되었다는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새삼스러운 깨우침을 곱씹었던 대목이다.
"공략하지 말고 낙후시켜라"
비단 '페미니즘'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이 사회의 주류적 인식, 지배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거의 모든 모색들은, 단지 '차갑게 외면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고도 교묘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엉뚱한 누명'까지 뒤집어쓰며 대중과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당하고 있다. 물론 '차이'에 주목하는 저자의 생각을 빌어 말하자면, 그 모든 현상을 한꺼번에 뭉뚱그려 말하는 이런 식의 진술조차도 어쩌면 그러한 왜곡을 궁극적으로 방조할 수도 있는 접근 방식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 직면하고 있는 국면과 그와는 또 다른 무수한 '대안적' 모색들이 직면하고 있을 국면에서 모종의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연대'의 가능성이 싹틀 것이라는 점에서라면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곘지만, 다른 한편 지배의 역사는 물론이려니와 저항의 역사도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던 그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다름'의 계기들을 무화(無化)하려는 무모한 시도로 귀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교란과 왜곡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 중의 하나이다.
동양의 이이제이(以夷制夷)나 서양의 분할지배(divide and rule)가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단순히 '분열을 조장하고 서로 반목하게 한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얄팍한 이해로부터는 '그러니까 서로 다른 처지에도 불구하고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이 있다. 우리는 '왜' 지배 질서를 문제삼고 있는가. '왜'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고 있는가. 지배 질서에 저항하기 위해서든, 심지어 그것의 전복을 위해서든 구체적인 삶의 계기들이 '다 다르다'는 처연한 사실이 경시될 수 있다면, 그것이 현존하는 지배 질서에 비추어 '대안적'이기나 한 것인가. 그러니까 가령 '페미니즘'이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 대하여 '대안적'인 것일 수 있다면, 한 마디의 단순명쾌한 '자기 규정'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 수가 없게 된다. '페미니즘'(이든 또는 그 어떤 다른 대안적 모색이든)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선한' 또는 '정의로운' 목적을 가지고 있건 그와 무관하게, 다시 말해 '대안'을 향한 '자기 규정'으로서든 지배 질서가 유포하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오도된 '편견'이든, 궁극적으로 실체가 아닌 '표상'일 뿐이며 필연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계기들로부터 출발하는 실천적 모색의 실체를 비가시화(非可視化)한다.
이것은 일종의 심각한 딜레머이다. 가령 앞서 예를 든 것과 같은 상황에서 나는 "당신들이 알고 있는 페미니즘은 '가짜'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진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진짜'라고 주장하는(그럼으로써 자신과 '다른' 것을 '가짜'로 만들어 버리는) 페미니즘을 상정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을 오도하는 메커니즘에 가장 충실하게 봉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전히, "무엇이 '진짜' 페미니즘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페미니즘이건 아니건) 자신의 삶에 관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해 어떤 의미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가일 것이다. 하지만 온갖 왜곡된 '표상'들에 의해 그러한 질문의 통로 자체가 견고하게 봉쇄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소모적이며 심지어 자기 배반적이기까지 한 논점을 우회할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넘겨짚자면 아마도 "공략하지 말고 낙후시켜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옳고 그름'을 가리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할 현실의 차원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남성들이 서로 다르듯 여성들도 모두 다르다.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들에게 가족은 '젠더 공장'으로, 여성 억압의 장소이자 젠더를 인식하는 출발이다. 그러나 장애 여성이나 레즈비언에게 가족은 종종 쟁취해야 할 투쟁의 목표가 되고, 흑인 여성에게는 인종 차별에 저항할 근거지가 된다.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기존 여성주의를 해체, 재구성할 것이다."(238쪽)라고 말하는 저자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 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 어떻게 전체 운동이 따로 있고, 부분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22쪽)라고 반문할 때, 이 책 {페미니즘의 도전}에 담긴 내용조차도 '(추상화된 전체로서의)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내용이 아니라 단지 지금 여기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정희진의 페미니즘'을 서술한 것이 된다. '페미니즘'은 정희진이라는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령 "<페미니즘의 도전>과 같은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지금까지 '페미니즘'에 관해 막연하게 기정 사실로 전제하고 있던 이미지들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반성하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 저작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독이자 저자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 '여성운동'과 '여성학' 두 영역 모두에서 '왕따'(35쪽)라고 털어놓는 저자가 이 책(과 또는 다른 저작들)에 드러나는 이론적·실천적 작업을 통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자 자신 '정희진의 페미니즘'을 해명하고 있듯이 "누구나 소수자이며,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 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더이상 '누군가의 페미니즘'을 대상화하여 동일시하거나 적대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페미니즘'(그것을 '페미니즘'이라 지칭하건 지칭하지 않건)을 자신의 삶 속에서 형성해 갈 수 있는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 이 책의 가장 큰 존재 의의와 미덕이 있으리라는 점뿐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페미니즘이 어떻다"거나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혹은 그(혹은 그들)의 페미니즘은 어떻다"거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주어져 있는 '대답'(그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하든 부정적 태도를 취하든)이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내가 읽은 바가 옳다면 적어도 저자는 이 책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전적으로 나의 오독에 기인한 바라 해도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 이 책을 통해 내 삶 앞으로 남겨진 '질문'의 내용이 그러하다.
적어도 이 사회의 '젠더'와 관련한 질문이 마련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 '페미니즘'이며, 물론 그것은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치화하는 구체적인 질문자 자신의 페미니즘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저자의 말대로 페미니즘이 "세상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로잡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식하고 정치화하도록 돕는 것"인데, 저자 스스로도 지적하듯 "나의 실천 대상 범위는 기껏해야 나 자신"(276쪽)이라고 여길 수만 있다면, 각자가 자신의 페미니즘을 말하고 또한 실천하는 것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페미니즘'이 어디에 따로 또 있겠는가. 또는 이미 그러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정치화하는 실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페미니즘'이라 부르면 어떻고 부르지 않으면 또 어떤가. "모든 사람이 여성주의자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라는 저자의 언설(43쪽)은, 그러한 실천의 영역에서 어떤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또다른 어떤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페미니즘을 일종의 진보적 '도덕률'로 여기는 가운데, 예컨대 여성이라면 당연히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는 식의, 심지어 그것이 '옳다'는 식의 강박관념(과 그 동전의 앞뒷면인 반감)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는 언설일 것이다.
다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적어도 사회 통념상 '표상화'되어 있는 의미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에 우호적인 활동을 해 왔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페미니스트'일 수도 없다고 말해 왔다. 그것은 내가 "페미니즘은 이념적 지향 이전에 존재론"이라고 믿고 있으며, 나 자신이 여성이 아니면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현실을 '들어서 알고 있을' 뿐 내 몸으로 경험하지 않았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일종의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처럼 '존재론'이라고 해명하는 대신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저자에게서 페미니즘을 또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실마리가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형성하게 될지는 그 '질문'들을 통해 내가 다시 어떻게 내 삶 안에서 스스로를 정치화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구체적인 실천의 계기에서 일단의 '페미니스트'들과 일정한 정치적 갈등을 빚은 일이 있고, 그 경험은 내 삶에 지금껏 온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는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과장하여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에게 험구를 늘어놓는 것으로 유치하게 보상받으려 하는 대신 그저 내 몫의 상처로 감당하려 나름대로 애써 왔고, 아마 앞으로 그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또는 그보다 더 심각한 상처에 직면한다 해도 그 태도를 바꾸지는 않으리라고 스스로를 믿고 싶기도 하다. 그런 처지에서, "목소리와 침묵에 관한 이슈들은 여성주의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 설정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와 토론할 것인가, 누가 말하고 누가 들을 것인가, 어떤 주제를 토론하고 토론하지 않을 것인가는 모두 권력 관계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때문에 특정한 질문에 대한 논쟁이 일시적으로라도 폐쇄된다면 진보는 불가능하다."(238쪽)라는 상당히 '딱딱한' 언설은 그 어떤 '따뜻한' 말보다 내게 큰 위로가 되었으며, 나아가 그 '위로'에 힘입어 스스로를 다시 한번 되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저자에게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전할 지면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을 다른 독자들 또한 나처럼 이 책을 통해 저자에게서 위로와 거울을 동시에 선물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특히나 '젠더'와 관련하여 자신의 삶을 정치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질문거리 중의 하나를 저자에게 또한 이 책을 읽을 독자들 앞에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던져 놓고 싶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남성들은 인과 관계나 의사 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 익숙하지만, 여성들은 원칙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공감하는 말하기 방식(rapport-talk)에 능하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말하기 방식은 열등하거나, 비논리적, 사적이라고 비하되어 왔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적 방식'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76쪽)
이 말 자체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 오래된 상처 중의 하나가 고통스럽게 덧나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가령 내 글쓰기 방식이 지나치게 '남성적'이고 '권위적'이라는 평가에 곤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아마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언어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원칙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공감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비하하거나 심지어 억압할 의사가 전혀 없지만, 그런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내 언어가 어떤 이들에게 그 존재 자체로 '억압적'으로 느껴진다면 그 이유를 막론하고 나는 마땅히 그러한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과연 그것이 '젠더'의 문제인가, 즉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그런 '억압적 언어'를 쓰면서도 반성을 할 줄 모르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좀 불편하니까 잠깐이라도 다물어 줄래?"라고 말한다면 모르겠지만, "그 지독히도 남성적인 언어적 권력을 왜 포기하지 못하는가"라는 식이라면 나도 할 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지만,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하면서 내가 가진 성별적 기득권에 눈 감으려는 게 아니다. 만일 다른 문제였다면, "그래, 아무리 잘난 척 해 봤자. 남자는 정말 어쩔 수 없네."라고 동의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내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그것이 그야말로 '뼈아픈' 지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남성들의 언어가 여성의 언어에 비해서 인과 관계나 의사 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여성의 언어를 열등하고 비논리적이며 사적이라고 비하하기 위해 억지로 동원된 허구일 것이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서구 사회에서라면 혹시 정말로 남성들의 언어가 그런지도 모르겠고, 그런 점에서 역시 서구에 뿌리를 둔 여성주의가 그것을 남성적 언어로 간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나는 바로 그 언어로 인해 남성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고, 그 소외와 배제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남성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즉 남성으로서 젠더-사회화되는 것을 가로막아 왔다. 사적이고 비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핑계로 남성 사회로부터 배제당하는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겠지만, 그 반대라 해도 배제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언어는 인과 관계나 의사 전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언어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정확하다. '언어 이전의 묵시'에 동참할 수 없는 '인과 관계에 집중하면서 의사 전달이 명료한'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계집애처럼(!) 말만 많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그들의 그 '묵시적' 언어가 훨씬 더 비논리적이고 사적이다. 나는 남성이 이성을 표상하고 여성이 감성을 표상하는 '통념'에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감지한다.
문제는 언어의 '성격'이 아니라 침묵의 강요, 담화 공간에서의 배제 그 자체라면, 과연 내 언어가 '인과 관계나 의사 전달 위주'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적 언어'의 표상으로서 비난받고 소통을 거절당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물론 앞서 말했듯, 그것이 사실이건 허구이건 많은 사람들이 내 언어로부터 실제로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면, 나는 그 공간에서는 기꺼이 말을 아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침묵을 강요당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또 그것을 듣기 위해서이지,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적 배제 속에서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은 내 언어가 '위압적'이라는 것을 사실로 승인해서는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저자의 '여성적 언어'에 관한 언급이 좀더 업그레이드된다면, 내가(또는 언어적으로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정치화하는 데 페미니즘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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