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 SBS 일일드라마 <못난이주의보>의 주인공 공준수(임주환) 같은 성격의 인물은 현실에 없다. 적어도 매우 드물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가 그려낼 사랑, 우애, 심지어 ‘착한 부자’ 등등은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판타지다. 물론 그 자체가 드라마로서 흠잡힐 일은 아니다. 현실에 없으니까 드라마를 통해 꿈꾸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효용(가운데 하나)일 테니까.
질문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우선 그 꿈은 얼마나 건강한가. 꼬인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이 반듯하고 무작정 착하기만 한 ‘못난이’는, 대다수의 갑남을녀들에게 보기엔 그럴듯할지 몰라도 막상 흉내라도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고역일 게다. 게다가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희생이라는 주제는 또 얼마나 진부한가. 드라마가 제공하는 판타지가 고작 그뿐이라면, 그건 정직하게 말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향한 싸구려 자기연민일 뿐이다. 요컨대 공준수라는 인물의 건강성은 그의 ‘천연기념물’ 같은 반듯함이나 착함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정작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가 결코 ‘언제나 반듯하고 착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라, 오히려 늘 번민하고 갈등하고 그럼에도 결국 ‘용기있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 앞에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덕교과서처럼 ‘무엇이 옳은지’를 함부로 설교하려 들지 않는다.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한다고 손쉽게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으로 감당하겠다는 의지만을 겸손하게 드러내며 용기를 일깨우고 부추기는 데 그칠 뿐이다. 그렇게 ‘반듯하고 착한 심성’이 아니라 ‘용감하고 당당한 삶의 자세’가 바이러스처럼 주변을 시나브로 전염시켜 간다. 드라마가 제목에서 난데없는 ‘주의보’를 발령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못난이주의보>는 ‘착한 드라마’의 건강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공준수는 이 바이러스의 진원지가 아니다. 방송 첫 주 고작 다섯 회를 출연하고도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존재감을 새겨놓은 진선혜(신애라)야말로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이다. 사기 전과 5범의 아버지와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무모하기까지 한 선택을 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의 반대 앞에서도 당당하게 ‘엄마의 사랑을 존중할 것’을 주문하며 난생처음 ‘행복’을 느끼게 해준 새엄마 선혜는, 준수에게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비쳐보는 거울이다. 또한 준수의 바이러스가 동생들에게 전염되는 중요한 매개이기도 하다. 그들은 쉽지 않은 용감한 선택을 할 때마다 ‘엄마를 닮은’ 스스로를 발견하며 흐뭇해한다. 자연인 진선혜는 오래 전에 죽었지만 실은 그렇게 의연히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선혜도 준수가 기억하듯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는 아니다. 선혜의 ‘용감하고 당당한’ 삶의 자세가 이즈음 현실에서 보기 드문 것이긴 하지만, 아무 맥락 업이 출현한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아니란 것이다. 비뚤어진 욕망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먹고살기 위한 ‘생계형’ 사기에조차 번번이 실패해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찌질이’ 준수 아버지 공상만(안내상)과 재혼을 결심한 것은, 단순히 ‘첫사랑’에 대한 철없는 동경도 아니었고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열정에 휩쓸려서도 아니었다. 상만은 선혜에게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 위기에서 구해준 ‘멋있는’ 소년으로 기억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단편적인 기억이 실제 그의 성격과 부합하느냐는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상만이 ‘용감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떤 ‘용감한 행동’이 선혜를 선혜답게 하는 삶의 자세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상만은 이미 선헤에게 전존재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감한 사람도 없고 오로지 용기로만 똘똘뭉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단 한 순간의 어떤 용감한 선택이, 설령 대다수의 기준으로는 자기만 손해보는 ‘못난이’처럼 보일 때조차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될 ‘삶을 대하는 용감하고 당당한 자세’라는 바이러스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것이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던지는 두번째 질문이다. 좀체 현실과는 인연이 닿지 않을 성싶은 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꿈꾸게 한다면, 그 꿈은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인가.
준수처럼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게 꼭 옳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걸 ‘착하다’고 추켜세우는 건 적잖은 경우 끔찍한 폭력으로 귀결하곤 하기도 한다. 다만 직면한 삶의 문제 앞에서 스스로에게 떳떳한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겸손하되 당당하게 감당하는 것, 그게 드라마 밖의 시청자들에까지 감염되기를 바라는 ‘못난이 바이러스’의 정체다.
존경할 만한 부모를 찾아서
준수 형제들에게 엄마가 결정적인 ‘롤 모델’이라면, 준수에게 엄마의 ‘당찬’ 이미지를 고스란히 재현하며 다가오는 나도희(강소라)의 성격은 할아버지 나상진 회장(이순재)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돈’보다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평생을 많이 벌었으니 말년은 잘 쓰는 데 집중하겠다며 부의 대물림에 제동을 거는 ‘착한 부자’다. 물론 순전히 드라마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현실에서라면 그렇게 꼿꼿하고 고지식한 원칙주의로는 그만한 부자가 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 인물에서, ‘착한 부자’나 나아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허망하기 짝이 없는 소망을 읽어내고 마는 건 너무 도식적이다. 차라리 물질적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는 부잣집 딸에게도, 가난한 고아 형제들과 전혀 다름없이 ‘본받고 존경할 만한’ 어른이 필요하다는 ‘롤 모델’에 대한 극심한 갈증을 읽어낼 수는 없는 걸까. <베토벤 바이러스>나 <파스타>가 이런 열망을 직업 세계를 배경으로 드러냈다면, <못난이주의보>는 자식들이 존경할 만한 부모가 되어달라고 누구에게나 가장 일상적인 가족 관계를 겨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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