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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사랑을 흔드는 것들, 침묵과 눈물
작성자 똥개

김경욱의 원작 소설을 드라마로 재탄생시킨 <동화처럼>의 줄거리를 단순무식하게 정리하자면, 같은 상대와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한 커플의 이야기다. 이즈음 확고한 트랜드로 자리잡은 로맨스코미디의 소재로 제격일 성싶지만, 그보다는 훨씬 진지하다. 확실히 ‘올드’한 감각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1989)부터 장국영의 죽음(2003)까지를 관통하는 케케묵은 배경은 회고 취향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꼼수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은 더더욱 아니다.

‘침묵의 왕’ 명제(이천희)와 ‘눈물의 여왕’ 장미(최윤영)가 엮어낸 그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진부하게도 또는 심지어 닭살돋게도 ‘사람과 결혼의 진정한 의미’ 따위를 발견하는 데 그친다면, ‘결코 동화가 아닌 현실’을 제멋대로 동화로 각색해버리는 ‘정신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눈길이 닿아야 할 지점은 ‘침묵’과 ‘눈물’의 정체다. 동화 속에서라면 그저 (끝내 사랑으로 풀리게 마련인) ‘마녀의 저주’일 뿐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명제와 장미에게는 깊숙한 개인사적 연원과 나아가 도저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작용한 결과물일 테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네 일상에서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나 해명이 필요한 순간에 오히려 입을 닫아버리게 되는 건 가령 이런 경우다. 말해 봐야 실제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여길 때, 어떤 말로도 이해받지 못하리라고 짐작될 때, 기대에서 벗어난 대꾸가 두려울 때… 더 많은 이유를 댄다 해도 그 밑바닥에는 근원적인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내 의견이 무언가 상황을 개선할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이, 진심으로 해명하면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 상대방의 대꾸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말문이 열리지 않던가.

또는 야무지게 상황을 수습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무기력한 눈물로 주저앉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일지 가늠이 서지 않을 때, 잘 해보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깊은 수렁에 빠질까봐 두려울 때, 막막한 눈물만 흐를 뿐 더는 아무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지만 방법을 몰라서’ 헤어져야 했던 주인공들의 사례는 그래서 전형적이다. 실직한 명제는 왜 끝내 장미에게 선뜻 이해를 구하지 못하고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다”고 물러섰을까. 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문제인데도 장미는 왜 “내 문제일 뿐”이라고 명제의 협조를 거절하고 이혼을 강행했을까. 상대에 대한, 그 이전에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다면, 어쩌면 훨씬 격렬하게 부딪치다 재결합의 여지조차 없는 ‘끝장’으로 치달았을지는 몰라도, 이혼하고 나서도 감정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춘기 풋사랑마냥 ‘상대의 진심을 확인할 길 없는 짝사랑’에 속태우지는 않았을 게다.

그런데 과연 명제와 장미는 그저 보기 드물게 ‘답답한’ 성격을 가진 독특한 인물들이기만 할까. 물론 아들을 방치하다시피 한 명제 아버지나 딸을 극단적으로 억압한 장미 어머니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도 심상치는 않다. 사람의 소통에는 두 가지 전제가 요구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소통의 필요가 생겨난다는 것, 그러나 최소한의 신뢰 기반을 공유하기에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다.

전근대적 관습의 기반이 훼손된 반면 근대적 합리성이 그 자리를 대신할 만한 힘을 확보하지는 못한 사회적 행동준거의 혼돈 상태를 폭력으로 땜질하던 군사독재가 사라진다. 게다가 1980년대에 어렵사리 형성되던 비판적 사회의식의 교두보조차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여기에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개개인의 욕망은 소비자본주의의 전면화와 맞물리며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상대방의 일상이 어떤 준거에 기초하는지 짐막하기 어려울 때, 가령 멀쩡하게 합리적 언어로 따져들다가도 언제 관습의 방패 뒤로 숨어버릴지 알 수 없거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전망 뒤편에 더 안락한 삶을 향한 비릿한 욕망이 숨겨져 있지나 않은지 의심스러울 때, 세상은 소통할 엄두가 안 나는 공포 그 자체다. 심지어 자신의 내면조차 그런 세상을 반영한다면, 그 또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괴물일 뿐이다. 침묵과 눈물은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렇다면 명제와 장미의 세번째 결혼은 다시 침묵과 눈물로 물러서지 않고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게다. 그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들만의 역사, 시간의 두께가 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공통 기반이란 함께 겪어낸 시간,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뒤집어 말해 삶의 시간 속에서 차근차근 쌓이며 무르익기를 기다리지 못한다면, 남는 건 침묵과 눈물의 상처뿐이다.

불통을 상징하는 소통의 도구

드라마는 굵직한 시사적 사건들이 배경을 이루면서 시간의 흐름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렬하게 시간의 흐름을 내비치는 건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휴대폰의 변화다. 묵직한 무전기 스타일부터 펼치면 얼굴의 절반을 덮는 폴더형을 거쳐,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앙증맞은 폴더형가지 다양한 휴대폰이 등장한다. 하지만 휴대폰은 단지 현실감을 위한 소품만은 아니다. 연결이 되지 않거나, 만지작거리기만 하다 말거나, 통화가 돼도 서로의 마음을 짐짓 숨긴 채 의례적인 안부인사만 건네고 마는 ‘볼퉁’의 상징이다.

이혼한 명제와 장미를 다시 이어주는 결정적 매개는, 지우개로 지워가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손글씨 편지, 축하전보와 전신환, 스케치북에 연필로 데생한 수십 장의 초상화 같은 ‘올드’한 것들이다.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온라인입금, 폰카로 찍은 사진이 이들을 대신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까.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것들은 단지 ‘동화 같은’ 분위기 연출을 위한 소품이 아니다. 현실에서야말로 관계의 깊이는 시간의 두께에 비례한다.

발표지면 시사인, 2013.4.
단행본수록 미수록
대상 동화처럼,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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