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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가쟁점] ‘정답’을 찾지 말고 ‘의견’을 구하라
작성자 똥개

북에디터의 게시판에는 간혹 얼핏 사소해 보이는 편집상의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이 올라온다. 가령 이 지면에서 다룬 바 있는 “판권면에 퇴사한 편집자의 이름을 넣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제5장 <판권면의 딜레마>]로부터 “무선철 제책에서 면지를 넣는 것이 꼭 필요한가” 등등 생각해 볼수록 재미있고 유익한 질문들이 속출한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질문이 가령 "<황당해 하다>로 띄어 써야 하는가 아니면 <황당해하다>로 붙여 써야 하는가"와 같은 종류의 질문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이겠지만, 다른 편집자들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태도와 “분명한 정답이 틀림없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아는 분은 가르쳐 달라”는 태도이다. 가령 “어느 제목이 좋은가”를 묻는 질문은 틀림없이 전자에 해당하는 질문일 것이다. “판권면을 어떻게 꾸미는 것이 좋은가” 따위의 질문도 당연히 전자에 속하는 질문이지만, 뜻밖에도 후자의 태도로 접근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을 정도는 마주칠 수 있다. 아예 “어떻게 하는 것이 원칙인가”를 대놓고 묻는 이들도 있다. 물론 나는 그들 모두가 ‘원칙대로’만을 고집할 정도로 꼭 막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의로 보자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겠지만 그래도 원칙이 무엇인지는 아는 것과 원칙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처리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이런 종류의 문제에 ‘원칙’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좀 황당하게 여겨진다.

예컨대 표지와 내지 사이에 면지를 끼워 넣는 것은 ‘원칙’이 아니다. 양장본에서라면 당연히 분명한 기능적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원칙이고 자시고를 따질 문제가 전혀 아니며, 무선철에서라면 이제 와서는 함부로 거스르기가 상당히 어려워진 ‘관행’일 따름이다. 이럴 경우에 나는 ‘왜’ 그러한 관행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거스를 경우에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지를 설명하는 편이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과감하게 관행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내린다고 해서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그런 ‘원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이렇게 설명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그 문제가 왜 ‘원칙’의 문제가 아닌지를 어렵지 않게 납득하는 편이다.

하지만 ‘띄어쓰기’의 문제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언어 표현에 관한 영역으로 들어오면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분명하게 정답이 존재하리라는 굳건한 믿음 앞에서, 이 문제 역시도 앞서의 다른 문제들과 다름없이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의견의 가능성과 그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기를 권해도, “그러니까 어느 쪽이 옳다는 말인가”만을 채근하는 요령부득의 반문이 되돌아오기 일쑤이다. 심지어 장황한 설명으로 ‘잘난 척’하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정답’만 가르쳐 달라는 폭언을 들은 일도 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이 사람들에게 ‘한국어’는 자신이 호흡하고 있는 ‘살아 있는’ 현실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의 ‘받아쓰기’에서부터 그 살벌하다는 대학 입학시험 때까지 줄기차게 ‘정답 맞추기’를 해야 했던 ‘암기 과목’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어느 나라 말에든 일정한 규범은 존재한다. 만일 그러한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진 표현이 아니라면 이미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언어 행위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정상적인’ 한국어 화자라면 규범에서 벗어난 말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글자를 읽어도 뜻을 도무지 알 수 없거나 대략의 뜻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표현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여 글을 읽어나가는 흐름을 방해하거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의미를 오해할 여지가 있는 등의 문장은 누군가가 굳이 ‘틀렸다’거나 ‘잘못됐다’고 지적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읽히는지 모국어에 대한 자신의 언어 직관으로 판단을 내리기가 곤란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한국어 문법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규범이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규범적인 ‘정답’이 있는 문제들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직관으로 알 수 있으며 거꾸로 직관으로 판단하기 곤란한 문제들은 따로 배우고 말고 할 ‘정답’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이다.

물론 성장 배경이나 교육 정도 등에 따라서 사람마다 언어 직관은 얼마든지 서로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아주 어색한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래서 편집자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언어 직관이 아니라 그 책을 읽을 것으로 예상되는 독자들이 대체로 공유하고 있을 언어 직관에 준거를 두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해야만 하며, 그것이 편집자들의 직업적 전문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때 ‘사전’은 매우 중요한 참고 수단이 된다. 사전 편찬자들이 보기에 대체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여겨지는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전 편찬자들의 ‘의견’일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띄어쓰기에 무슨 대단히 심오한 원칙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장 속의 단어는 띄어 쓰라’는 맞춤법 규정조차도 한국어에서 단어를 정의할 방법이 막연하다는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띄어쓰기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단어’를 가장 그럴듯하게 정의하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단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어이다”라는 식의 순환적인 방법뿐이다. 그러니 예컨대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한 노력이란 ‘띄어쓰기 사전’ 따위를 달달 외우는 식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자신의 언어 직관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언어 직관에 근접하도록 훈련시키는 길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언어 규범의 문제도 의연히 ‘의견’을 물어야 할 문제이지 ‘정답’을 조를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집자들이 언어 규범에 매우 소모적으로 매달리느라 정작 꼼꼼이 챙겨야 할 내용상의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무조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오랜 세월 동안 주입당해 왔기 때문이다. ‘규범적 원칙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는 근거는 사실은 ‘지켜야 하니까 지켜야 한다’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규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이 아니다.

외국어 학습조차도 모국어 습득 모델을 좇아 문법 학습과 단어 암기 방식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소통 체험의 축적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화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정작 몇 십 년 동안 사용해 온 모국어를 새삼스럽게 외국어 대하듯이 ‘정답 맞추기’를 하려 드는 것은 포복절도할 코미디이다.

발표지면 송인소식 2004.7.5.
단행본수록 출판생태계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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