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팬덤’이라는 문화 현상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보기 전까지, 나는 ‘팬덤’이라는 말을 그저 ‘팬’의 집합명사 정도의 의미로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꽤 오래전부터 가수 심수봉 씨의 팬이었으며, 영화감독 장진 씨의 팬이기도 했고, 문필가 고종석 씨의 팬이었다.(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며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그분들의 팬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적잖이 마주치곤 하는데, 나를 포함해 이렇게 나와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을 총체적으로 아울러 일컬을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심수봉이나 장진, 고종석의 팬이라고 명료하게 의식하는 나는 당연히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심수봉 팬덤이나 장진 팬덤 혹은 고종석 팬덤의 (적어도 잠재적인) 일원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내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중매체가 출현한 이래 대중 앞에 제 이름을 내거는 이들 뒤에는 많건 적건 언제나 ‘팬’이 생겨났지만, 그것이 곧바로 ‘팬덤’의 형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네이버 백과사전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팬덤’의 시원을, 1980년대 초 조용필의 ‘오빠부대’라고 단호하게 지목한다. 다시 말해 백과사전(또는 이 백과사전이 참고한 대중문화론)의 저자가 부주의하게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1970년대 초의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걸출한 스타들의 명성에 전설처럼 따라붙곤 하는 ‘극성팬’들의 일화는 어떤 이유에서든 ‘팬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내게는 이런 입론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정밀하게 따져볼 만한 깜냥이 없지만 적어도 일말의 타당성을 부인하기 어렵다면, 이 지면에서 내게 설명의 과제로 주어진 ‘팬덤’이란 이미 (그저 스스로를 ‘팬’으로 의식하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아우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적극적 실천 행위를 수반하는 구체적인 집단(또는 그 집단의 문화적 실천)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리잡았음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에둘러 말하자면, 나 말고도 고종석 씨의 ‘팬’은 꽤 많겠지만 그들이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지는 또렷하지 않은 데 반해(나아가 고종석 씨의 ‘팬’들이 그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집단주의적인 사유의 결에 이끌린 것이라면 ‘고종석의 팬덤’이란 거의 형용모순이다!), 흔히 고종석 씨와 엇비슷하게 포개지는 ‘고정 팬’을 가진 것으로 여겨질 법한 강준만 씨의 경우에는 일종의 ‘팬덤’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징후가 좀더 분명하게 포착된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팬덤’이란 단순히 ‘취향’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다. 적어도 ‘팬’이라고 말할 때의 ‘취향’은 반드시 그것을 내용으로 담은 문화상품을 적극적으로 ‘소비’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가령 심수봉 씨의 노래를 들을 때 정서적 포만감이 확대되긴 해도 콘서트는커녕 수많은 그의 음반 가운데 단 한 장에만 내 주머니를 열었을 뿐인 내가 그의 ‘팬’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척 민망한 일이며, 장진 씨가 만든 영화가 나오면 단지 ‘장진’이라는 이름만 보고도 개봉관으로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나는 비로소 그의 ‘팬’이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고종석 씨의 책을 거의 한 권도 빼놓지 않고 거의 다 읽어치웠으며 그의 신간을 한번 손에 들면 다음날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다 읽을 때까지 놓지 못하고 밤을 새고는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개인적인 안면을 핑계삼아 안부인사를 겸한 ‘팬레터’라도 날려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그의 매우 ‘열성적인 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조차도 ‘팬덤’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가수나 작곡가의 음반이나 콘서트, 배우나 연출자의 영화, 문필가의 책을 직접적으로 구매하는 행위만으로는 (‘팬’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팬덤’의 일원이라고 하기에 모자라다. 바로 그 점이 예컨대 남진이나 나훈아의 콘서트(당시에는 ‘리사이틀’이라 불리던)를 극성스럽게 쫓아다니던 팬클럽과 ‘오빠부대’의 신화를 남긴 조용필의 팬덤을 가르는(그것을 가르는 입론이 타당하다면) 기준일 것이다.
달리 설명해 보자. 가령 내가 장진 감독의 팬이라는 사실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계기란, 또는 다른 누군가가 장진 감독의 팬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는 계기란, 작위적이든 우연히든 직설적인 언표로 매개된 직접적 대화 말고는 없다. 내가 누군가의 ‘팬’이라고 내 입으로 털어놓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예컨대 빅뱅의 ‘팬덤’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포섭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요컨대 ‘팬덤’은 단순히 열광의 대상이 되는 문화상품을 직접적으로 구매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문화상품을 ‘팬덤’을 상징하는 표지로서 소비하는 문화적 실천을 통해 구현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팬덤’은 대중문화산업이 철저하게 소비자본주의의 자장 안으로 포섭되어 자본이 (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제공하는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외에 문화 향유의 다른 수단이 박탈된 뒤에야 생겨난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팬덤’으로서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사람의 일상 구석구석까지를 제 영토로 확보한다. 바꿔 말하면 ‘팬덤’의 일원은 기꺼이 자신의 일상 구석구석을 특정한 열광의 대상을 매개로 재구성한다. 물론 이때 그 모든 것 역시 또다른 문화상품들이다. ‘팬덤’이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주관 속에서 충분히 자발적일 때조차도 동시에 철저하게 적극적인 ‘마케팅’의 산물이다. 물론 그렇다고 ‘팬덤’의 모든 것이 마케팅에 의해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때로 우연적 계기들에 의해 촉발되는 현상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마케팅에 의해 통제되거나 적어도 재규정된다.
이 점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적어도 그 잠재적 규모에서 대한민국 최대의 ‘팬덤’이라 할 수 있는 ‘붉은 악마’이다. 이 ‘팬덤’의 직접적인 열광 대상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며 직접적으로 구매되는 문화상품이라고 해봐야 기실 축구경기의 입장권뿐이지만, 주지하다시피 이 ‘팬덤’이 유지되기 위해 소비되는 파생적 문화상품의 목록과 규모는 그 몇 백 배, 아니 몇 천 배는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문화적 ‘표지’로서 작동한다. 즉 일상의 차원에서부터 그러한 파생상품의 소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그러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명료하게 구별해 낸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축구장 관람석이나 또는 축구경기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던 광장, 또는 텔레비전 수상기나 하다못해 라디오로 축구경기 실황을 전해들을 수 있는 공간 밖에서도, 그러니까 실제로 벌어지는 축구경기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도 어렵지 않게 “대-한민국-”의 환호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목격담에 의하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끼리의 축구경기의 관람석에서조차 기실 그 경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대~한민국~”의 함성이 이어졌다고 한다. ‘붉은 악마’라는 ‘팬덤’이 단순히 축구 팬 또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팬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들이 즐긴 것은 ‘축구’가 아니라 ‘팬덤’ 그 자체였던 것은 아닐까.
집단 정체성, 내가 나를 의식하는 하나의 방식
연예인들의 ‘팬덤’, 심지어 정치인들의 ‘팬덤’이라고 해도 ‘붉은 악마’의 경우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가령 조용필 ‘오빠부대’의 일원이 되는 가장 원초적인 계기는 대개 “그저 조용필의 노래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오빠부대’의 일원으로 계속 유지시켜주는 동력은 더이상 조용필이라는 가수 또는 그의 노래가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 대한 열광을 표현하는 일상적 문화 행위들 그 자체, 즉 ‘팬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현상을 가리켜 비로소 ‘팬덤’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오빠부대’가 소비하는 것은 더이상 조용필(의 노래)만이 아니라 실은 ‘오빠부대’라는 팬덤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소외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양상을 모든 종류의 ‘중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지만, 이내 술이 술을 마시고, 끝내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알콜중독에 관한 그럴듯한 속설을 떠올려 보자. ‘술이 술을 마시는’ 단계를 ‘팬덤’의 형성에 비유할 수 있음직하다. ‘붉은 악마’ 버전으로 바꿔 말하자면, ‘사람이 축구를 응원하다가, 응원이 응원을 응원하게 되고’ 만 것이다.(‘술이 사람을 마셔버리는’ 마지막 단계까지는 차마 언급하지 않으련다. 2002년 당시 어느 인권단체가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는 논평을 냈다가 접속 폭주로 사이트가 다운되고 후원 철회가 이어지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교휸을 떠올리자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윤리적(또는 정치적) 판단이 아니다. 가령 술이 사람을 마실 때까지 술을 탐닉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식의 질문은 이 글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차라리 현진건의 인상적인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를 떠올려보는 것쯤에 비유해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기꺼이 “대-한민국-”의 환호에 동참하고, ‘오빠부대’의 물결에 기꺼이 휩쓸리고, 심지어 특정 대상에 열광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것으로 모자라 (대개는 그의 잠재적 경쟁자로 설정된) 특정 대상에 노골적인 적의를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하는가일 것이다. 물론 가장 단순한 대답은,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일 게다. ‘붉은 악마’라는 문화현상에 눈살을 찌푸린 이들이 가장 많이 마주쳤던 당혹스러운 반론도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다. “그냥 축구가 좋아서 축구를 즐긴다는데, 그저 취향일 뿐 아닌가.” 또는 조용필의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걸 좀 유난스럽게 즐기겠다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으며, 빅뱅이 무조건 좋다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냐는 것이다. 하기는 투기 의혹을 받은 고위 공직자 후보가 “난 그저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말을 해명이랍시고 내놓았다는 세상이다.
오해 없었으면 한다. 나는 타인의 취향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서 서두에서 어쩌면 뻔하디뻔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장황할 정도로 길게 늘어놓은 것이다. 다시 되짚자면 ‘팬’과 ‘팬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요컨대 나는 단순히 누가 누구(혹은 무엇)의 ‘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라면 거기에 무슨 심오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설령 그런 게 있다손쳐도 어설프게 프로이트 흉내를 내며 ‘해부’를 시도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가령 누군가가 내게 “네가 심수봉을 좋아하는 건, 아마 이러저러한 이유에서일 거야.”라는 말을 술자리 안주거리 잡담이 아니라 진지한 말투로 건네온다면,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아마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가령 걸핏하면 폭음으로 이어지는 내 무절제한 음주습관에 관해 “요즘 그런 사람들 많은데, 꼭 네 경우를 꼬집어 말하는 건 아니지만, 도대체 왜들 그렇게 마셔대는 걸까?”라고 말문을 열면서 그 사회문화적 배경을 살피려 한다면, 귀를 열어 경청하려 할 것이다.
다시 ‘붉은 악마’로 돌아가보자. 나는 태극기가 거리를 뒤덮고 국호가 응원구호로 연호되는 상황을 기꺼이 즐겼던 사람들이 모두 대단한 ‘애국자’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열광의 이면에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정치적 ‘애국주의’가 작동한다(또는 그것을 매개로 재생산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입만 열면 ‘축구 타령’을 해서 나를 몹시도 불편하게 했던 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애국적 열정’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기표는 ‘대한민국’이라는 실재하는 국민국가와는 거의 무관하다. 굳이 그 기의를 지목하자면 차라리 “대-한민국-”이라는 기표 그 자체일 것이다. 나아가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라는 무시무시한(?) 구호를 가슴팍에 보란듯이 새겨넣은 티셔츠가 불티나듯 팔렸을 때, 그것은 그 문장의 의미와는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사건이었다. 거기에 어떤 문구가 씌어 있었어도 그 셔츠를 입는 그 어느 누구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티셔츠가 ‘붉은 악마’의 상징이었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 ‘팬덤’을 통해 소비된 것은 축구도, 국가대표 축구팀도, 심지어 ‘애국적 열정’도, 또는 ‘붉은 색’이라는 상징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소속감’이었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을 매개로 확인되는 ‘일체감’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팬덤’의 배후에는 소속감이나 일체감에 대한 ‘결핍’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일반화가 가능한 명제일까. 가령 조용필 콘서트에서 “오빠~!”라는 함성이 터져나올 때, 그것이 말 그대로 ‘조용필 오빠’를 부르는 호칭이었을까. ‘오빠부대’의 주축이 대개 나이어린 소녀들이었기에 이런 별칭이 생기기는 했겠지만, 더러는 남성도 있고 또는 따지고 보면 ‘누나’뻘이 되는 이들도 있었을 것것이고 그들도 때로는 “오빠-”의 함성에 (조금은 장난스럽게라도) 제 목소리를 보태는 것이 적어도 일상적 상황에서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만큼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열광의 대상은 그저 매개물일 뿐이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집단적 제의(祭儀)이기 때문이다. 되풀이 강조하자면, 그가 즐기는 것은 조용필의 노래가 아니라 자신이 조용필의 ‘팬덤’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비슷한 일은 종교 현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러 진지한 신앙인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종교 활동은 본원적인 의미의 ‘신앙’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때 종교를 매개로 한 특정한 문화적 실천들은 그저 그 사람이 어떤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확인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실은 바로 그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것이 그러한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특히나 한 개인의 정체성을 곧잘 그가 속한 집단으로 환원시키곤 하는 한국 사회에서라면, 이것은 한편으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각 종교 단체에서 주장하는 교인 수를 합산하면 전체 인구의 두 배가 넘는다는 우스개가 나돌 만큼 한국 사회에 ‘종교적 열정’이 넘쳐나는 것과 ‘팬덤’ 현상의 만연은 과연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일까.
소외를 넘어서
흥미로운 점 하나는, 일부 ‘스포츠’ 영역을 제외하면 성인 남성들이 ‘팬덤’ 현상의 주축이 되는 사레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팬덤’들은 주로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여성에게서 더 쉽게 나타난다. 텔레비전에 매체 주도권을 넘겨준 라디오 매체에서도 일찍이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라디오의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들은 청취자들이 참여하는 ‘양방향성’에 기반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그렇게 청취자들의 ‘엽서’(요즘은 전화나 문자, 인터넷 게시판 참여)를 주요 소재로 활용하며 두터운 고정 청취층을 확보한 프로그램들은 전통적으로 오전 10시대의 주부 대상 프로그램과 심야 시간대의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이었다. 과연 우연일까.
거꾸로 질문해 보자. 과연 어떤 집단적 정체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인과 개인이 상호 존중 속에서 연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회에서라면, ‘팬덤’이 쉽사리 나타날 수 있을까. ‘팬덤’을 자본의 마케팅이 호출해낸 것은 분명하지만, 누구든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주체일 수 있는 문화적 토양에서라면 ‘팬덤’의 이름으로 불러낸다고 속없이 불려나갈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럴 것 같다. 따라서 ‘팬덤’의 생명력도 꾸준할 것 같다. 출판산업도 시장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만큼, 이 도저한 욕망을 어떻게든 문화상품의 소비로 소구해내며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꾀하는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과도한 음주는 물론 건강에 해롭지만, ‘술 권하는 사회’가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한, 술 소비는 결코 줄지 않을 것이며 그에 상응하여 주류 회사는 물론 동네 주점에 이르기까지 손님을 꾀기 위한 마케팅에 열을 올릴 것이다. 하지만 두말할 나위 없는 ‘중독성 유해 물질’을 더 팔기 위해 애쓴다고 또는 그런 소비에 편승한 파생상품(대리운전, 숙취해소 음료 등등)을 개발하려 머리를 쥐어짠다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기왕의 팬덤을 활용하거나 나아가 새로운 팬덤을 창출해내는 데 효과적인 전략을 모색하는 일도, 날로 위축되어 가는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한국 출판의 엄연한 당면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술 팔아(혹은 술에 기대) 먹고사느라 ‘술 권하는 사회’에 눈을 감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팬덤’ 팔아(혹은 팬덤에 기대) 먹고사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해서 ‘팬덤 권하는 사회’에까지 눈을 감아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팬덤’이 출판이 도외시할 수 없는 시장임에 분명하다 해도, 그와 동시에 ‘팬덤 권하는 사회’는 출판을 통해 넘어서야 할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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