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다 보니, 출판사에 취업하겠다는 이들을 가장 많이 만나긴 하지만, 드물지 않게 출판사를 ‘창업’해 보겠다는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내게 찾아오는 사람들만 유독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운데 출판으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는 그저 좋은 책을 만드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지향을 앞에 내세운다. 그렇다고 그들이 뜻있는 일을 위해서 이슬만 먹고 살 각오를 했다는 뜻도 아닐 터이고, 나아가 손해를 감수할 만큼 대단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 좋게 봐야, 뜻있는 일도 하면서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고 먹고살 만큼은 돈을 벌고는 싶다는 뜻일 게다. 세상에! 이렇게 순진할 수가. 유감스럽게도 출판은 그런 한가한(?) 일이 못 된다.
한 개인의 야무진 꿈은 어떻게 해서든 말려보거나,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싸게 ‘수업료’를 지불하는 선에서 하루라도 빨리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하는 것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지만, 출판 ‘창업’의 주체가 한 개인이 아니라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라도 출판은 철저하게 공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마냥 말릴 일일 수만은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모인 사람들이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위와 같은 ‘순진한’ 발상으로는 결코 출판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물론 이익이 나면 더 좋겠지만) 투입한 비용만큼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게 마련이고, 그에 대처하는 ‘순진하지 않은’ 자세는 결국 둘 중의 하나다. 한 개인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일이라 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집단을 통해 개인의 부담을 분산시키면서 손해를 감수하든가, 그마저 쉽지 않다면 (오히려 개인에게라면 지극히 자명한 귀결이겠지만)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또는 어떻게든 보전해야 할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어도 얼마간은 본디 추구하려 했던 의미의 훼손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가정을 한 가지 해보자. 만일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보자는 좋은 뜻을 모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뜻은 좋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손해가 나서는 안 된다’는 순진한 발상(적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할 수는 없다는 일견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에서 뜻을 모은 것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얼마간은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좋은 일이라 해도 과연 얼마만큼의 손해가 감수할 만한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고, 아무리 손해를 줄이기 위해 얼마간은 의미 실현을 유보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어디까지가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인지도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애당초 그런 부분까지 정교하게 합의된 사람들끼리만 뜻을 모은다면 그 힘은 매우 미약했을 터이다.) 요컨대 개인이라면 대신 살아줄 수 없는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그때그때의 실존적 선택에 지나지 않을 문제가, 근본적으로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는 집단 내부의 이견들 사이에서 일정한 집단의사를 형성해내야 하는 정치적 문제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순수하게 출판‘만’을 위해 뜻을 모은 것이 아니라 출판을 포함하여 훨씬 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모였고, 출판은 단지 더 근본적인 목적을 위한 일종의 ‘수단’일 뿐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불가피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문제조차도 언제든 ‘출판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거리들이 널린 마당에 지나치게 소모적인 탁상공론’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책임’의 이상은 훌륭하지만, 기실 정반대로 ‘공동무책임’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라말출판사의 사례는, 실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또는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갈등이 단지 극단적으로 불거져나온 데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순수하게 출판 활동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공 기금을 종잣돈 삼아 일종의 수단으로서 출판에 접근하는 모든 사회적 노력들에서 크든작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사회적 물의로 폭발하느냐 내부에서 (대개는 일시적일망정) 봉합되느냐일 뿐이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라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만족스럽지는 못할망정) 더 나은 모습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달았는지가 가장 아쉬운 대목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세심하게 복기하며 잘잘못을 가리고 앞으로의 교훈을 얻는 일은 외부의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떠들 일도 아니고 내게는 그럴만한 깜냥도 없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제기하려는 주제는 어디서든 있을 수 있는 갈등의 바람직한 대처 방안이 아니라, 가령 왜 그런 갈등이 어디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문제인지 또는 그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꼭 필요한 갈등인지 나아가 최소한 관리가능한 수준에서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은 없을지와 같은 좀더 ‘보편적인’ 지점에 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특정한 공공적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조직이 그 목적을 실현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출판사를 운영하려는 시도를 한사코 말려 왔다. 대신 경영 이념이 건강하고 해당 분야에서 꾸준히 실적을 쌓아온 출판사와 제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하곤 했다. 출판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고려하자면, 나의 이런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내용을 생산하는 데 더 집중해야 할 역량을 경험도 없는 출판사 경영에 분산시키는 것이 과연 출판의 다양성을 위해 바람직한 일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최소한 손해는 나지 않을 시장성이 잠재된 내용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비전이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출판사는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시장성이 불투명한 비전으로 (그것도 소중한 공공 자금으로)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하겠다는 뜻이거나, 더러 마주치게 되는 ‘출판사와 나눠야 할 이익’을 아까워하는 태도라 해도 그것이 직접 경영에 나선다면 고스란히(또는 그 이상으로) 출판 경영을 위해 지불해야만 할 비용이라는 준엄한 사실을 간과한 소치임 뿐이며 결국 ‘출판의 전문성’을 깡그리 무시한 무모함이라고 냉정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전국국어교사모임 같은 단체는 출판사를 운영하면 안 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조건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조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윗문단에 다 제시되어 있다. 일정한 규모의 기금을 출연하여 상대적으로 독립된 형태를 취하고 전문성에 기반한 운영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게 기존의 출판사와 제휴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반문한다면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경영진에 대한 인사권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대다수의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손해나 의미의 훼손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 기존 출판사와 제휴한다 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제휴를 철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겠지만,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출판사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한 경영적 판단이 결코 운영 주체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철저하게 전문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과 비전문가가 경영 책임을 맡는 것은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나라말출판사의 사례를 염두에 두자면,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더 있기는 하다. 파산 지경에 이르러 ‘청산’ 절차에 들어간 게 아닌 한, ‘매각’이라는 발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운영 능력이나 의사가 없다면 손을 떼면 그만이지 회사를 팔아넘기거나 문닫을 권리는 없다.)
출판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출판의 본질에 대한 배반이다.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을 다른 어떤 사회적 목적(그 목적이 아무리 정의롭고 훌륭한 일일지라도)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도 실은 (대다수의 통념과 달리) 꽤나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출판을 시장에만 내팽개쳐두고 있는 현재의 출판 환경에서라면 당연히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지만, 시장을 넘어선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해도 과연 ‘의미 있는’ 책이란 ‘누구에게’ 의미가 잇다는 뜻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방법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개인이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한 출판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심하게 말해 그건 어쩌면 출판이 아니라 마스터베이션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훌륭한 뜻으로 모인 집단이라 해서 출판의 본질이 달라질까. 개인이건 집단이건 ‘책을 통해 내가(또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한다면 (출판사 경영이 아니라) 저자로서 활동하면 된다. 출판이란 내게(또는 ‘우리에게’라 할지라도)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독자들에게 어떤 책이 의미 있을지를 끈질기게 질문하며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게 의미 있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럴 때만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다.
주제넘게 덧붙이자면,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고 싶은 선생님들의 뜻도 숭고하고, 그래서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좋은 책을 손수 만들어내시겠다는 뜻도 존경스럽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내용이 정말로 종이에 잉크를 묻혀 내놓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 일로 밥을 먹는 출판 전문가들에게 맡겨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서운해하실 건 없다. 선생님들이 좋은 책을 골라 읽히시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나아가 더 좋은 책을 손수 만드시려는 노력까지 이어진다면, 전문가의 판단인들 그 도저한 지향을 감히 거스르겠는가. 비단 선생님들만이 아니라, 비슷한 취지에서 출판에 뛰어들기 위해 조직적인 모색을 꾀하는 모든 분들께 드리는 진심어린 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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