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판사가 신입 편집자를 채용하면서 합격 통보 하루만에 채용 취소를 통보한 일로 출판계 안팎에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이 글이 새삼스럽게 이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려 왈가왈부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미 당사자 사이에 원만하게 합의가 이루어져 공개적인 사과로 일단락된 문제를 재론하는 것은, 뜻하지 않은 일로 마음고생을 치른 당사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이다. 다만, 이번 사례가 출판산업의 구조에 엄중하게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에 진지한 고민의 계기를 마련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가령 하루만에 뒤집힐 수도 있는 어설픈 판단으로 채용을 결정한 것이 경솔하고 미숙했다고 지적하는 건 그 자체로 옳다. 순수하게 논리적으로는 ‘불합격 사유’가 정당한지도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설령 그 사유가 명백하게 부당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미숙하게도 혹은 뻔뻔하게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한 사회적인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까. 아마도 많은 출판사에서 ‘그러니까 애초에 잘 살펴보지 그랬어’라거나 ‘이런 망신 안 당하려면 좀더 잘 살펴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지’쯤의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끝나버린다면, 매우 역설적이게도 더욱 광범위하고 정교한 ‘사찰’(?)을 부추기는 셈이 된다.
사실 고작 두어 장의 자기소개서와 몇십 분의 면접만으로 편집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늠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라는 그럴듯한 방패막이를 세워놓고는, 누구라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투명하면서도 정교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미흡한 것이 현재 한국 출판산업의 맨얼굴이다. 문제의 본질은, 예컨대 ‘트위터가 공개적 활동인가 사생활인가’가 아니라, 왜 (우연히든 일부러든) 트위터만 들여다봤어도 알 수 있는 것을 전형 과정에서 알아차리지 못했는가이며, 그렇다면 트위터를 본 뒤의 판단은 도대체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이다. 요컨대 막연한 ‘감’은 결코 ‘주관적 판단’이 아니다. 편집자의 노동력이란 전인격적이며 종합적이고 총체적이라는 특수성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 특수성에 걸맞는 다양한 평가 도구와 전형 기법을 개발하고 공유해야만 한다는 과제가 남겨지는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이번 사례에서 가장 큰 비난이 쏟아진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과연 한 개인의 고유한 ‘성격’이 ‘해고 사유’가 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예민한 질문이다. 물론 건강한 인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또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단순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집자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를 직시하지 않고서는 이번 사례와 유사한 일은 언제든 어느 출판사에서든 재연될 수밖에 없으며, 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이상’과 ‘현실’의 문제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노사 대립으로 나타날 때조차도 ‘자본’과 ‘노동’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가령 어느 작가(또는 화가나 조각가라도 좋다)가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방대한 작업량이 예상되는 대작을 구상하면서, 그 구상을 함께 구체화할 다른 작가와 ‘공동 창작’을 시도한다고 하자. 당연히 그동안의 작품 경향 등을 참고해서 신중하게 제안을 하겠지만, 아무리 세심하게 살펴도 놓치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이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불거질 수도 있다. 이때 그 문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기량의 문제가 아니라면, 쉽게 말해 생각했던 만큼 글 솜씨가 신통치 못하더라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공동 작업’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그럴 경우 그것을 ‘부당 해고’라고 볼 수 있는가. 일반적인 노동권의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당연히 그렇게 볼 수 있고 그렇게 봐야만 한다. 적어도 먼저 자신의 구상을 제안한 작가가 작업 방향에 주도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면, 숱한 ‘특수고용’에서 드러나듯 ‘고용계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고용관계라는 본질을 부인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만일 글을 쓰는 일이 가시적인 결과로 드러나는 기량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면 작가란 그저 ‘글 쓰는 기술자’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글 솜씨가 훌륭하다’거나 ‘글 솜씨가 신통치 못하다’는 것은 또 무슨 재주로 가릴 것인가. 결국 ‘공동 창작’이란 각자가 가진 ‘고유성’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얼마나 조화롭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질 테고 나아가 완성도의 기준도 각자가 가진 고유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 결국 남는 문제는 서로가 가진 고유성이 전인격적인 신뢰 속에서 용인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가뿐이다. 상대방의 퍼스낼리티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뢰가 없다면 ‘공동 창작’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편집자는 작가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편집자는 자기가 맡은 책에 대해 책임질 뿐, 같은 회사의 동료와 ‘같은 책’을 함께 만드는 건 아니지 않냐고 이 비유의 부적절함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편집자는 작가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수 있지만, 편집자는 책으로 말할 수 없다. ‘잘 쓴 글’에는 작가의 고민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잘 만든 책’에서는 편집자의 고민과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잘 쓴 글’ 하나만 보고도 그 작가가 쓰게 될 글이 얼마나 완성도를 가질지 잠재성을 가늠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잘 만든 책’을 포트폴리오로 내세우는 편집자가 다른 책도 그렇게 잘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며느리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출판사를 ‘공동 창작’에 비유할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해, 편집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상품 개발자’이고, 작품의 ‘완성도’가 아니라 상품의 ‘생산성’으로 평가받는다. 문제는 편집자의 생산성을 계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벽돌공이 하루에 벽돌 300장을 찍을 수 있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일을 무리없이 해내는 한 그의 성격이나 사생활을 문제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이와 달리 편집자의 ‘생산성’은 오로지 ‘판매 실적’에 의해서만 가시화된다. 벽돌이 안 팔려 창고에 쌓여 있는 건 벽돌공의 책임이 아니지만, 애써 만든 책이 안 팔리고 있을 때 편집자가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점쟁이가 아닌 이상 책을 만들기 전에 얼마나 팔릴지 정확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 위험을 분산하지 않는다면 출판은 ‘도박’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사는 기능적으로 (자본이 노동력을 고용하는) ‘기업’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독립적인 고유성에 기반한 개인이 위험을 나누기 위한) ‘동업자조합’에 더 가깝다. 이때 어떤 사람에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는, 순전히 그가 가진 잠재적 위험도(생산성의 이면)가 다른 구성원들이 용인할 만한 수준인가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순간 ‘인권 침해’의 가능성이 언제든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딜레마다. 가령 이번 사례의 해결 과정에서 제시된 ‘노동조합’이라는 해법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하고 현 단계에서 상정할 수 있는 가장 전향적인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사업자’가 ‘노동자’의 성격을 트집잡는 게 ‘인권 침해’라면, 똑같은 문제를 ‘노동조합’이 제기한다고 해서 ‘인권 침해’가 아니게 되는가. 설령 아주 이상적으로 ‘노동조합’이 인사권을 전적으로 행사하는 상황이라도,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은 그저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일 따름이고 아마도 과연 그러한가를 다투기라도 할 양이면 그 과정에서 숱한 ‘인권 침해’가 벌어지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노동조합이 다수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해야 한다면, 심지어 비인간적인 직장내의 ‘왕따’조차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 누구로부터도 자신의 머릿속을 검열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나 생활 방식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건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상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편집 노동의 생산성이 그의 고유한 성격이나 생활 방식을 포함한 총체적인 인격에서 비롯된다는 준엄한 사실을 부인할 도리도 없다. 지금껏 이 딜레마가 심도있게 논의되지 못한 것은, 생산성 확보를 위해 인권이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안이함과 편집 노동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모든 고민을 ‘교묘한 물타기’로 치부하며 현실성 없는 구호만을 되뇌는 관성이 절묘하게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물론 좀더 깊은 논의가 진전돼야 하겠지만, 우선 시장 위험을 개별 출판사가 아닌 사회의 공공 영역이 감당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위험이 완화된 조건에서라면, 구성원에게 용인할 수 있는 신뢰의 수준이 한결 너그러워질 것이고 ‘인권 침해’의 소지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방안도 있다. ‘공동 창작’의 비유를 다시 끌어들이자면 ‘공동 창작’에 참여하는 길 말고는 작품 활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즉 출판사에 취업하는 것 말고는 편집자로서 책을 만들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구조를 타파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책으로만 말할 뿐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나 생활 방식을 어느 누구에게도 검열당하는 것을 거절하겠다는 편집자는, 굳이 출판사 조직을 통해 다른 편집자들과 위험을 나누는 대신 자신이 만든 책의 성과와 위험을 스스로 감당하게 하면 될 일이다. 실제로 고유성에 기반한 노동을 하는 숱한 직업 가운데 기업에 고용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은 편집자가 거의 유일하다. 역시 더 정교한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독립 편집자의 출판 활동을 공공적으로 지원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생산성에 대해 ‘고용주’가 아닌 ‘공공 지원 체계’에 오로지 결과물로서만 책임질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편집자와 ‘동업조합’을 구성하는 데 자발적으로 참여하든, 고집스럽게 독립적으로 활동하든,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 될 것이고, 자본이 굳이 출판산업에서 이익을 얻고 싶다면 출판사를 설립해 편집자를 ‘고용’할 것이 아니라 편집자들의 ‘조합’이나 독립 편집자에게 투자를 하고 배당을 요구하면 될 것이다.
성급한 결론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더 많은 방안을 떠올려봐도 ‘출판산업의 공공화’라는 대전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성싶지는 않다. 물론 이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더 많은 출판노동자들이 내가 이 글에서 던진 질문에 진지하게 응답하고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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