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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돋보기] ‘무책임한 책’은 퇴출해야
작성자 똥개

인문교양서 분야에서 꽤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어느 출판사의 번역서를 읽디가 “미국의 인구에서 다섯번째 부자는 다섯번째로 가난한 사람보다 소득이 12배나 된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십 종을 번역해낸 저명한 번역가의 책이라 충격이 더했다.

책 한 권에 담긴 수만 문장 중에 고작 한 문장의 오역을 놓고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번역가가 번역한 책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배반감이 컸다는 얘기다. 1차적으로는 부실한 번역에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겠지만, 실은 편집자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편집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저자와 역자를 보호하는 것일진대, 번역자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엄청난 오역을 출간 전에 잡아내지 못한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무책임이다.

대단히 전문적인 내용이어서 미처 챙기지 못했다면 차라리 이해하겠다. 나는 원문을 확인하지 않고도 오역의 원인을 너끈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영단어 ‘fifth’에는 ‘다섯번째’라는 뜻도 있지만 ‘5분의 1’이라는 뜻도 있다. 중학생 수준의 기초영문법에 나올 법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문제의 문장은 “상위 20% 인구의 소득이 하위 20%의 소득보다 12배 많다.”라는 뜻으로, 이른바 ‘소득 5분위 분배율’에 관한 서술이다. 그리 전문적이랄 것도 없는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수준의 경제학 개념이다. 어쩌다가 이런 엉터리 책이 버젓이 출간되는 사태가 일어났을까.

가령 ‘5분의 1’이 ‘5문의 1’이나 ‘5분 1’이라고 활자화되었다고 상상해보자. 무성의한 교열에 다소 불쾌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수십만 글자가 담긴 책이라면 ‘있을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5’자 대신 ‘4’자를 누르는 바람에 ‘4분의 1’로 오자가 났다고 해도, 정확한 서술은 아니지만 이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대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5문의 1’이나 ‘5분 1’과 같은 사소한(?) 실수는 ‘눈에 불을 켜고’ 잡아내려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는 ‘성실한’ 편집자들이라도, 아니 그런 편집자들일수록, 웬만해선 ‘4분의 1’과 같은 오자는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물며 ‘다섯번째’라는 터무니없는 오역에까지 시선이 닿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것이 출판 종사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어김없는 현실이다.

물론 책을 무성의하게 만드는 출판사와 편집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책’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물건을 책이랍시고 찍어내는 무책임한 출판사와 편집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내 상상력이 모자라서인지 ‘퇴출’ 이외에 다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뒤집어 말해, 책을 성의있게 만드는 편집자와 춢판사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 이전에 제 이름을 걸고 만들어내는 책에 책임을 지는 것은 기본적인 ‘상도의’의 문제이다.

출판 현장에서 이 자명한 이치가 망각되고 외면당한다면, 그 귀결은 어마어마한 ‘문화적 재앙’이다. 우리는 지금 ‘독자의 감소’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통해 그 재앙의 서막을 실감나게 확인하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 제발 정신 차리자!

[이 글의 내용에 “억지다”라는 논평을 한 이가 있었다. 내 지적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그냥 봐서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기에,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유로 ‘퇴출’까지 언급하는 것은 비약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기대가능성이 없는 일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한편 지당하신 말씀이다. 내가 이 글에서 지적한 바도 ‘오역’ 자체가 아니라 바로 ‘기대가능성’이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데도 기대가능성이 없다면, 결론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가 아니라 ‘기대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여야 한다.]

발표지면 한겨레 20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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