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칼럼  Publishing af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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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를 멈춰라! - 서울출판예비학교의 파행운영을 고발한다
작성자 똥개

개념없는 교육과정

나는 원고청탁이라면 혹 모를까 강의청탁은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않는 편이다. 강의료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단 몇 사람과의 만남이라도 내 의견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소통의 계기를 마련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첫 주에 개강한 서울출판예비학교 제6기 과정에 강의를 해줄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무슨 내용의 강의를 몇 시간이나 해야 하는지는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강의 일정이 잡히기 전에 무슨 의논이라도 있겠거니 했을 뿐이다. 그리고 개강 이틀 전에야 일방적으로 강의 시간표를 통보받고는 두 가지 사실에 경악했다.

어문규범 32시간?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서울북인스티튜트에서 재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출판실무 어문규칙’이 15시간(자기평가 3시간 포함하여 18시간)이고, 같은 내용으로 진행하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온라인 강의가 12시간 안팎이다. 시시콜콜한 규정해설까지 최대한 친절하게 진행해도 그 이상으로 강의할 내용은 없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야 32시간 아니라 320시간인들 다룰 내용이 없을까마는, 도대체 어문정책 전문연구자 양성기관도 아니고 불과 800시간 남짓한 출판인 양성 교육에 무슨 어문규범 강의가 32시간씩이나 필요하단 말인가.

물론 강의보다는 실습을 더 많이 시키라는 배려쯤으로 이해한다면 32시간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어문규범에 관한 내 강의를 들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강의 첫머리에 아예 “결과적으로 어문규범을 거스르는 교열사고는 편집자가 어문규범에 무지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못박아 전제한다. 즉 어문규범의 문제로 시야를 축소하고 나면 기실 별달리 ‘실습’할 내용이 없다. 굳이 실습을 하자면, 구체적인 텍스트를 놓고 총체적인 원고 교열을 수행하는 과정 안에 녹아들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아무려나 단지 그뿐이라면, 비록 강의 제목은 ‘어문규범’이라지만 내용적으로 ‘원고 교열’ 강의라고 이해하고 적절한 실습 과제를 부과하여 나름 알차게 시간을 활용하면 그만이려니 할 수도 있겠다. 제목과 내용이 딱 들어맞지 않는 강의가 어디 하나둘이란 말인가.(물론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는 강의 설계가 그만큼 부실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웬걸? 편집자 과정의 강의가 아니라, 편집자․디자이너․마케터 과정 통합강의란다. 물론 디자이너와 마케터들도 20시간쯤 원고 교열 연습을 해보는 게 나쁠 것은 없다. <기획회의> 제273호(2010.6.5.)에 실린 글에서도 썼듯이 출판산업 내의 전통적인 분업 구조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기도 하다. 다만, 800시간 남짓으로 제한되어 있는 교육 일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자면 그 시간에 디자인 실습 한 번이라도 더 해보고 마케팅 실습 한 번이라도 더 해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사실에 경악했던 건, 디자이너나 마케터들도 출판 종사자로서 어문규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넉넉잡아 8~12시간쯤의 특강이면 족할 내용을 32시간씩이나 강의하라는 황당한 요구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부차적이다. 나를 대뜸 긴장시킨 건 ‘그 인원을 수용할 강의실이 있는가’였다.

아니나다를까. 첫 강의를 하러 간 날, 56석의 출판인회의 강당에 70명 가까운 학생들이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이’ 바글바글 비좁게 끼여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는 말 그대로 ‘숨이 막혀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겨울이라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니 5분도 채 못 돼서 숨이 턱 막힐 수밖에! 하지만 땀냄새를 피할 길 없는 여름이라 해서 달랐을까.) 단발성 대중강연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닭장조차도 이 정도 밀집도라면 씀풍씀풍 알 낳아놓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판국인데,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도를 요구하는 지적 작업을 강의하라고?

그래도 눈빛을 반짝이는 학생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내가 할 도리를 다해 최대한 지적 자극을 던지기는 하겠지만, “뇌는 집에다 놓고 왔냐”고 짐짓 호통을 쳐가며 생각하기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강의 내용으로 미루어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강의가 아니라 고문에 가깝지 싶어 자꾸만 미안해지기만 하니, 아무래도 부실한 강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실습은 언감생심이다. 원고 교열 실습은 많아야 8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 단위에서 진행하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진다. 아쉬운 대로 20명 안팎이 최소한의 실습을 진행할 수 있는 한계선이다. 32시간을 무슨 내용으로 채워야 학생들에게 이 시간이 그래도 무의미하게 낭비되지 않을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구 수준은 대학원, 교육과정은 고등학교

앞서 밝혔듯, 미래의 출판환경을 고려할 때 편집자․디자이너․마케터 3과정 통합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라면 나는 누구보다도 공감하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이 터무니없는 교육과정이 그런 필요에 기초한 교육적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그랬다면, 어떤 내용이 얼마만큼의 비중으로 필요한지가 먼저 고려된 뒤에 그 교육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시간표가 도출되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다른 강의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강의 내용을 설계할 수 있도록 담당 강사와 사전 공유 작업이 전제되었어야 했다.(그랬다면 어문규범을 32시간이나 강의하는 대신 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내용을 제안할 수도 있었고, 또는 좀더 효과적으로 교육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분반을 하여 편집자, 편집자+디자이너, 편집자+마케터, 디자이너+마케터에게 필요한 내용을 나눠 입체적으로 설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두에게 공통되는 내용도 없지는 않겠지만 따로 공간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요구가 아닌가.) 한마디로 교육과정 편성에 아무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막을 알고 보면, 발단은 이렇다. 통합강의의 필요성은 교육적 목적(이 아주 없지야 않았겠으나 어디까지나 사후적으로 갖다붙인 ‘포장’의 혐의가 강하고)에서가 아니라 강사료 부담을 낮추려는 얄팍한 계산속에서, 무슨 내용이 얼마나 필요할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단 시간을 먼저 뽑아놓고, 거기에 두드려맞추기식으로 백화점에 상품 진열하듯 내용을 채워넣은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출판인에게 불필요한 강의가 어디 있겠는가. 내용의 중요도에 따른 비중은 고려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강의 공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리를 감행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학생들이야 불편하건 말건, 강의 내용이야 부실해지건 말건, 교육 효과야 있건 말건, 70명을 강의하건 30명을 강의하건 지불해야 할 강사료가 같을 바에야 한꺼번에 몰아넣을 수 있는 데까지 몰아야 한 푼이라도 아낄 것이 아닌가.

폭언인가? 그렇다면 6개월 800여 시간이라는 총 교육시간은 어떤 근거로 산출된 것인지 되짚어보자. 사실 닭장을 방불케 하는 무리수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현행 교육제도에서 고등학교가 주당 36시간 수업을 진행한다. 대학은 18시간이 기준이고, 대학원은 9시간이 보통이다. 설마하니 학력이 높아질수록 공부할 내용이 적어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스스로 공부할 시간이 많아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중학교 과정을 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를 둔 내 친구는 웬만한 학원에서는 새벽 2시까지 강의를 강행하더라는 끔찍한 현실에 도리질을 하며 “그럼 도대체 아이는 언제 공부를 하나요?”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한마디로 주당 35시간의 ‘강의’를 소화하라는 건, 명색 지식산업에 종사할 잠재적 지식인들을 고등학생쯤으로 여기지 않은 다음에야 불가능한 발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풍경도 그렇다. 일주일에 한두 번 나와 강의를 하는 강사들은 순진하게도 다음 강의까지의 기간만을 고려하여 과제를 부여할 것이고, 그것은 잠재적 지식인에게 걸맞는 집중도와 지적 긴장을 요구하는, 굳이 말하자면 대학원 수준의 내용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35시간의 강의가 쉴새없이 진행되는데, 언제 그 과제를 해결할 것인가. 그러니 영어 시간에 수학 숙제하고 수학 시간에 국어 숙제 하는 고등학교에서나 익숙하게 보았던 풍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재연되고 있다.

게다가 예컨대 교육과정을 마치면 곧바로 축구 선수로 뛰어야 할 사람들에게 공차는 연습까지는 몰라도 달리기 연습이라도 시켜야 옳지, 6개월을 강의실에 붙잡아놓고 800시간 넘게 축구 강의만 들으라는 게 온당한 일인가. 혹시 ‘선수’가 아닌 ‘축구 평론가’라도 양성하자는 건가. 가령 마케터가 정규 교과 시간에 서점에조차 못 나가보고 기껏해야 방과후 활동에 그쳐서야(심지어 과제 해결을 위해 조퇴를 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것을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설령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방과후에도 열심히 과제를 처리하려는 기특한 각오를 다졌다 한들, 저녁 강의 때문에 실습실을 전면 개방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집에 장비를 갖추지 못한 디자이너는 그 각오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아무리 ‘일 좀 할 만하면 손님 오고, 회의 들어가야 하고, 전화벨 울리고, 결국 교정지는 퇴근 시간 이후에나 본다’는 우스갯소리가 남 일 같지 않은 현실이라지만, 아직 취업도 안 된 예비편집자에게 ‘교정지 집에 싸들고 가는’ 것부터 가르쳐야겠는가.

적어도, 5년 전 처음 이 과정을 설계했을 때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편집자들이 넉넉잖은 급여에도 불구하고 출판교육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의기투합 속에 밤을 새워가며 토론을 거듭했던 것은, 고작 이런 엉터리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강의’는 100시간을 넘지 않았고 해를 거듭하면서 그 비중을 더 줄였다. 강의의 필요성이 줄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한 내용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교육과정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고민이 심화된 결과였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순전히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두 번쯤 돌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적 기간을 감안한 것이었고, 그 대부분은 선생의 도움 없이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할애되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강의가 줄어든 자리에 토론․세미나․워크숍 등을 도입하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더 풍성하게 부여되었지만, 정규 교과 시간의 대부분을 ‘축구 연습’에 할애하는 기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 학생들이 스스로 과제를 해결하며 실습을 수행하는 시간에 선생들은 뭘 했을까. 개별면답, 조별 집단면담을 통해 맞춤형 피드백을 수행했다. 출판 종사자는 축구 선수와 달리, 그 ‘고유성’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개인의 고유성에 기초한 정신적 성장의 과정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출판인 양성 교육이 아니다.(지금도 개별면담은 중요하게 강조된다고 들었다. 문제는 개별실습 시간이 사라진 나머지 강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면담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가뜩이나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강의의 집중도는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왜 강의를 하는지초자 선생에게도 학생에게도 해명이 안 되는 상황이다.)

이 기조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은, 어이없게도 출판 산업의 특성과 출판인 교육의 본질에는 관심도 없고 심지어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문외한이 ‘강의시간에 강의실에 학생들끼리만 내팽개쳐둔 채, 학생 몇 명을 강의실에서 불러내기까지 해서 잡담만 하다 퇴근하면서 강사료를 받아챙기는’ 파렴치범인 양 선생들을 몰아붙이면서부터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물론 비전문가가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강 건너 불구경’으로 방치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전문가’들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 살얼음판 같은 업계 환경에서 자기 회사 경영하는 것만으로 힘겨우셨을 분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발상에서 비롯된 온갖 악의적인 이간질에 솔깃하여 교육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심도 있는 고려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사실 확인조차 생략한 채 ‘뭔가 문제가 있으니 그러겠지 설마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겠느냐’는 식의 안이한 태도로 교육과정의 파행적 변질을 소극적으로나마 방조하신 분들은 반성하시기 바란다. 선생들에게 ‘교수’라고 이름만 그럴듯하게 붙여주면 교육기관의 격이 높아지는가. 행정직원이 명색 선생을 ‘양아치’ 취급 한다면 그건 그냥 ‘사설학원’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저급한!

심지어 자기 블로그에 교육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학생을 불러다가 심하게 면박을 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사설학원에서도 소비자의 불만에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무료로 교육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상식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수강료를 받고 정당한 항변권을 보장하라. 더구나 다른 직업도 아닌 명색 ‘출판인’ 양성 과정이다. 그 학생이 결국 출판사에 취업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무관하게, 가령 얼마전 한국출판인회의에서 ‘불온서적’과 관련하여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서 “너나 잘하세요!”라고 비웃지나 않았을까 심히 우려된다.

교육인가 수익사업인가

억하심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백 걸음을 양보해서 정규 교과 시간에는 ‘강의’만 해야 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단, 그렇다면 주당 35시간이라는 엄청난 강의 부담은 아무 의미가 없다. 대학원 수준의 주당 9시간 내외에 수강 인원 10명 이내로 조정하고, 대신 낮 시간 동안 실습실을 개방하라. 그게 출판인으로 첫발을 내딛고자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에 무려 여섯 달씩이나 투여해서 교육을 받으려 눈빛을 빛내는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러나 이 주장이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들리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강사료 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그것이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땀흘려 만들고 발전시킨 교육과정의 기조를 일거에 무너뜨린 대단한 실력자(?)는 얼마전 이 일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도 교육과정은 정상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통합강의라는 기막힌 발상을 도출할 만큼 악화되었다. 가장 선의로 해석하더라도, 못이 휘어 있으면 반대쪽으로 쳐야한다는 이치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은 탓일 게다. 이제 초창기에 고민했던 내용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고 파행적으로 변질된 ‘프레임’은 건재한 것이다. 그러나 그 ‘프레임’이 왜 건재하겠는가. 아니 애당초 어떻게 비전문가에 의해 그런 파행이 자행될 수 있었겠는가.

요컨대 문제의 본질은 한국출판인회의가 교육사업을 다른 어떤 목적에 앞서 ‘수익사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사정에 근거한다. 좋게 말하면 ‘돈도 벌고 출판인도 양성하는’ 일석이조의 모델이겠지만, 수익성 확보라는 현실적 요구 앞에서 교육의 목적도 방법도 언제든 굴절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만적인 수사일 따름이다. 혹시 선생들을 무슨 이상적인 교육관에만 사로잡혀 현실과는 괴리된 신선놀음이나 일삼는 불평분자들쯤으로 오해하시는 분들께는 뜻밖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여러가지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대안을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면 주어진 조건 속에서 교육의 본질을 굴절시키지 않고도 그 목적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방안을 얼마든지 도출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안도 없으면서 말로만 떠든다”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방안에 대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교육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일정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을 제출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집행하는 과정에서 언제든 ‘채산성’의 논리가 교육의 본질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라면, 또 하나의 ‘기만적인’ 모델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에 정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건 차라리 부수적이다. 내가 자초한 기만에 피해를 입게 될 학생들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건 ‘선의였지만 역부족이었다’는 변명으로 면피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선생이 강의나 하면 되지 왜 운영에 관여하려 하느냐”는 폭언이 횡행하는 가운데 총 수익 규모와 총 비용과 같은 기초적인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으면서, 교육적 필요에 의해 꼭 지출해야 할 비용에 대해서조차 무조건 “예산이 없는 현실을 이해해 달라”는 식의 요령부득만 되돌아오는 게 현실이었다. 가령 실습의 필수품인 교정지를 뽑아낼 용지조차 전일제 교육으로 사실상 경제활동이 봉쇄되어 있는 학생들이 돈을 걷어 따로 구입해야 한다면(‘무료교육’이라는 선전문구가 참으로 무색하지만), 애당초 꼭 필요하지 않은 강의를 줄임으로써 강사료 부담을 덜어서라도 그 예산을 확보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산 편성 과정에는 실제 교육을 수행할 선생들이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의료 총액을 포함한 모든 예산이 확정된 다음에야 선생을 고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육과정 편성권이 형식상으로는 선생들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교육적 고려 없이 순전히 ‘채산성’에만 기초하여 가장 중요하게 선생의 재량이 발휘되어야 할 부분들이 모조리 ‘디폴트’로 이미 주어져 있는 조건에서 그 허울뿐인 교육과정 편성권은 오히려 교육 효과에 대한 책임을 선생들에게 떠넘길 수 있는 ‘족쇄’가 되어버린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려는 논의에 참여시키지도 않고 걸핏하면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 모양이냐”는 애꿎은 질타의 표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교육사업을 통해 일정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이 교육 본연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전제 아래 발생하는 부수적 결과여야 한다. ‘채산성’을 위해 교육의 본질이 훼손되고 굴절될 수 있다면 그런 교육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재직자를 위한 교육과정도 마찬가지이다. 명색 ‘인스티튜트’에서 도무지 ‘인스티튜팅’의 흔적이 찾아지지 않는다. 교육과정의 목록만 봐서는 가령 한겨레교육문화센터 같은 사설 기관과 다를 바 없는 그냥 학원이다. 출판인에게도 굳이 학원이 필요하다면 그건 사기업에 맡겨두는 게 옳지 않을까. 고작 이런저런 교육상품을 놓고 빤한 수요의 시장에서 경쟁하며 수익을 내는 것이 공익적 사단법인인 한국출판인회의의 부설기관인 서울북인스티튜트의 존재 가치라면 너무나 옹색하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 글이 실릴 지면이 발행될 때쯤이면 과거형이 되겠지만, 12월 14일 서울북인스티튜트 ‘교수클럽’이 발족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클럽에 이름을 올릴 대부분의 ‘교수’들은 물론 모두 훌륭한 출판인들이고 후배 출판인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분들이겠지만, 그분들이 선생으로서 자격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대부분 현업에 더 많은 공력을 기울이실 수밖에 없는 분들인 탓에, 출판인 교육이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지 깊이 있는 고민을 함께 할 여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를 이상론자라고 여기시는 분들께 힘주어 강조하거니와) 바로 이것이 현실이다! 일껏 준비한 잔치에 재를 뿌리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지만, 솔직히 말해, 교육에 대한 의기투합 속에 실질적인 고민을 담아낼 ‘연구모임’이라면 모를까 업계에 ‘친목단체’ 하나가 더 생겨나는 것에 웬 호들갑인가 싶어 뜨악하기만 하다.

‘교육의 전문성’을 실질적으로 지지해주지 못할 ‘교수클럽’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말잔치로 ‘시어머니’ 노릇이나 안 하고 그냥 ‘친목단체’에 머무르기만 해도 차라리 다행이겠다. 교육은, 설령 현업의 당면 요구에 부응해야만 하는 직업교육이라 해도, 단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피상적인 접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분들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내려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 충분한 교육 경험 속에서 온 힘을 쏟아 고민하고 있는 ‘교육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 축구 선수에게 공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면서 달리기 연습만 시킨다 해도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애초의 개설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관성만 남은 현재의 서울출판예비학교에서 거대한 매트릭스를 본다. ‘취업에 대한 조바심어린 절박함’과 ‘출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자아낸 맹목적 열정’이라는 청년실업자들의 생체에너지에 기생하여, 당장 현장에서 “여섯 달 동안 뭘 배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심심치 않게 들려올 만큼이나 엉성한 교육과정을 빌미로 어차피 누군가는 가져갈 노동부의 ‘눈먼 돈’을 타내 굴러가는 조악한 매트릭스! 영화 속의 매트릭스는 정교하기라도 했지만, 여섯 달 뒤 자신의 소중한 생체에너지를 내준 학생들은 그 대가로 제공받은 ‘판타지’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매트릭스 밖의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선생이기 이전에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럽다.

발표지면 기획회의,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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