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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칼럼  Publishing affair
출판문화와 출판산업의 현황 및 전망에 관한 비평글만 따로 추려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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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생태계 사전' 중
작성자 똥개

편집자

이상적으로는 최초의 독자이자, 잠재적 독자의 대표. 그러나 현실에서는 출판사의 대리인, 또는 저자의 아바타, 심지어 반문화적 출판시스템의 말단 부속품. 정확한 판단을 위해 높은 수준의 식견과 안목이 요구되지만 정작 재량의 폭이 좁고, 치밀한 가공을 위해 집요한 지적 성실성이 요구되지만 충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으며, 원만한 조정을 위해 극심한 감정노동이 요구되지만 변변한 치유 프로그램조차 기대할 수 없는 3D 직종. 게다가 행운이 뒤따르지 않으면 착오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 판단, 신이 아닌 이상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흠결을 낳게 마련인 가공, 특히나 지도도 없는 지뢰밭에 혼자 내던져진 꼴이라 미숙한 것이 당연한 조정 등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서릿발 같기에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마저 감내해야 하는 무모한 직업.

지식생태계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조건 아래에서라면 별다른 재능 없이도 누구나 기회가 닿으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이지만, 지식생태계가 토대부터 무너진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멸종 위기에 몰린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별종들이나 감당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연대’를 통해 직업적 책임을 온전히 짊어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가령 재량 확대, 속도 제어, 지지관계 형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무겁기만 한 책임을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한 인정투쟁에 사로잡히기 일쑤인 ‘모래알’이 태반이고, 그 단절이 안 그래도 열악한 처지를 더욱 지옥으로 몰고 가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시장의 냉혹한 평가만으로 재단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의 생산을 담당한다는 스스로도 믿지 않을 허위의식과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장에서 생존에 성공함으로써 가치를 입증하고 싶다는 차마 떨쳐버릴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에 몰두하느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완충할 수 있는) 시장을 넘어선 질서를 향해 눈 돌릴 겨를이라곤 좀체 없는 ‘마음의 감옥’에서 헤어나올 길을 못 찾고 있다.

외주노동자

보기 드물게 별다른 저항 없이 시나브로 구조화된 출판 노동시장 유연화의 살아 있는 증거. 현실적 여건에 비추어 과도한 책임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매출에 대한 압박이나 소모적 감정노동에서 한발짝 떨어져 책의 물성에 집중하는 것으로 스스로 책임한계를 좁히려는 노동자의 요구와, 상시 고용에 따르는 고정비용의 지출 부담을 줄이고 나아가 해고가 불가피할 경우 그에 수반되는 갈등 요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사용자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빚어낸 합작품. 거의 모든 업종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통한 ‘고용 보장’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외주 관행 근절’ 주장에 외주노동자들이 더 반발하는 기묘한 풍경이 이를 방증한다. 나아가 다른 한편 더욱 광범위하게는, 경영 역량이 의심스러운 ‘간판만 출판사’와 최소한의 소양도 갖추지 못한 ‘의욕만 편집자/디자이너’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지탱하는 핵심적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향후 출판산업의 재생산 기반이 급격하게 와해되는 과정에서 초래될 대규모 실직 사태와 맞물려 외주화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따라서 외주노동자의 처우는 더욱 열악해질 것이고, 출판물의 질적 저하가 확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한동안은 ‘배운 도둑질’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경력자와 어떻게든 가시적인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된 신참자들의 고혈을 짜내는 ‘열정 착취’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뚜렷하게 의식된 공동의 가치를 지향하는’ 연대의 관점에서 출판 활동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면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대가를 구한다는 의미에서의 직업적 전망은 더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외주노동자가 사실상 사라진 자리에 남게 될 일종의 ‘활동가’들의 (스스로의 생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연대가,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지식생태계의 새로운 씨앗을 배태할 수도 있을 터이다.

출판학교

학교 교육이 황폐화된 이른바 ‘교육불가능의 시대’에는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허황한 수사학. 취업의 절박함에 직면한 청년 세대의 (구조적으로 해소가 불가능한) 불안을 그저 잠시 다독여 두는 환각제. 비유적으로 말하면, 기초 체력도 형편없고 축구공을 만져본 적도 없는 문외한을 불과 몇 달 동안 가르쳐 프로축구에 진출시키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기극.(물론 ‘아마추어 축구교실’에 해당하는 위상을 지향하는 과정도 없지는 않으나, ‘취업’을 전제로 하지 않는 교육과정에 흥미를 느끼거나 심지어 고액의 수강료를 기꺼이 부담할 수 있는 건 극소수다.)

출판인 양성은 지적․정서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계발하여 지적 시야를 넓히도록 안내하고, 낯선 세계 앞에서 움츠리며 익숙한 관성으로 손쉽게 눈을 돌리는 대신 치열하게 긴장의 날을 세우는 습속이 체화되도록 부추기고, 건강한 자의식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건너뛰거나 속성으로 압축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것은 ‘출판업계’의 테두리를 벗어난, ‘학교 교육’이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기능이고 나아가 사회 전체의 지식생태계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다. 학교가 붕괴하고 지식생태계가 유린된 상황에서 출판업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를테면 ‘아마추어 리그’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지식생태계의 한구석만이라도 시장 바깥에서 피가 돌게 하는 것이다.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교실, 대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출판 동아리, 지역사회나 노동조합 또는 종교단체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에 기반한 출판매체 실험……, 생각해볼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많다.

‘아마추어’의 기반이 튼튼해지면, ‘프로 선수’로 발돋움할 재목은 저절로 생겨난다. 시장에서 당장 눈앞의 수익을 내는 데만 급급한 출판업계에 기대하는 게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동시에 ‘책의 저변’을 넓히는 길이기도 하다.

파주출판도시

끼니를 거르면서도 명품으로 치장하는 이른바 ‘된장×’를 연상시키는 허세, 또는 이웃은 빈사상태에 허덕이는데 제 잇속만 챙겨 쌓은 알량한 여유를 부끄러움도 없이 자랑하는 다분히 졸부스러운 ‘돈지×’. 어느 쪽이든 속으로 골병들어 죽어가는 환자를 색동옷 입혀 보란듯이 앉혀놓곤 하는 한국 출판의 황폐한 맨얼굴을 상징한다. 교통, 주거, 의료, 보육, 위락 등 기본적인 ‘도시기반시설’은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허허벌판에 건축전람회 도록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건물 몇 십 동 지어놓고 ‘도시’라고 우기는 뻔뻔함은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어.”

물론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다. 그곳은 수백 명의 출판노동자들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일터다. 그저 구경하는 사람에게라면 눈이라도 호강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꽤 호감을 자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쾌적하고 안락하기를 기대하는 것까지야 언감생심이더라도 최소한의 편의성은 확보되어야만 비로소 ‘채워져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사람의 삶을 고려하지 않기로는 공장지대만 한 곳도 없지만, 그래도 공장은 작업효율성이라도 실현한다. 안정적인 출퇴근 수단 확보를 위해 해를 넘겨가며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살풍경은 ‘효율성을 위해 사람을 뒷전에 놓는’ 공장만도 못하다. 무엇을 위해서인지조차 아리송한 채로, 일하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일상이 정물화 같은 공간을 구성하는 ‘소품’으로 전락해 있다. 마치 ‘민속촌’처럼.

그러고 보면 한국 출판산업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이 랜드마크는, 작금의 출판 트랜드를 주도하는 책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서가에 꽂아놓거나 들고 다니기에는 제법 폼나 보이지만, 정작 집중해서 읽기에는 사뭇 불편한,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에 가까운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는’ 그 책들.

발표지면 기획회의, 20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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