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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낯선 몸과 마주하기
작성자 똥개

애시당초에 건강과는 거리가 먼 몸을 타고나 삶의 고비마다 몸이 먼저 까탈을 부리곤 한 것이 그다지 평탄치 못한 사회생활이 점철된 결정적 요인이었으니, 생물학적인 노쇠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일은 없을 터였다. 아니, 그렇게 넘겨짚었었다. 좀더 정직하자면, 하루하루의 삶을 감당하기 버거워 미래 따위는 언감생심 막연한 불안으로라도 떠올려 본 일이 없으니, 어쩌면 마흔이 넘도록 삶이 지속되리라 상상하지조차 못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무려나 정신없이 ‘일용할 양식’을 좇아오다 보니 어느새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평생 청춘일 거라는 야무진 꿈을 가진 것도 아니니 그 자체가 이상할 건 전혀 없다. (긍정적으로) 나이가 든 만큼 쌓인 경험이든 또는 (부정적으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몸에 묻어버린 완고한 습속이든, 언제나 그래왔듯이 새로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적응해야 한다면 굳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남성’이 한사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우겨대는 꼴불견을 실컷 조롱해왔던 터수에, 이미 ‘아저씨’가 되어버렸다는 주제 파악도 못하고 ‘젊은이’들과 아무런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청춘’이라고 착각하며 푼수를 떨어대는 것만큼 가소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숨이 붙어있는 한 도저히 헤어나올 길 없는 원점, 몸이다.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기억이 허락하는 한 최초로 의식한 타자’가 다름아닌 ‘내 몸’이었다는 말을 달고 다닐 정도로 몸을 낯설어하며 도무지 적응하기 버거워했던 나조차도 ‘늙어가는 몸’을 마주하기가 이리도 낯선데,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을 있는 대로 뽐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회적 생존 전략으로 삼아 나이를 먹어 왔을 다른 남성들이 중년의 어느 시점에서 ‘더이상 뜻대로 움직여주지만은 않는 몸’을 마주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당장의 끼니가 급했을 때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이 때로 원망스럽기는 했을망정 그래도 이를 악물고라도 버텨야 할 이유만큼은 분명했다. 아니 그리 멀리 거슬러올라갈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 넉넉지는 못하나마 최소한의 끼니 걱정에서만큼은 간신히 자유로워졌을 때만 해도 쉬고 싶을 때는 쉴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에 심리적으로 훨씬 넉넉해졌었다. 혹 먹고사는 데 쓰고 남아도는 기운이 있다면 실컷 놀아봐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없었다면 거짓일 터이고 그게 또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일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서너 해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안정감을 미처 제대로 누릴 새도 없이 생물학적인 노쇠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속내를 시시콜콜 들춰내 투정을 부릴 일은 아니지만, 민망한 예를 한 가지만 들자면,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지는’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워낙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고 하루에 열 시간은 자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게으름뱅이’가 잠든 지 불과 서너 시간을 못 넘기고 깨어나 새벽마다 거실을 어슬렁거리게 된 이유는 순전히 방광의 탄력이 예전 같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체력이 좋아져 잠을 덜 자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진 게 아니니 당연히 늘 수면부족에 시달려 깨 있는 시간에도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날이 거듭된다. 아직은 일을 다 집어치우고 충분한 휴식에 ‘올인’할 만큼의 여유를 확보한 것은 아니어서 어떻든 맡은 일은 처리해야 하니 피로만 가중된다. 게다가 누적되는 피로를 한사코 견딜 이유조차 또렷하게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심리적인 황폐함을 더욱 부추긴다. 당장의 끼니가 급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벌어먹일 식구가 줄줄이 딸린 것도 아니고, 일할 기운도 없어 허덕이는 처지에 놀러다닐 기운이 있을 리 없으니 놀고 싶은 의욕도 사라졌는데,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 고생을 감당하고 있는지 아리송해져 버린 것이다. 왈 ‘정체성 위기’다. (사춘기의 ‘정체성 위기’가 몸의 변화에 기인하듯이 갱년기의 ‘정체성 위기’도 결국 몸의 변화에 기인할 터이다.)

워낙 까까머리 소년이었을 때도 ‘몸의 변화’를 비슷하게 겪어낼 또래 친구가 없는 외톨이이긴 했지만, 그 자리를 책이나 텔레비전 같은 미디어들이 채워주었기에 ‘심리적 변화’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평균보다 십년 이상은 앞질러 마주하게 된 ‘몸의 노쇠’, 그저 몸을 눕혀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 친구와 수다 떠는 일까지를 포함하여 만사가 다 귀찮아져 피곤하기만 하고 무슨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 ‘심리적 퇴행’에 적절히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공간은 좀체로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당장의 먹고사는 일과 아무 상관 없이 만나게 되는 이들조차도 크게 보아서는 ‘내게 일을 시키려는 사람’ 아니면 ‘내게서 일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사람들’뿐이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적어도 ‘함께 놀자는 사람들’(역설적이지만 실은 이들이 가장 고약하다)이다. ‘늙어가는 몸’과 그로 인해 ‘황폐해져만 가는 마음’을 서로 응시하며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아쉽기는 하지만, 서로 모순되는 온갖 욕망들이 씨와 날로 얽힌 한국 사회에서 그런 ‘내밀한’ 사적 관계란 아주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낯선 사람과 새롭게 관계를 열어가는 일이 ‘즐거움’ 이전에 ‘귀찮음’으로 먼저 다가오고 있음에랴.

이쯤 뇌까리고 보니, 이것은 ‘아저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실은 (특히나 ‘완경’ 무렵의) ‘아줌마’들에게서 오히려 흔히 일어나는(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져 왔던) 일들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큼은 또렷하다. 이런 변화가 유독 여성에게만 특징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남성일수록,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마치 사춘기 시절의 당혹스러운 변화를 또래 친구들과의 의기투합 속에서 왜곡된 남성-사회화로 얼버무렸듯이, 견고한 남성 중심 사회가 부추기는 왜곡된 성별적 편향으로 더 깊은 자기기만의 늪에 빠져들기 십상이라는 것. 그러니 ‘느끼한 아저씨들’을 향한 ‘막연한 적의’는 오히려 더 견고한 성별적 편향 뒤로 숨어버리도록 도와줄 뿐이며, 반대로 “아빠 힘 내세요!”라는 밑도끝도없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막연한 연민’도 (특히나 투정을 특권으로 여기도록 훈련받아온 남성들에게라면) 냉정한 자기직시를 방해할 뿐이다. 처방은 한 가지뿐이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소년이건 중년이건, 모든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이들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고도 정직하게 성철하기!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선 타인에게든 스스로에게든 투정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현실 앞에 마주 서기, 또는 ‘생물학적 노쇠’에 국한시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몸과 친해지기.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나부터도 그렇다. 낯선 몸에 익숙해지기도 쉽지 않은데, 몸이 힘들수록 이성의 힘으로(라고 믿었지만 실은 ‘젊은 패기로’라는 편이 조금은 더 정직하지 싶다) 꽁꽁 여며두었던 투정이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한심한 꼬락서니를 마주하기가 더 곤혹스럽다. 사춘기를 오래 겪은 탓에 이성의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었던 치기어린 투정을 간신히 다독여 여민 지 도대체 얼마나 됐다고. 그래서 ‘철들자 망령난다’고 하나 보다. 그래도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철이 덜 든 건지 망령이 난 건지 아무나 붙들고 투정부리려 들기 일쑤이면서도 그게 민폐라는 걸 모르는 ‘아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안 그럴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추하고 한심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 좀 낫긴 한 건가. 그러면 또 마음 한켠에서 이런 비웃음이 들려온다. “비겁하기는, 비교할 데다가 비교해라. 투정부리는 방법도 잊어버려 냉가슴만 앓는 ‘아줌마’들이 아직 또 얼마나 많은데.” 이래저래 쓸쓸한 ‘갱년기 우울’만 깊어간다.

발표지면 함께가는여성, 2008.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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