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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만장일치는 무효다 (모티브, 2003)
작성자 똥개
스티븐 스필버그가 2002년에 내놓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범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추적·검거하여 단죄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한다는 첨단 시스템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란 검거된 용의자를 판결하는 평의회의 세 명의 평결관 중 이견을 제시한 한 명의 의견, 즉 '소수의 의견'을 의미한다. 연전에 어줍잖게도 글쟁이로서 내가 가진 자의식을 토로한 어느 글에서, "내 견해를 주장하고 그럼으로써 '지식인사회'의 동의를 구하거나 '대중사회'를 설득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러한 작업을 통해 "('주장'도 '투쟁'도 아니고) '저항'할 뿐"이라고 밝힌 일도 있지만, 내 글쓰기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지칭하기에 적절한 용어가 있다면 아마도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설정되어 있는 의미 그대로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일 것이다.

이미 그것을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마스터베이션"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바에야 내 작업이 굳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새삼스러운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맥락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웅변해 준 사례 하나쯤은 꼭 언급해 두고 싶다.

2002년 여름 월드컵 열기가 온 나라를 뒤덮었을 때, 나는 그 광포한 열기에 질식당해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를 접속해도, 텔레비전을 어느 채널에 맞춰도 온통 월드컵뿐이었다. 한국이 준결승에 오르던 날 내 불안정한 정서 상태는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갔었고 아마도 한국이 우승이라도 했다면 틀림없이 실행에 옮기고 말았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그런 질식 상태에서 뒤늦게나마 나를 구출해 준 것은 어느 인권 단체의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라는 '논평'이었다. 그 글은 내게 "이 나라에도 사람이 살고 있긴 하구나"라는 안도감을 주었다.(혹시라도 이 말이 기분나쁘게 들리는 분이 있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당시 내가 당신들에게 거의 '외계인'이나 '괴물'로 보였던 꼭 그만큼 내게도 당신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 단체가 그런 '논평'을 낸 취지를 감히 넘겨짚을 생각은 없다.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주장'일 수도 있고, '투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본의와는 무관하게 그 '논평'이 나라는 한 사람의 개인에게 행사했던 작용은,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읽는 이에게서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꼭 그런 일이었다. 요컨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직접적인 '왕따'를 당하거나 또는 공연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항의 한 마디 변변히 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감춘 채 스스로를 질식 상태로 몰고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구나"라는 숨통을 틔워 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렇듯 극심한 소외를 감당하는 데 힘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설득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자족적인 이의 제기를 멈추지 않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탈무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의회 구실을 하던 '산헤드린'에서는 투표 결과 만장일치가 나오면 그것을 무효로 하고 다시 투표를 했다고 한다. 식당에 가서 밥 한 끼를 먹을 때조차도 가급적 한 가지 메뉴로 의견 통일을 보고 싶어하는 우리 눈에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풍속이겠지만, 아마도 '무너진 바벨탑'의 전설을 창세 신화로 가지고 있는 종족이라면 (신이 아닌) 사람이 하는 일에 1백퍼센트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완벽한 의견 일치는 신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한 불경으로까지 여겨졌음직하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에 기인한 '신 앞에서의 겸손'이 무신론을 포함하여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이 자신의 이상을 담아 신을 만들어 냈다'고 판단하는 유물론자라 할지라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신 앞에서의 겸손'을 '사람의 삶 앞에서의 겸손'으로 바꿔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가지기를 바라거나 또는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묵시적으로 전제하거나 나아가 으레 그러하리라고 애당초에 지레 넘겨짚는 것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며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 앞에서의 오만'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사람에 대한 오만'이다.

더구나 "모든 역사적 시기에서, 지배적인 생각이란 지배 계급의 생각일 뿐"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다면, 만장일치라는 현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은 '평화'가 아니라 일종의 '음모'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남성과 여성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이해 조정에 양해한 '컨센서스'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같은' 의견을 가질 수는 없다. 아니 의견의 일치가 바람직한 가치로 여겨지는 한, 최소한의 '컨센서스'에 도달하지조차 못할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이해 관계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의견을 궁극적으로 포기하는 데 양해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만장일치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야말로 (심지어 '무효화'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이나)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 남는 문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치할 수 없는 수많은 의견 가운데에서 '나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뿐이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나는, 궁극적으로 '생계를 위해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이들의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회주의자이다. 그것은 나의 삶의 조건이 요구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지향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일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인한 최소한의 '컨센서스'조차도 우습게 무시되는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내야 하는 나는, ('양해'할망정 결코 만족할 수는 없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하여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 규약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부인당하고 있는 이들의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어서 심지어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가치조차 독점하고 전유하려 들도록 부추긴다. 누군가에 의해 가치가 독점될 때, 그러한 가치를 지향하는 수많은 개인의 '진실'은 곧잘 집단의 '정의'로 환원되곤 하며,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가치가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을 압도하는 역전이 일어나기 일쑤다. 나는 '정의'와 '진실'이 충돌할 때 집단의 '정의'로 환원될 수 없는, 환원되기를 거절하는, 또는 심지어 그것을 거절당한 '진실'의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분파주의자이다. 나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이 세 자아의 긴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첫 비평집을 묶어낸 지 꼭 일곱 해가 지났다. 그 사이에 변한 것이 있다면, 그 머리글의 첫머리에서 글쟁이의 자의식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고백을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의 머리글을 쓰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게 마련인가 보다. 이렇다할 직장도 변변한 직함도 없이 '노느니 염불' 삼아 '학교 주변 불량배'마냥 주로 대학 매체의 가난한 재정에서 나오는 '코묻은 돈을 삥뜯어' 용돈이나 얻어 쓰는 대가로 자판을 두드리는 '백수' 주제에 거창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엇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여전히 글을 쓰는 일만으로는 온전한 '밥벌이'가 안 되는 사정이 그때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제는 싫건 좋건 '일용 저술 노동자'가 나의 직업임을 하나의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무슨 거창한 선언을 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십상인지라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나의 직업이 내게 강제하는 최소한의 '책임'을 해명해 두고 넘어가는 것이 내 글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구매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일 터이다.
그래서인지, 첫 비평집이 두어 해 동안 집중적으로 쓴 글들을 묶었는데도 어떻게 구성을 해야 할지조차 난감할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가 중구난방으로 벌어져 있던 반면에, 그 두 배쯤 되는 기간 동안 씌어진 글들이지만 (여전히 청탁이 들어오는 대로 쓸 수밖에 없는 '일용 노동자'의 한계로 말미암아 여러 종류의 글들이 뒤섞여 있기는 해도) 어느 정도 큰 흐름은 대략 네 줄기로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 방향으로 매진했다기보다는 내게 지면을 내어 준 매체의 편집자들이 나의 글쓰기 영역을 구체화해 주었다고 보는 편이 정직하겠다.

제1부는 넓게 보아 '포스트 80년대'적인 문화 현상에 대한 비평의 범주에 속하는 글들로 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온갖 '신드롬'이라는 이름('증후군'이라는 본래 의미의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기는 하지만)이 붙은 유행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리다가는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던 우리 시대의 풍경에 대한 짤막한 소감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매체가 어거지로 만들어내다시피 한 거품들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현실의 단면으로 접근해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런 의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내가 쓴 글 또한 그 요란한 호들갑에 얹혀서 팔렸을 뿐이라는 처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니까.

제2부는 나의 '인권 감수성'을 몹시도 불편하게 하는 사건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드러낸 글들로 묶었다. 물론 나는 세계인권선언이나 대한민국 헌법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컨센서스'마저도 휴지조각이 되곤 하는 현실에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순진한 리버럴'이라는 누명(?)을 기꺼이 뒤집어쓸 용의가 있다. 도대체 1789년도 요원한 마당에 1917년이나 심지어 1968년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물론 나는 그것을 '단계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라는 어정쩡한 방패막이 뒤에 숨어서 슬그머니 그것을 '부수적이고 주변적인' 문제로 돌리려는 정직하지 못한 태도에 반대할 뿐이다. 동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당연히 동시적으로 실천해야 하며, '더 본질적인' 지향을 위해서든 그 무엇을 위해서든 그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제3부는 지식 산업 종사자로서 출판 산업의 현실을 진단하고 전망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했던 글들을 묶었다. 나는 출판 산업을 시장 논리에만 내팽개쳐 두어서는, 지식 산업의 미래가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되는 지식만 지식이냐'는 일부 인문학 종사자들의 항변에 동조할 생각도 없다. 내게는 '돈이 되는 지식만 지식'이라는 천박한 실용주의나 인문학이 무슨 벼슬이기라도 한 양 독점하면서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하고 있는 실은 고급 백수나 다름없는 유한 계급이 제 밥그릇을 내놓지 않겠다고 버티는 치졸한 안간힘이나 개탄스럽기는 매한가지이며, 굳이 도토리 키라도 재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귀족'의 기득권을 '부르주아'의 권력으로 대체하는 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겠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와는 전혀 다른 공공성의 지평에서 새롭게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4부는 이런저런 매체에 썼던 서평들로 묶었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내 자의식 또한 앞서 이야기한 세 범주 사이의 긴장 위를 맴돌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첫 비평집을 엮은 이후에 발표한 글 가운데 지면의 제약으로 미처 묶이지 못한 글들이 있다. 이른바 '사이버 문화'라고 지칭되는 인터넷에 대한 매체 비평 성격의 글들은 언젠가 따로 묶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중량감 있는 분량으로 쓴 다소 무거운 주제의 글들은 다른 글들과의 균형을 고려하여 빼놓았는데, 그런 성격의 글을 거의 쓸 기회가 없는 탓에 여간해서 책으로 묶기는 어려울 것 같다.

'쌍둥이도 세대차가 난다'는 농담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세태에서, 몇몇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이미 희미해진 엣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치 세상에 뒤집히기라도 한 양 떠들어대고 있는 내용들도 유행의 주기가 지나면 불과 몇 해가 채 지나지 않아 그렇게 옛 이야기가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인권 현실이 요지부동임은 물론이려니와, 문화 현상에서조차도 일용할 유행 상품의 품목만 달라질 뿐 그 기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소재는 비록 시의성이 상당히 떨어질망정 주제에 대한 문제 의식만큼은 현재진행형이라는 판단에서 함께 묶었으며, 일부 오해될 수 있는 시제 표현 외에는 발표 당시의 원문을 거의 그대로 싣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 책에 묶인 글들을 쓰는 여러 해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다. 우선 그다지 대중적이지 못한 논지의 글에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의 지면을 기꺼이 내어 주며 글쓰기를 격려해 준 편집자들, 특히 웹진 컬티즌의 한정수와 이영재, 월간 {닷츠}의 손동수 전 편집장, 월간 {책과 인생}의 강철주 전 편집장께 감사드린다.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내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이 글로 옮겨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몇 푼 안 되는 원고료 수입에 생계를 걸고 내키지 않는 글까지 써 내야 하는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안정적인 밥벌이거리를 마련해 주었던 인물과사상사의 강준우 사장과 삼인출판사의 홍승권 부사장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나는 촌스럽게도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글쟁이로서 자의식을 키워 왔다면 그만큼 내 인격도 성숙해 가는 과정이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늘 한 걸음 더 성숙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고민거리를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또 저작을 통해 던져 주고, 심지어 그 살아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던 세 분의 선배를 꼭 기억해 두고 싶다. 문부식, 김규항, 고종석, 이들은 내가 나의 지향을 구체화하는 데 알게 모르게 길잡이가 되어 준 분들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출판 산업의 살얼음판 같은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창업을 시도하는 모험으로도 모자라 꼭 돈 안 되는 책만 골라 가면서 내려고 하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모자란'(?) 모티브의 양미자 사장에게 이 책의 판매가 작은 도움이라도 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막 시작한 사업에 짐이나 되지 않기만을 바한다는 말로 멋쩍은 감사의 말을 대신하고 싶다.

그리고 '소수 의견'을 숨기지 못하는 고단한 삶을 늘 언짢아하면서도 끝내 마다하지 못하고 함께 감당하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해 준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살아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가 드리워져 있는 이 작은 중간 성과물을 드린다.

2003년 8월 28일
발표지면 .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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