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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진술  Private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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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작성자 똥개

‘대중’은 허깨비다

“…… 온갖 프로그램에 무시로 등장하는 탤런트․가수․코미디언들의 검증 안 된 인생관과 세계관이 아직껏 풍미한 데서야 고급문화가 설 땅은 없다. …… 방송 3사가 저급 불량 프로그램을 쏟아내는 1차적인 원인이 시청률 경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외환 위기 뒤로 방송사의 광고 수입이 격감한 데 따라 시청률 경쟁이 더욱 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저질 드라마를 추방하고 문화, 교양, 시사 프로그램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 이런 파행을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는 없다. 그러자면 프로그램을 감시하고 방송사에 압력을 가하는 시청자 주권의 회복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한겨레> 98년 10월 6일자 사설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던 얘기의 재탕이라서 그저 ‘지당하신 말씀’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투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매번 황당해지면서 짜증이 나곤 한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자꾸 하니까 짜증이 난다는 뜻에서가 아니다. 도무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어거지가 버젓이 ‘하나마나’할 정도로 ‘지당하신 말씀’으로 둔갑하는 게 짜증이 나는 것이다.(대입 제도에 논술이 도입되면서 신문 사설을 논리적 표현의 교재로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한겨레>(<조선일보>라면 말도 않겠다!)에 사설로 실릴 만한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위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시청률 산정의 주체가 되는 시청자와 ‘시청자 주권’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시청자는 같은 대상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래야 말이 된다. 그런데 아무런 한정사조차도 없이 둘 다 그저 ‘시청자’로 뭉뚱그려져 있다. 나는 어리둥절해진다. 그거야말로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바로 이런 식의 말버릇이 우리 사회의 담론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매우 심각하고도 의미심장한 ‘자기 분열’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청률 우선’을 저지하기 위해 ‘시청자 주권’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식의 아무리 봐도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시청률을 만들어내는 대중들과는 다른 종류의 기호나 취향 혹은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취향은 ‘고급’이고 대중의 취향은 저속하고 말초적이라고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고급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엘리트들도 나름대로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다시금 ‘대중’에게, 혹은 ‘대중적 방법’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자가당착이다. 왈 ‘시청자 주권’이라니? 근엄한 말투로 시청자들의 취향이 저급하다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놓고 나서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언필칭 방송은 시청자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시청률에 목매고 있는 것 아닌가. 차라리 (대중과는 분명히 다른) 소수 엘리트도 (대중 못지않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고급 시청자’의 주권을 주장하는 게 그나마 앞뒤가 맞는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해 버리고 나면 도대체 어느 얼빠진 대중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한 마디로 “놀고 있네!” 아니겠는가.

비슷한 경우를 한 가지 더 들어보자. 나는 “베스트셀러가 베스트북은 아니다”라는 그 자체로는 백 번 지당하신 말씀에서도 같은 종류의 황당함을 경험한다. 물론 많이 팔린다는 '획일적'인 잣대로, 경제적 가치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적 생산물의 질을 평가하려는 무모한 시도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불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 또는 독서를 통해 얻고자 하는 즐거움이 모두에게 같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다양한 독서의 양상을 ‘좋은 책’이라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밑도끝도없는 기준으로 다시 한 번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누군가가 애써 얄팍한 주머니를 털어 어떤 책을 사서 읽는다면, 읽고 난 뒤에 스스로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 한 그것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적어도 그에게는 '좋은 책'이었던 것이며, 누구도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선택한 책을 단지 자신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책’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것은, 무조건 많이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폭력이다. 책을 사는 사람들이 돈이 남아돌아서 심심풀이로 책을 수집(?)하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다지 좋지도 않은 책에 코를 박는 게 아니라면, 많이 팔리는 책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좋은 책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나를 이른바 ‘대중추수주의자’쯤으로 속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그들이 경계하고 비난하기까지 하는 대중의 취향이 바람직하다거나 옳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그 어정쩡한 계몽주의자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더 우리 사회의 ‘저급한’ 대중(나는 이 경우 흔히 그러하듯 ‘대중문화’라는 식으로 추상화시켜 말하고 싶지 않다. 좀 심각하게 말하자면, 저급한 것은 ‘대중’이지, 저급한 대중의 취향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대중문화’ 자체가 아니며,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정작 나를 끔찍한 공포로까지 몰아넣는 건 ‘대중’이라는 실체이지, 그다지 ‘고급’이 못 되는 나 역시도 즐겨 향유하고 있는 ‘대중문화’가 아니다.)에게서 심지어 욕지기마저 느낄 지경이니까.

다만, 나는 적어도 그들보다 정직하고 싶을 뿐이다. 적어도, 먹물들의 머릿속에나 존재할 허깨비 같은 ‘대중’을 팔아 ‘대중’을 겁주고 사기 치면서 엘리트 행세를 하려 드는 건, ‘저급’하다 못해 아주 ‘비열’한 짓이 아닌가. 우습게도 이 나라의 ‘저급’한 대중들은 이런 사기에도 홀딱 넘어가 잔뜩 주눅들어서는, 실제로 그를 엘리트로 떠받들어 주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 꼴을 보면서 속이 뻔히 보이는 사기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답답해하는 것 역시 잘난 먹물의 지극히 고매하신 시각일 뿐이다. 그러니 그저 ‘그 대중에 그 먹물’이라고 혀나 차고 말 수밖에.

나는 ‘넘버쓰리’ 먹물이다

이야기가 여기에까지 이르면, 글의 첫머리부터 논리적 자가당착을 문제삼으며 거들먹거리더니, 네 문장은 안 그런 줄 아느냐고 힐난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건 다 접어두고라도, 그렇게 말하는 너는 도대체 먹물이란 얘기냐 아니라는 얘기냐, 도무지 헷갈리지 않는가,” 나는 그 날카로움에 경의를 표한다. 이건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이걸 눈치챈 독자들은 적어도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 사회에서 ‘먹물 묻힌’ 사람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처지와 그로 인한 ‘자기분열’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떠벌리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그러하다고 털어놓으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싶다. ‘자기분열’을 겪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는 쏙 빼놓고 거창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건 애써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자판을 두들기기에는 너무나 공허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공허한 이야기로 생겨나는 ‘부수적 이익’에 주목한다면 아주 짭짤한 영양가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그 건더기는 고사하고 국물도 돌아오지 않을 나 같은 ‘3류 먹물’이 그걸 흉내내는 건 시쳇말로 ‘삽질’일 뿐이다. 차라리 입 닥치고 그런 ‘먹물 놀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눈앞의 밥벌이에나 열중하는 게 훨씬 더 영양가가 많다.

그리고 좀더 심각하게 말하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까지를 포함한) ‘먹물’들을 비판하기 위해 기대고자 하는 ‘대중’의 정서라는 게 내 경험상의 판단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통상 어법대로 대학에서 전문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을 통틀어 ‘먹물’이라고 지칭하고 보면, 우리 사회에 ‘먹물’이 좀 많은가. 그런데 그들 대다수는 비싼 등록금 들여 가며 또 애꿎은 청춘을 소진해 가며 배우고 익힌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소위 ‘지식인사회’에서 발언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먹물들의 특권일 뿐, 대다수의 ‘먹물’은 그들이 ‘저급’하다고 비난해 마지않는 ‘대중’에 속해 있다. 자신이 ‘먹물’임을 까맣게 잊은 채 제 밥벌이에나 급급한 3류 먹물들이다. 국민 대다수가 초등학교에서 간신히 문맹이나 면하는 정도에 그치는 ‘미개한’(?) 사회도 아니고, 세계에서도 손 꼽을 만큼 높은 교육 수준이 높은 이 나라의 ‘대중사회’에서 “시청률 때문에 방송이 저급하다”거나 “베스트셀러가 베스트북은 아니다”라는 식의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무런 의심없이 횡행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밥벌어 먹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시간과 노력을 쪼개서 떠들어 대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들처럼 내 견해를 주장하고 그럼으로써 ‘지식인사회’의 동의를 구하거나 ‘대중사회’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배운 것이 아깝다. 고작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자고 그 비싼 ‘먹물’을 묻힌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흔히 엄청난 오해에 직면해 왔기 때문에 덧붙여 둘 말이 있다. 제발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누군가들처럼 거창하게 ‘세상 고민’을 끌어안고 뒹굴며 애써 묻힌 ‘먹물’을 이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쓰고 싶은데, 왜 그게 그들만의 특권이어야 하느냐고 ‘나도 좀 끼워 달라’는 떼를 쓰자는 게 아니다. 그거야 나보다 훨씬 더 ‘가방끈’이 긴(그래서 배운 것이 나보다 훨씬 더 아까울) 먹물들이 알아서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마당에 나까지 끼여들어 거들 게 뭐 있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깨놓고 말해서 나는 그건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만큼 그들이 ‘책임’질 문제이지, 그 말석에도 못 끼는 3류 먹물까지 ‘연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는 그 어마어마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능력도 없거니와, 고작 어줍잖게 그 잘난 ‘지식인사회’의 문턱을 기웃거린 대가로 그 책임까지 통째로 뒤집어쓸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내가 발언하는 이유를 굳이 한 미디로 요약하자면 그저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로서의 자존을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바로 거기가 내가 배운 걸 아낌없이 써먹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는 그런 자존의 획인조차도 ‘잘난 척’이 돼 버린다. 나는 졸지에 ‘먹물’ 자랑하는, 게다가 1류도 못 되는 주제에 ‘눈만 높아서’ 그들을 흉내내려고 안달하는, 그나마 3류 축에도 못 들어갈 아주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전락하고 만다. 좋다. 그게 이 사회의 어김없는 현실이라면, 하필 여기에 태어난 기구한 운명이나 탓하며(앞서 잠시 언급했던 내가 이 나라의 ‘대중’들에게서 경험하는 욕지기는 바로 이런 성질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그 꼬락서니가 내 잘나빠진 ‘자존’의 대가라면 얼마든지 치르고 감당하겠다. 어차피 저 고매하신 1류들처럼 ‘먹물 값’에 밥줄을 걸어놓은 것도 아닌 바에야 무슨 대수랴. 그런데! 어라? 이 사회에서는 이 우스꽝스러운 자존이 ‘먹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밥벌이까지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하기는 그래서 배울 만큼 배우고 한 때나마 생각할 만큼 생각하고 심지어 머리띠까지 둘러 가며 ‘자존’을 표현했던 숱한 3류 먹물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짐짓 ‘먹물 아닌 척’ 밥 벌어 먹는 일 이외에는 신경 딱 끄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비난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다. 내가 그러한 생존 방식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글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기다. 1류들의 고매하신 사기보다 훨씬 더 저열한 사기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그들이 나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꼭 그 만큼 불쌍하게 여길 뿐이다.(나는 결코 ‘겸손’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때로 ‘오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건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길 만큼 그들보다 낫다’는 식의 ‘오만’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차라리 ‘동병상련’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호소해도 그렇게밖에는 안 보인다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여기에 나의 고민이 있고, 역설적이긴 하지만 떠들어 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설득’을 위해 노력하거나 ‘동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먹물’이 모자라서 의식화가 모자라서 계몽이 모자라서, 이를테면 ‘시청자 주권’을 못 찾아먹고 ‘말초적이고 저급한’ 오락에나 탐닉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니 어설픈 ‘먹물’ 흉내가 ‘잘넌 척’으로 보일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들이라고 못나서 몰라서 아무 소리 안 하는 게 아니니까.) 물론 나는 감히, 이런 얼치기 계몽 덕에 졸지에 저급한 ‘대중’으로 전락해 버린 (3류) ‘먹물’의 이 불쌍한 처지를 나만이라도 대변해야겠다는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지식인의 책임과 사명을 부여잡고 불철주야 머리를 싸매고 있을 1류 먹물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시건방진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처지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나 자신이 너무도 불쌍해서,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절박하게 나의 ‘자존’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져서, 비록 거창하게 세상을 걱정할 능력도 의사도 없을망정 내게도 내 나름의 ‘생각’쯤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극소수 선택받은 먹물들만의 특권은 아니라고 누가 듣거나 말거나 소리지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처참하게도 나 역시 ‘대중’과는 다른 아주 ‘고급스러운 취향’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부류로 어김없이 전락한다.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할 능력도 없고 따라서 그럴 의사도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무관하게! 완전히 코미디다. 그것도 아주 우울한 블랙 코미디다.

마스터베이션은 강간이나 매매춘보다 훨씬 낫다

내가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물론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먹물’을 과장하는 변설로 ‘무식’을 감춘 채 ‘1류연’ 하면서 사기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니 제외하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본의는 아닐지라도 이왕 이렇게 돼 버린 마당에, 능력만 있다면 적당히 책임지는 ‘척’도 해 가면서 ‘먹물 놀음’으로 먹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라고 왜 없겠는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무식’을 감출 재간이 도무지 없다. 내게 그나마 ‘먹물’의 흔적이 있다면 그건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인데, 그 알량한 ‘생각’으로도 뻔히 들여다보이는 무식을 무슨 수로 감춘단 말인가. 하긴 내가 예컨대 <한겨레>의 논설위원쯤 된다면 이 글 첫머리에서와 같은 논리적 자가당착도 외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지만, 쥐뿔도 없으면서 뻔뻔하기까지 하면 본전도 못 건지고 망하기 십상이다.

이야기를 좀 바꿔 보자. 나는 주제넘게 이 사회의 발전을 고민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나는 3류도 더도 말고 딱 3류만큼은 발언할 수 있는 사회가 점잖은 1류들이 발언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요컨대 나의 발언은 어떤 의견의 ‘주장’이 아니다. 나는 그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나 자신에 관해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해 질문하고자 할 뿐이다. 이건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마스터베이션’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 특히나 ‘먹물’들은 마스터베이션에 대해 매우 이상한 도덕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게 남 앞에 내세울 만큼 ‘휼륭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감추어야 할 만큼 ‘부끄러운 짓’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을’ 뿐이다. 마스터베이션은 강간보다 낫고 매매춘보다 낫다. 아니 ‘어설픈’ 섹스보다도 낫다. 오로지 ‘제대로 된’ 섹스보다 못할 뿐이지만, 섹스를 원한다고 누구나 다 섹스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면 마스터베이션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마스터베이션은 누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골방에서 혼자 하지 광장에서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는다. 내 대답은 이렇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광장에서 ‘아름다운’ 섹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면야 얼마든지 나는 나의 골방으로 숨어들어가 나의 ‘변태적’인 취향을 혼자 즐길 것이다. 아니,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광장의 풍경이 그러하다면, 결코 ‘변태’가 아닌 내가 마스터베이션을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저 계몽이라는 이름의 ‘강간’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그야말로 ‘변태적’인 광장의 한 모퉁이에서 공개적인 마스터베이션을 시도한다고 해서 굳이 골방으로 내몰려야 하는가.


문제의 핵심은,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짓일지라도 아무도 안 하는 짓을 혼자서 ‘저지르면’ 그건 그 자체로 ‘독점’이 되어 버리지만, 비록 소수일지라도 여러 사람이 같은 짓을 해 보겠다고 ‘덤벼들면’ 그제서야 비로소 ‘공감’ 여부가 관건이 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당장은 다만 몇 사람일지라도 3류가 주접스럽게 ‘1류연’ 하지 않고 그저 3류로서도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공유해 보는 길(‘집단 마스터베이션’?)에 실낱 같은 기대를 걸게 된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나 <휴먼 TV> 따위의 프로그램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지금은 라디오 시대>가 엄청난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저질 방송’ 시비에 휘말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 내용이 보통사람의 일상생활보다 특별히 저속해서가 아니라 골방에서나 속닥거릴 얘기를 ‘감히’ 공중파에 대고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능력도 없이 세상 걱정 하는 ‘척’ 할 필요 없이 그저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족한 발언 공간이 모든 3류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활짝 열려 있다면, 최소한 3류를 자처하면서 결과적으로 어설프게 1류 흉내를 내는 ‘우스꽝스러움’만은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공간이 열려 있다고 해서 감히 밥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는 없을지라도 ‘공감어린 관심’으로 지켜봐 줄 수는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공간을 문턱 없이 들락거리는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늘어나면, 애당초 우리들에게 자조 섞인 침묵을 강요하던 ‘밥줄’에의 위협이 조금은 줄어들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도 스스로의 자존을 확인하는 용기를 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이건 ‘시청자 주권’ 타령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머릿속의 관념 유희다.

그 ‘공간’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해야 할 실체라면 거기에는 그만큼의 물리력이 필요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다름아닌 ‘자본’이다. 따라서 이 공간은 동시에 그 자체로 ‘상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거창한 논리를 다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억지로라도 세상 걱정 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게 단순한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 거창한 명분과 원대한 포부를 가진 ‘정치적 기획’이라고 사기를 치지 않는다면, 그걸 누가 거들떠나 보겠는가. 하다 못해 이를테면 ‘열린 공간’이라는 이념이라도 팔아야 이 공간은 현실적으로 확보된다. 그리하여 이 투박한 이념을 더 세련된 상품으로 포장해낼 수 있는 ‘소수’만이 이 공간을 거리낌없이 활보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열린 공간’은 다시금 허구가 된다.(굳이 그런 사기를 치지 않고도 <지금은 라디오 시대>같은 프로그램들이 히트를 칠 수 있었던 건, 방송 자체가 이미 권력이기 때문이다. 만일 전파 공개가 이루어져서 누구나 방송국을 개설할 수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게다가 사기를 아주 안 치는 것도 아니다. 이종환씨의 세상 걱정은 혼자 다 하는 듯한 말투와 ‘살림 하는 여자’를 강조하는 최유라씨의 캐릭터가 효과적으로 동원되었다.)

이건 그저 생각을 굴리다 보니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뜯어맞춰진 말장난이 아니라, 내가 지난 몇 년간 이리저리 치이며 좌충우돌했던 <오늘예감>이니 <버전업>이니 하는 잡지들을 통해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문화 게릴라’를 표방하고 ‘사이버’를 내세웠던 이 잡지들이 바로 이런 종류의 어설픈 ‘사기극’(?)이었다. 특히나 <버전업>은 대중은 둘째 치고라도 우선 나를 ‘강간’했다. ‘열린 공간’에 대한 나의 절박한 요구는 말멩이가 빠진 채 그 껍데기만 그럴듯한 ‘이념’으로 개칠되어 그들의 사기극에 도용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자는 건 아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가방끈이 긴 1류 먹물들만 사기치라는 법 있는가. 자신의 어설픈 ‘먹물’ 구덩이 속을 아무리 뒤져 봐도 그것 말고는 달리 팔 게 없어서 ‘3류’라는 레테르라도 어떻게든 팔아 보겠다는데, 그걸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적어도 공리적으로는, ‘저급한’ 대중들을 그들의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교양하겠다는 다분히 폭력적인 발상(‘강간’)보다 ‘열린 공간’이라는 이념(아마도 ‘사이버 섹스’쯤?)이 훨씬 더 건강하다. 굳이 ‘차악(次惡)’을 택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후자의 손을 들어 주겠다. 다만 나는 그런 사기극에 동참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갈 것이다. 3류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아니 내 의사를 따질 필요도 없이, ‘무식’을 감출 재간이 없는 나는 이미 그 판에 끼여들 자격에 현저히 미달한다. 그리고 그게 내가 나를 둘러싼 세상에 관한 ‘질문’만큼은 계속하면서도 좀더 바람직한 세상에 대한 걱정까지는 굳이 거절하는 이유이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내가 왜 책임진단 말인가.

지더라도 개기자

나와 친분이 있는 대학 교수 한 분은 이런 내가 딱하다며, ‘영원한 패배자의 논리’가 아니냐고 비판한 적이 있다. 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솔직히 말해 이기고 싶지 않다. 이겨서 뭘 하겠는가. 나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라면 권력에도 심지어 명예에조차도 관심이 없다. 그런 것들이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권력은 악이라거나 모든 명예는 허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늘 안타까와하는 것은 왜 ‘관심이 없다’는 말과 ‘싫어한다, 부정한다’는 말이 혼동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정당한’ 권력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혹은 존경받는 지식인의 발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희망을 줄 수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아니 좀더 심각하게 말해 어떤 권력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악’한 권력일 수밖에 없다. 혹은 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지식인이 있다면 그는 더이상 ‘명예’를 누릴 수 없다. 이게 무슨 황당한 ‘악마주의’냐고? 내가 겪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어느 사회에나 조금씩은 있게 마련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특히 심한 ‘집단주의’의 문제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 ‘가족주의’의 문제이다. 그런데 예컨대 ‘정당한’ 권력은 대중에게 가족을 해체하라고 요구해도 되는가? 아니다. 혹은 가족을 해체하라고 주장하는 지식인이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러나 가족과 그 확장에 지나지 않는 ‘집단적 묵시’들이 송두리째 해체되지 아니하고는 내게는 그 어떤 ‘진보’도 아무 의미가 없다. 아니 이건 과장이다. 적어도 이기기 위한 노력을 투여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내 발언은 ‘주장’일 수가 없다. 나는 개인주의자일망정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남의 가족을 박살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지 못하다. 그거야말로 내가 개탄해 마지않는 얼치기 계몽주의자들의 특기 종목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기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싸우고 싶지도 않다. 이건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기는 편이든 지는 편이든 무익한 싸움에 다치기만 할 뿐이다. 요컨대 나의 발언은 ‘투쟁’이 아니다.

그러나 내게 싸울 의사가 있든 없든 그와 무관하게 한국 사회에서 ‘다수’는, 그들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표방하건 그 어떤 도덕적 정당성을 견지하건 그 어떤 아름다운 목표를 추구하건, 단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적’이다. ‘다수’라는 ‘집단주의’의 폭력이 이미 나를 적으로 겨누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글쓰기가 ‘설득’을 구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정반대로 ‘다름’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뭉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지기 위해 글을 쓴다.

엄청난 오만이라고?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너 따위를 상대로 싸울 만큼 사람들이 할 일이 없냐고? 그렇지 않다.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이 폭력에 맨몸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심지어 ‘소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라도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면, 집단주의의 폭력을 모면할 수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회적 소수’일수록 폐쇄적 가족주의는 더 강해지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가진 거라곤, 믿을 거라곤, 의지할 거라곤 가족(혹은 ‘가족’ 같은 동료들)밖에 없다.

‘영원한 패배자의 논리’라는 지적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한국처럼 ‘소시얼 캐어’가 개판인 나라에서 몸 건강히 태어난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일이고, 마땅히 사회가 보장해야 할 ‘소시얼 캐어’의 영역을 개별가족에게 몽땅 전가하고 있는 나라에서 미우니 고우니 해도 끝내 한 배를 탈 수밖에 없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한국에서 ‘소시얼 캐어’의 헤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지부 소관이 아니라 법무부 소관이다. 교도소에 가면 먹여 주고 재워 준다.)

뜬금없이 ‘소시얼 캐어’를 들먹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바로 거기가 내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할지라도 끊임없이 존재 증명을 시도하는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 여덟 시간의 노동을 감당할 체력이 도저히 안 된다. 그것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흔히 ‘노가다’라고 하는 육체노동은 꿈도 못 꾼다. 사실 글쓰기도 내게는 중노동이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왜 원고 청탁을 수락했었나를 후회하고 있다.(하긴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어쩌겠는가.) 머리 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나마 대단치 않은 머리만으로 먹고 살기에도 벅차서 머리를 좀더 살찌울 기회도 가지지 못했고, 생활의 불안정이 가져다 준 신경쇠약에 벌써 몇 년째 시달리는 통에 머리 쓰기조차도 이제는 만만치 않다.(도대체 이런 자가 ‘먹물’이라니!) 게다가 내게는 노동력을 재생산할 공간(가족)도 없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가족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그래서 ‘가족’ 같은 동료집단도 가지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가 접해 온 모든 공간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깍두기’였고, ‘왕따’였다.

물론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한국 사회의 보통 국민인 내가 처음부터 ‘다수’를 적대시하고 ‘마스터베이션’을 존재 확인 수단으로 삼았던 건 아니다. 나는 80년대에 유행하던 노래 가사처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는 말을 감히 꿈에서도 못할 만큼 비겁하다.(얼마나 비겁하면,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모면하려고 이토록 온갖 변설을 늘어놓겠는가.) 진심으로 말하건대 무릎을 꿇고서라도 살 수만 있다면 백 번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그런데 웬걸?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는 무릎을 꿇으면 더 잔인하게 짓밟아 버린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나로서는 무릎을 꿇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점잖은 ‘먹물’들께서는 이렇게 응수하신다. ‘피해의식’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당신이 대신 살아 줄 거야?” 내가 하다못해 초등학교 시절의 또래집단에서부터 ‘집단적 묵시’에 온전히 동참할 수 없었고 그래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하다. 나는 ‘집단’의 판단(관행)에 앞서 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발언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하기에는 힘이 부치는 나를 그 ‘집단’이 대신 살아 줄 것이 아니므로.

나는 이런 폭력적 사회 구조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서서히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천만에! 오히려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적인 ‘희망’은 지금의 사회 구조에 기생하는 기득권 세력을 청산할 수 있는 ‘대안 세력’(말 나온 김에 부언하자면, ‘시대착오’라고 비웃어도 좋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은 노동자 계급뿐이라고 생각한다)에 있을 터인데,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대안 세력’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내부의 ‘집단주의’도 함께 자라난다. 아니,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집단주의’에 의지하지 않고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힘을 키울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 사회에는 희망이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그래서 나는 나의 희망과는 별 상관없는 사회의 희망을 놓고 함부로 떠들지 않는다.) 그래도 산다. 그리고 그래서 떠든다. 어차피 질 싸움인 줄은 뻔히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 전까지 피할 방법은 없다. 때리면 맞고(아프다), 비웃으면 조롱당하고(화가 난다), 따돌리면 혼자서나마(쓸쓸하다), 지더라도 개겨야지 어쩌겠는가. 다만 곱게 만만히 죽어 주지 않고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도 ‘투쟁’도 아니고) ‘저항’한다. 나에게 그 존재 자체로 싸움걸고 있는 적어도 이 나라의 모든 ‘다수’에 대해.

한 말씀 더

나는 이 글에서 ‘먹물’의 ‘자기분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리고 써놓고 보니 이 글 자체가 나의 ‘자기분열’만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지리멸렬한 개인사까지 늘어놓고 있으니,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먹물’의 문법으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계몽주의를 얼치기라고 비웃기는 해도 그들의 선의만큼은 인정한다. 그 나름의 고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성찰도 없이 거저 먹자고 들었다면 ‘먹물’의 범주에 집어넣어서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는 그런 부류를 ‘정치깡패’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고민은 ‘자기 입장’에서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애기는 쏙 빼놓고 남의 얘기만 실컷 늘어놓는 소위 ‘기지촌 지식인’조차도, 그렇게밖에는 애써 묻힌 ‘먹물’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내면적 고민은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먹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먹물’을 무기삼아 대중을 강간하거나 아니면 마스터베이션에 자족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천박한 ‘대중사회’를 자신의 준거집단으로 삼을 수는 없었던 나머지, 시민사회의 기반이 공고한 외국의 역사적 경험들을 편력하면서 ‘먹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그러나 이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 남의 나라 얘기 또한 어차피 지금 여기에선 ‘강간’ 아니면 ‘마스터베이션’이긴 마찬가지다). 물론 그러한 고민에까지 이르게 된 데에도 어김없이 지극히 ‘개인사’적인(그래서 동시에 사회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게 바로 그가 기반하는 그 나름의 ‘자기 입장’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들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특히나 ‘먹물’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군사 파시즘에 멍들어 집단주의에 사로잡힌 사회의 획일적인 분위기에서 공부를 했을지라도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는 항상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니까.(어쩌면 이 역리가 바로 먹물들이 ‘자기 분열’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혹시 반대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먹물’의 자존을 위해서는 무릇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이 ‘입장’들을 제거해 놓고서 ‘자기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그 고민들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사회의 ‘먹물’들이 ‘자기 분열’에서 헤어나올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스스로 배운 바와 생각한 바에 정직해지는 길은 그러한 ‘자기 분열’을 있는 그대로 까발겨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잘난 먹물 팔아 권력을 추구하고 명예를 도모하려는 응큼한 속셈이 아니라 ‘먹물’ 본연의 사심없는 고민의 발로였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나부터 까발겨 놓은 것이다. 하다 못해 나의 아주 ‘독특한’ 개인사에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구조는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다. 다소 극단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내가 접해 왔던 사람들만 특별히 이상한 사람들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그건 당신의 자유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살 것이니, 당신의 ‘입장’에서 정직하게 판단하시라.

발표지면 <한국의 지식게릴라>(현대사상 특별증간호, 한국의 지식인 3), 민음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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