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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진술  Private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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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이다!
작성자 똥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한다.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세상에 내던져지면서부터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도 하지만 기실 그건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사이에 내던져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적응해 간다. 그걸 일컬어 ‘사회화’라구 하던가. 그건 사람이 세상에서 서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일종의 규칙을 익히고, 그 규칙에 스스로를 적응시켜가는 과정일게다. 만일 도저히 그 규칙에 적응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저히 세상을 살 수 없겠지. 하지만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은 무섭다. 자신에게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의 규칙 앞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방어기제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조건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싶을 거다. 그래서 기를 쓰고 규칙에 적응하려고 하겠지. 또한 스스로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규칙에 대해 아무 불만도 없다. 또 누군가는 예외이기를 원한다. 당당하게 혹은 비굴하게 스스로에게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방어한다. 또 누군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규칙을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규칙을 머리 속에 만들어 심지어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강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또 한 가지의 방어기제가 있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기.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 패배하되 그 자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어릴 적의 기억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교실 맨앞자리에 앉아서도 칠판을 3등분하면 왼쪽과 오른쪽의 글씨는 보이지 않는 꼬마가 시험을 보러 들어갔다. 시험지에 오자가 있어 감독교사가 칠판에 문제를 고쳐써준다. 그는 자신만을 위해 그 내용을 읽어달라고 요구하거나 혹은 감독교사나 친구들의 의혹(?)의 시선을 받으며 칠판 앞으로 걸어나가 문제를 읽고 들어오는 대신, 그 문제를 과감하게 그리고 너무나 당당하게 틀리는 쪽을 선택한다. 시험 점수 따위야 알 게 뭐란 말인가. 운동장을 한 바퀴 뛰면 반 바퀴가 떨어지는 꼬마가 있었다. 그는 경기의 규칙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은 앞에서 출발하게 해달라고 구걸(!)할 필요도 없었고, 혹은 절대로 뛰지 않겠다고 떼를 쓸 이유도 없다. 차라리 어슷비슷한 정도로 꼴찌라면 한번쯤은 탈꼴찌의 의지를 불사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웃음거리가 되면서 그냥 뛴다. 그리고 웃음거리가 된 것에 만족해 버리면 그뿐이다. 전혀 창피하지 않다. 그는 오히려 자랑처럼 떠든다. 세상이 그를 버렸을 때 그도 이미 세상을 버린 것일까.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하다. 어쩌다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개는 창피해서 감추려고 하게 마련인데, 그 녀석은 어찌된 일인지 실수담을 자랑스레 늘어놓는다. 그리고 마치 제3자의 실수를 놀리듯 함께 키득거리곤 한다. 무언가 비범하다는 것은 미덕이다. 미덕일까.

어려서부터 열외였다. 넌 구경이나 해. 그래 난 뭐 구경이나 하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난 무능한 인간인데. 한 번도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앗다. 무능은 내 미덕이므로. 나이가 들었다. 이젠 싫어도 세상 안에서 밥은 먹으며 살아야겠지. 이런 빌어먹을. 난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다. 난 늘 구경꾼이었으므로. 게다가 원래 훈수 두는 사람이 판은 잘 보이는 법인지라, 어줍잖은 인생상담이 청산유수다. 격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니 자신을 격리시킨 규칙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겠지. 바라보기만 하는 규칙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세상 밖에 내던져진 사람은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감수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짝사랑하게 마련이다. 너희는 그렇게 살아라. 그럼 난?

그래 나도 세상 속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정말로 한 번쯤은. 그러나 열외는 끝까지 열외인가 보다. 일이 꼬이려면 지독스럽게 꼬인다고 가족도 없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때로는 참 좋다. 적어도 가족을 그토록 심하게 격리시키지는 않으므로. 허나 어쩌랴,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안에서인들 새지 않을까. 아하, 아니다. 거꾸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샌 거겠지. 나는 한 번도 부모나 형제로부터 가족으로서의 신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저 녀석은 원래 저런 애라고? 이미 ‘비범의 미덕’이라는 방어기제는 집안에서부터 준비된 거다. 넌 남다른 애야. 부모의 욕심으로 말하자면, 설마 웃음거리로 남달라지기를 바라기야 했을까만, 어쩌랴 의도와는 전혀 어긋났을망정 정말로 남다른 불리한 조건으로 낳아놓은 걸. 사람을 가장 기본적으로 사회화시켜준다는 가정이라는 공간에서부터 나의 사회화는 포기되었다. 물론 책임 전가는 아니다. 그 또한 그들의 탓이 아닐 터이다. 난 그래서 스무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돼버리기 이미 오래전부터 정신적으로 아니 사회적으로 고아였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방어기제는 무의식의 저편으로 숨어버리고 세상을 향한 짝사랑만 점점 애절해질 때, 나에게 되돌아온 딱지는 여전히 ‘열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사회화의 경험이 비슷한 사람에게서 친근감을 느낀다. 자신이 길들여진 대로 자기와 비슷하게 길들여진 사람에게서 정서적 안정을 느낀다. 누구에게서도 길들여지지 못한 나는? 이젠 길들여지고 싶어도 사람들이 등을 돌린다. 더이상 비범은 미덕이 아니다. 내가 길들여지고 싶다고 느꼈을 때 이미 나는 더이상 누구도 선뜻 길들이고 싶지 않을 만큼 심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악순환이다. 악순환을 멈추려면 어느 한 쪽이 풀려야 할거다. 나는 내가 사는 방법을 바꾸고 싶어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그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려 하지 않는다. 내 존재는 너무 가볍다. 아무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아니다.

내가 그나마 살아있을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인간이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문제는 내가 이미 누구에게도 선뜻 나를 길들여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거다. 내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타인에게 내 부모가 진즉 했어야할 역할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세상은 가혹하다. 살아남든가. 영원히 내쫓기든가. 그건 그의 능력의 문제일 뿐. 아무도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는다. 하기는 그렇다. 도대체 누가 세상에서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닌 나이 서른 먹은 인간한테 그런 배려를 해주랴. 이제 혼자 서야할 나이인데. 그런데 이제는 혼자 서라는 건 그동안 혼자이지 않았다는 걸, 살아가는 방법을 나름대로 익혔음을 전제한다. 난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내 사정일 뿐이다. 마치 눈이 나빠서 칠판이 안 보인 것이 내 사정일 뿐이기에 한 문제쯤은 틀려야 했고, 한 바퀴 뛰면 반 바퀴 떨어지는 체력도 내 사정일 뿐이기에 늘 스탠드 한 구석에서 구경만 해야 했던 것처럼. 이 나이 먹도록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못한 것도 내 사정이므로, 더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해도 누구한테 사정할 일은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모두 자기 잣대로 잴 뿐이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모를 것이다. 거절은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생떼에 불과한 내 어거지만 늘 초라했다. 난 그렇게 구경꾼에 익숙해져 왔다. 어느 때부터인가 더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끼워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쫓겨난 것도 가슴아픈 판국에, 덤으로 기가 차지도 않은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내가 고립을 즐긴다고, 나 스스로 구경꾼의 자리를 선택했다고. 한 술 더 떠 너는 남다른 능력이 있어, 너는 그 걸 하면 돼. 물론 훈수두는 사람에게는 판이 더 잘 보인다. 하지만 잘 보이는 것처럼 보일 뿐, 그건 진실이 아니다. 구경꾼은 책임이 없기 때문에 용감할 뿐이다. 그게 멋있어 보여? 대단해 보여? 웃기지 마라. 세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세상 속에서 뛰어다니지 않고는 더이상 제대로 된 훈수도 둘 수 없음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데. 더이상 비범은 미덕이 아니다.

절대로 동정을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살아왔다. 내 나이 스물 다섯이 됐을 때 나는 동정을 구걸하게 되었다. 살고 싶다는 인간의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다. 그 본능이 나를 더 초라하게 한다. 더이상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더이상 지치기 싫다. 난 더이상 구경꾼일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여전히 운동장 바깥의 스탠드로 내몬다. 넌 구경이나 해. 달리기도 못하잖아. 아니 그게 내 탓이냐? 그러나 돌아오는 반문은 어쩔 수 없다. 그럼 너 못난 게 우리 탓이냐? 그래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쓸쓸히 뒷걸음칠 수밖에. 누구에게 항의한단 말인가?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나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극단적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주 싫어했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했지, 그저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다. 물론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싫어하는 이유야 굳이 따져 물을 것도 없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늘 참 좋은 오빠, 매우 괜찮은 선배, 아주 훌륭한 친구라고 칭찬받았지만, 이상하게도 썩 괜찮을 필요도 없는 그저 쓸만한 ‘남자’로도 영 아니었다.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나는 좀 쓸쓸하기는 하지만, 안 되는 일에는 별로 안달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저 내가 잘 하는 일이 있다면 더 잘 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 낫다. 그러나 그 이유만큼은 사실 몹시 궁금하다.

혹시나 내 머리에 나도 모르는 뿔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밤새 거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기도 했다. 한 친구와 나눈 대화를 그대로 옮기자면,
“어디 괜찮은 남자 하나 없나?”
“어떤 남자?”
“응, 말 잘 통하고, 응, 뭐….”
“어? 그럼 나네?”
(물론 이 대목에서 어떤 기대가 있었다면 내가 순진한거구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뿐, 이 대목까지는 가벼웠다.)
“에이, 너 빼구.”
(어? 이것봐라? 가는 데까지 가보자.)
“내가 말이 잘 안 통하니?”
“아니 누구보다도 말이 잘 통하지, 아마도?”
“근데 왜 난 빼는데?”
(이건 거의 약올리는 질문이렷다. 갑자기 골려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내 머리에 뿔이 달린 거니?”
“응, 너 머리에 뿔달렸어. 몰랐어?”
(이런, 내가 골려먹자고 한다고 같이 골리려 들다니! 그래도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는 아는 녀석이군.)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늘 이런 식이다. “어떤 남자?”라고 물으면 똑똑한 남자, 착한 남자, 등의 조건을 열거하는데, 그가 보기에 내가 그다지 안 똑똑하고 별반 착하지 않다면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고, 아주 똑똑한 편에 속한다거나 혹은 더할 나위 없이 착하다고, 게다가 ‘진심’이라는 꼬리표까지 어김없이 붙여가며 대답을 하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그냥 무조건 아닌 것이다. 왜? 머리에 뿔이 달려서! 사실 대답은 문제 안에 들어 있다. 내가 말도 통하고, 똑똑하기도 하고, 착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남자’는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는 별로 불만스러울 것이 없다. 나는 ‘남자’이고 싶지 않으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런데 질문을 좀더 진전시키면 문제가 분명해진다. “넌 ‘남자’하고 말이 잘 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넌 ‘남자’가 적어도 네가 바라는 만큼 똑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넌 ‘남자’가 네가 바라는 만큼 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정말로 그런 남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난 아마도 이런 얘기들로 골려먹을 수 있다고 멍청하게 시간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통해야 한가한 말장난으로 유쾌하게 웃어보기라도 할테니 말이다. 그래, 넌 뿔 달린 도깨비를 찾고 있다구! 그런데 그래놓구서 뿔 달렸다고 싫대?

게다가 한 술 더 뜨면 괴롭히기까지 한다. 세상에 도깨비는 없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명약관화하다. 아무리 말이 잘 통하는 사람도 어쩌다가 어긋날 수 있고, 아무리 똑똑해도 가끔 멍청한 짓을 할 때도 있으며,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한결같으란 법도 없다. 그리고 사실 난 뿔이 안 달렸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기어코 그걸 찾아내려고 기를 쓰면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야!”라고 비난한다. “누가 언제 뭐랬어?”가 “그러니까 넌 안돼!”로 이어진다. 이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남성중심 사회는 매우 공정하지 않은 잣대로‘여성’을 배제하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들 또한 전혀 공정하지 못한 잣대로 철저하게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다.

내가 왜 변변한 ‘연애’를 못했을까. 아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뿔 달린 도깨비일 수밖에 없었을까. 처음에는 단순하게 내가 신체적으로 왜소하고 성격적으로 섬약하기 때문에, 남성의 성적 매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미진한 구석이 있다. 남자들이란 ‘평생 어른이 못 되는’ 족속들이고 그래서 그만큼 귀엽고 약한 구석을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그런 남자에 대한 일종의 연민도 성적 매력의 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라고 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섬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한 친구는 내가 지독스러울 만큼 완강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며 ‘사악하다’고 농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나의 약함은 경원의 대상이고 또다른 남자들의 약함은 연민을 불러일으킬까, 또는 왜 나의 강함은 경원의 대상이고 또다른 남자들의 강함은 매력의 원천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남자라면 강하고 굳센 모습을 지켜야 하리라고 흔히 기대되는 바로 그 부분에서 섬약하고, 반대로 남자라면 예외없이 약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부분에서 의외로 지독스러울만큼 완강한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강함이 주는 매력에 끌려 다가가다가도 약한 모습을 발견하면 보듬어 주거나, 약한 모습에서 느끼는 연민에서 시작하더라도 그래도 사내자식이라고 강한 모습을 보이면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할텐데, 나는 정반대인 것이다. 섬약함의 부담을 감수하고 다가오다가도 뜻밖의 완강함에 부딪혀 벽을 느끼거나. 혹은 지독스러운 모습에 질리면서도 호기심으로라도 버티다가 엉뚱한 섬약함에 거듭 실망감만을 느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낯설기만 한 정서적 혼란을 경험한다. 누구나 익숙한 것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면 이토록 낯선 상황은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는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이유를 찾아 냈다. 내가 열 여덟 살 까까머리 소년일 때부터 배불뚝이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테면 ‘연애하고 싶다’고 할 때의 내가 원하던 관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본 것이다. 무릇 ‘연애’란 본질적으로 창조와 건설의 문법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쌓아가는 것이라고 하며, 두 사람 사이의 공감대를 축적하는 것이고, 공통의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서로의 일상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내가 원했던 문법은 전혀 ‘연애’가 아니었으며, 연애가 아닌 다른 무엇을 원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있는 것조차 버거워하는지라 결코 없음에서 있음을 만들어 내려는 갈망들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벽들을 부수려는 방향으로만 가려했기에 새로운 것을 쌓으려는 열정들과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요컨대 ‘둘이 하면 연애고 셋이 하면 세미나’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이 원했던 관계의 문법은, 다름 아니라 ‘치유’와 어쩌면 ‘치유를 통한 성숙’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연애하고 싶다’고 느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이를테면 ‘성적 매력’의 정체는, 바로 깊은 ‘상처’였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의 완강한 자폐의 벽에 부딪쳐 거절당하기도 했고, 혹은 때로는 ‘우리 관계가 꼭 불륜같아’부터 심지어 아주 노골적으로 ‘난 근친상간은 안 해’까지에 이르는 그런 ‘불안’ 앞에서 무기력하게 물러서기도 했으며, 또 때로는 한사코 ‘우리 둘만’의 꿈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에 나 자신 지치기도 하면서 또는 상대방을 실망시키기도 하면서 그렇게 종말을 고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도 적어도 ‘애인’에게는 자기의 상처를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참으로 쓸쓸하게도 나는 그냥 그렇게 늘 ‘애인에게도 못하는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친구’였을 뿐이다. 어느 후배의 적나라한 표현처럼, 옆집 아줌마같은. 그랬기 때문에 연애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대로 호감어린 시선을 받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아예 상종 못할 인간망종이어서 연애를 못한 것이라면 그런 평가도 없었을 겠지만, 내가 남자일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원하는 관계가 딱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좀더 공곰히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개인간의 사적이고 정서적인 관계가 ‘치유’이거나 ‘치유를 통한 성숙’일 수 있는 문법은 ‘자매애’밖에 없다. 남자들끼리의 ‘우정’이라는 것의 저열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연애’도 엇비슷하게 헷갈리기는 하지만 방향이 엇나가버릴 수밖에 없으며, 공동의 목표를 전제하는 ‘동지애’나 ‘동료애’ 따위도 목표가 명확한 만큼이나 개인의 치유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내가 원했고 또한 정서적으로 가장 친숙함을 느끼는, 그런 관계방식은 이를테면 ‘자매애’쯤이었을텐데, 불행하게도 나는 여자가 아니다. 어느 분이 소설에서 읽었다며 내게 전해 준 “I'm a lesbian trapped in a man's body.(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이다.)”라는 문장이 새삼스럽게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안개가 걷힌 것처럼 환하다. 되지도 않을 ‘연애’에 목 매고 쓸데없이 휘둘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게 연애든 아니든, 그저 치유이면 족할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고 충분히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적으로 ‘연애’가 아닌 관계가 과연 ‘충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전혀 ‘연애’가 아닌 관계를 원하면서도 끝내 ‘연애하고 싶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젠 누구 앞에서도 “너와 연애하고 싶어”라고 아리송하게 돌려말하는 대신 “너의 상처를 안아줄께”라고,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안에서 치유되겠지.

개는 왜 짖는가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적 차별들의 경계에 서 있다. 맹인 복지도 형편 무인지경인 나라에서 약시자가 설 자리는 없다. 가족주의 사회에서 그 울타리 없이 독신가족의 세대주로 10여년을 버텨왔지만, 지구 반 바퀴 너머에나마 버젓이 부모가 생존해 있으니 고아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고아’보다도 더 극심한 인격적 멸시를 감당해야 하는 ‘가출 소년’의 처지이다. 심지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났으면서도, 나는 전라도 출신의 딱지까지 붙이고 있다. 아니, 나는 80년대에 나의 20대를 고스란히 저당잡히고도 그 흔해빠진 ‘운동권’조차도 아니다. 내가 여전히 남성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나의 남성을 혐오하는 것은 차라리 덜 이상하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현실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모두가 승리의 희망을 이야기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패배할 수밖에 절망을 이야기하겠다. 우리 앞에 놓인 삶은 열려있는 빈 공간이고, 자유로운 창조로 채워가야 하리라는 희망의 속삭임쯤은 지극히 지당하다. 삶은 물론 싸움으로서 창조해야 할 빈 공간이다. 그러나 창조는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도, 의지의 자유에서 나오는 것도, 의식의 각성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그 싸움의 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그 행위는 외적 조건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싸우자는 것이지 신선놀음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러한 창조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희망중독자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왜 싸우는지 모르면서 싸우면 좌절할 수 있고 좌절할 싸움은 하지 않는다. 적어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좌절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호기롭게 “이젠 당위적인 구호는 필요없다”고 떠들어대기도 하지만, 그런 말조차도 필요없이 애당초 싸움이 당위가 아니라 생존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도 있다. 좌절하고 싶지는 않지만, 싸우고 좌절하기를 반복하고 그러다가는 혹 왜 싸우는지 모르게 된다할지라도 그러안 이유 따위로 결코 싸움을 포기하지는 않을 그런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

삶이 또한 당위가 아니듯, 나는 싸울 방법을 몰라서 답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심으로 싸우기 싫은데 싸우는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아 남을 수 없는 생존의 절박함이 답답함의 근원이었다. 나는 왜 사는지 모르는 만큼이나 왜 싸우는지도 모른다. 왜 사는지 모르고도 사는 것처럼, 왜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싸울 수 있다. 싸울 의지가 없어도, 전혀 싸움을 의식하지 않고도 그저 살아내는 게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태어남을 선택한 일이 없듯이 싸움을 선택한 일도 없다. 만일 선택했다면 항상 싸움의 반대편 선택지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자유로운 창조 따위의 희망어린 모색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내게는 그 이상을 감당할 현실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능력은 있지만 ‘이데올로기적인 지향’에 입각해서, 새로운 인간관계 혹은 새로운 싸움의 방식의 ‘자유로운 창조’를 위해서,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지 용인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볼 여지도 없이 ‘거부’가 아닌 ‘박탈’의 상황 앞에서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삶의 조건을 도무지 현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말 그대로의 ‘이데올로기’의 폭력적 억압을 얼마나 ‘현명하게’ 회피 또는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이 정작 고민이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싸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유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창조의 동력은 물론 건강한 노동이겠지만 노동의 소외라는 현실 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싸움의 양식들이 창조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도대체 이런 토론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토론은 끝났고 이제 실천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 주장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나 역시도 개인이 어떤 지향으로 어떤 실천을 하느냐는 오로지 개인의 결단일 뿐, 설득한다고 설득될 성질의 것도, 강요한다고 강요될 성질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분명히 설득을 위한 토론은 무의미하다고 긍정한다.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떠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수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결단들이 어느날 갑자기 달마대사 득도하듯 얻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주의자’로 타고나는 사람은 더더구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의 의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분명 혁명은 수출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자극된다.

물론 나는 토론이 아니라 전쟁이나 차라리 테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라면 얼마든지 긍정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때리고 있는데, 어줍잖게 ‘때리지 말고 말로 해’라고 현실을 호도하고 싶지 않다. 또는 승리의 관점에 서지 않은 전쟁은 이미 전쟁이 아니라 테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진정한 테러리즘에 대해서라면 비록 그것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언젠가 지존파 사건이 났을 때 나는 ‘아마조네스파’(?)를 생각하며 기분좋게 웃었다.

뭐 하나 더 달고 나온 게 벼슬이라고 아무데나 놀려대는 놈들은 모조리 붙들어다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댕겅댕겅 거세를 해버리고, 마누라 두들겨패는 놈들도 모조리 끌어다 그 잘난 손모가지를 자근자근 꺾어버리고,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며 여성을 희롱하는 놈들은 혓바닥을 뽑아 썩둑썩둑 잘라버리는, 아니 아예 사내놈이라고 생긴 것들은 그저 그 이유만으로 다 잡아다가 정신 번쩍 들도록 늠씬 두들겨 패주는, 그런 테러 집단이나 하나 나왔으면 속이 후련하겠다고. 나? 나는 내 눈 앞에 그런 신나는 풍경이 펼쳐진다면,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맞아죽는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다만 내가 가진 무기는 나의 합리적 이성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말’로 토론한다. 설득을 목표하지 않을지라도, 승리 따위를 꿈꾸지 않을지라도, 여기에서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나는 ‘말’로 전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테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비유가 허락된다면, 나의 토론은 전쟁보다는 테러에 가까울 것이며, 나 또한 그 편에 서기를 원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는 전쟁을 수행할 만큼의 여력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부당함에 대하여 부당하다고 떠들어댈 뿐이다. 듣거나, 말거나!

발표지면 . 1997
단행본수록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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