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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체성’에 관한 한 고찰 - 정희진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작성자 똥개

≪말과활≫ 2호에 실린 정희진의 <‘레드’와 ‘레드헌트’를 생각한다>에는 ‘일부’ 또는 더는 ‘일부만은 아닌’ 좌파의 현재 모습(더 적나라하게는 ‘수준’)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의 논지에 대체로 동의한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말 문제다’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게도 혹시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가령 “동일성의 기준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고, 동일성을 놓고 경쟁하며, 외부에 배타적인” 모습이 없었는지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던 점에서 매우 유익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른 한편, 나는 그 글에서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적잖이 마주쳤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작동하지 못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견에서 오는 불편함을 으레 그러려니(“원래 그런 사람이야!”) 멀찌감치 밀쳐놓음으로써 무시해치우거나 또는 반대로 곧바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여기는 강박 속에 애써 ‘사소한 차이’로 얼버무리며(“좋은 게 좋은 거야!”) 주저앉지 않으면 심지어 상대를 억지로 굴복시키려 들기까지 할 뿐, 그 불편함에 마주서 견디며 그것에 관해 진지하게 털어놓고 말하기를 꺼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내가 느낀 불편함에 관한 질문이자 그로부터 촉발된 사색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그 불편함의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좌파 정체성’에 관한 정희진의 비판적 입론에 큰 이견이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좌파’라는 자기규정을 철회하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희진에 따르면, 그것은 “도덕적 우월감이 자동부착되고, 자신을 타인에 대한 판관으로 취임시키”는 “명명의 권력게임”이다. 과연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무의식 속에라도 그런 음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지나 않은지를 살피려,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내가 스스로를 ‘좌파’라고 의식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그러자 그 자체로는 매우 타당한 지적으로만 보였던 정희진의 입론과 내가 살아온 현실 사이에 사소할 수도 있는, 그러나 분명한 간극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내가 스스로를 ‘좌파’로 인식한 것이 과연 “가장 빠르고 올바른 국가 건설 방식”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경합”에서 어느 진영을 동일시하는 과정이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기본적으로 ‘좌파’는 자본주의 너머를 상상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지향한다. 그것이 ‘우파’와 다른 점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1990년대 초의 대학사회라는 제한된 시공간으로 시야를 좁혀보면, 대다수가 (비록 ‘말로만’일지라도) 그 범위에 포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그 주류는 이른바 ‘NL’이었다. 이때 ‘좌파’라는 명명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닌 “나는 무엇이 아니다”(좀더 노골적으로는 “나는 그들이 아니다”)라는 인식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말하자면 그것은 정체성을 규정한(identify) 것이라기보다 내가 속한 세상 속에 나를 위치지은(position) 것에 가깝다. 게다가 그것은 사회통념상의 ‘우파’조차도 아닌 ‘NL’과의 관계를 표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말하는 ‘NL-PD’ 구도는 다분히 허구적이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나는 스스로를 ‘좌파’라고 의식하긴 했어도 ‘PD’ 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으므로 ‘PD’의 일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나는 누군가 나를 ‘PD’로 분류하여 명명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 무렵 어느 선배가 “누가 ‘좌파’ 어쩌고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흔히 말하는 PD가 단일 정파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범PD’라는 식으로 뭉뚱그리기도 하는 거고, 대충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통칭이라고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꾸했던 기억이 있다.(선배가 “그러니까 좌파가 아니라 ‘잡파’구먼.”이라고 받아쳐서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

굳이 케케묵은 얘기를 끄집어낸 건, 이때 “나는 그들이 아니다”라는 인식의 단초가 결코 ‘북한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는, 또는 적어도 그런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는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단지 그런 차원의 ‘이데올로기 경합’이었다면, 정희진이 명확히 지적했듯, “일반인에게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북한’이나 ‘미국’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라면 얼마든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대화할 수 있고, 굳이 스스로를 그들로부터 ‘분리’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둘러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이 쪼개질 무렵 내가 줄곧 주장했던 것은 “문제는 ‘종북’이 아니라 ‘패권’이다.”였다. 그 ‘패권’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마도 정희진이 지적한 ‘정체성의 정치’일 것이다.

어쩌면 운동권의 핵심부에 가깝게 있던, 따라서 의식적이든 아니든 ‘이데올로기 경합’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라면 ‘민족이냐 계급이냐’ 따위가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그 맥락에서라면 “좌나 우나 설거지 안 하긴 마찬가지”라는 비아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처럼 주변부에서 기웃거리던 사람들에게는 저 높은 곳의 ‘NL’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치는 ‘심정적 NL’들이 당장 더 큰 문제였고 심지어 실존적 위협이었다. ‘NL’은 얼마든지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해도, 그 정치적 자장 안에 광범위하게 포진한 ‘심정적 NL’들에게는 애당초 ‘이념’도 ‘정치적 입장’도 분명하지 않았다. 일체의 질문도 이견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건 차라리 ‘종교’였다. 물론 맹목은 종교가 아니라는 정희진의 지적은 예리하지만, 그렇게 ‘근본주의적’으로 종교를 규정해 버리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 개신교의 주류도 종교는 아닐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심정적 NL’들이 순박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던 것도 진실의 어김없는 일면이다. 그러고 보면 도무지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는 ‘골수 NL’(그래봤자 전혀 ‘이념’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심정적’ 차원이지만)이었던 이가 어느날 갑자기 ‘영생교’에 빠져든다거나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고, 그들의 상당수가 20여 년 뒤엔 (통합진보당이 아닌) ‘노빠’라는 또다른 ‘종교「의 일원으로 여전히 맹목적인 헌신을 쏟아붓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다.

말이 나온 김에 내처 가자면,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사회적 의제들이 종교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식민후기 사회의 ‘정상 근대’의 양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언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제화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사람들을 질식 상태로 몰아간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 “나는 좌파다”라는 언표는 소극적으로는 “나는 그런 질식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인식의 발로이고, 적극적으로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과 ‘연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요컨대 “‘이미 나는 좌파’라는 의식이 ‘공부’를 대신하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질문을 멈추지 못하고 이견을 감출 수 없기에 스스로를 ‘좌파’로 여기는 것이다. 비록 (무슨 대의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더 치열해져야 함을 알기에 감히 ‘A급’을 자처하는 민망한 짓은 꿈도 못 꾸고, 더러는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헛발질에 스스로 ‘낙제점’을 매기며 반성하는 일도 드물지 않지만.

애초의 계기가 그렇더라도 20년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건 이미 ‘포지션’이 아니라 ‘정체성’이나 다름없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시시때때로 질식 상태로 몰아넣는 ‘패권’이 여전히 내 일상을 옥죄고 있다면, 심지어 양상을 달리하며 더욱 강화되기까지 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 ‘포지션’을 떠날 수 있을까. 무릇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다.(그래서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NL, PD 타령이냐”는 식의 비판에 맥이 풀리곤 한다. 대체 누군들 그러고 싶겠는가.)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 ‘패권’을 관철해온 ‘그들’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번도 스스로 “나는 좌파”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지겹도록 ‘대동단결’이라는 주문(呪文)만을 맹목적으로 되뇌며, ‘좌파’라는 명명을 통해 드러내려는 차이를 깔아뭉개기 일쑤였다.

이 차이를 애써 무시하는 더 막강한 발화자도 있다. 가령 ‘조선일보’나 ‘국정원’ 또는 ‘전경련’에게는 (설마 ‘설거지’를 문제삼지야 않겠지만) 어차피 다 때려잡아야 할 ‘그놈이 그놈’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당사자들의 이토록 숨쉴 수 없는 갈등조차도 제3자가 볼 때는 같은 사람들로 보인다.”는 정희진의 지적은 정확히 현실의 단면을 드러낸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공명정대(?)한 ‘제3자’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심지어 명백한 ‘당사자’가 짐짓 ‘제3자’를 가장하기까지 한다.(‘좌파’에게 이제 그만 낡은 ‘NL-PD’ 구도에서 벗어나라고 점잖은 충고를 늘어놓는 이들은 십중팔구 ‘NL’의 패권에 포섭된 ‘심정적 NL’들이다!) 그렇다면 ‘그들’(만은 아니겠지만)을 겨냥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정희진의 비판이 엉뚱하게도 (정작 ‘그들’과의 분리를 뜻하는) “나는 좌파”라는 명명을 싸잡아 걸고넘어질 때, 정희진의 시선은 도대체 ‘어떤’ 제3자의 시선인지 나는 궁금하다.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정희진이 ‘일반인 수준’의 상식적인 시민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도 실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 사회에 ‘공통의 관념(common sense)’으로서 상식이 존재하는지부터가 나는 의문이다. 누구에게나 상식이라고 믿는 제 나름의 내용은 있겠지만, 그 스펙트럼의 간극은 하늘과 땅 차이다. 과연 ‘일베’가 주장하는 ‘일반인 수준의 상식’과 ‘이석기 그룹’이 주장하는 ‘일반인 수준의 상식’이 같은가.(물론 내가 보기에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더 많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당사자들은 펄쩍 뛸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일반인’인지는 또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또는 절대 다수가 공유하는 관념이기만 하면 그것이 공존을 위한 토대가 아니라 공멸로 치닫는 욕망의 카르텔이어도 ‘일반인 수준의 상식’이라고 흔쾌히 승인할 수 있는가.

자기인식 없는 연대가 가능한가

게다가 내가 ‘좌파’라는 ‘포지션’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그들’은 ‘NL’(또는 ‘종교화’ 편향을 제어할 어떤 ‘(내부)정치’도 작동하지 않는 온갖 ‘유사정치’ 집단들)만이 아니다. 단지 그뿐이라면 나는 기꺼이 ‘좌파’라는 명명을 포기할 수 있다. 차라리 ‘인문주의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는 맥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내가 자본주의 너머를 향한 상상을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 자본주의 너머를 향한 상상을 손쉽게 ‘철지난 유행’쯤으로 치부해버리려는 이들과 어떤 사안에 관해서든 어떤 맥락에서든 ‘같은 편’에 서는 게 가능할까. 그들과 나 사이에 힘이 공평하다면 혹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의 이해가 주도적으로 관철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현실’이 아니라 ‘공상’이다.

이때 내가 ‘좌파’라는 건, 누구와는 (사안에 따라) ‘같은 편’일 수 있고 누구와는 (궁극적으로) ‘같은 편’일 수 없는지, 나아가 좀더 적극적으로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너머를 향한 지향을 삭제한 채(따라서 끝내 내 이해관계를 배신할 것이 분명한데도) 나에게 입발린 ‘참여’와 ‘연대’를 요구하는 ‘그들의 정치’에 놀아날 의사는 전혀 없다고, 내가 발디딘 곳(stance)을 밝혀두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제3자일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진로가 아닌 다른 차의 주의를 위해서) 자동차의 안개등을 켜는 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좌파라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은 내가 ‘프롤레타리아트’를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으로서 기꺼이 승인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좌파는 부분적인 정치적 입장이지, 전부가 아니다. 24시간 좌파로, 페미니스트로, 일주일 내내 흑인으로 여성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라는 정희진의 지적은 다소 모호하다. 물론 나는 24시간 좌파로 살지는 않는다. 아마 24시간 페미니스트로 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나 ‘페미니스트’라는 범주와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범주는 다르다. 가부장제가 작동을 멈추지 않는 한, 여성은 의식하건 않건 24시간 여성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가부장제 아닌가. 그리고 치열한 페미니스트라면 그런 여성의 삶과 긴장하는 동안은 페미니스트로 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작동을 멈추지 않는 한, 나는 의식하건 않건 24시간 프롤레타리아트로 산다. 내 일상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자본의 힘은 쉴새없이 내게 그 사실을 일깨운다. 자의식 과잉이라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하는 나는 내 의식이 감당하는 한 좌파로 살 수밖에 없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비록 24시간 그렇게 긴장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렇다고 내가 ‘좌파’라는 ‘스탠스’에만 온통 사로잡혀 있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종교화’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일일 게다.)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크고작은 사회적 차별에 직면한 소수자로서 그 차별의 사회적 기제가 작동을 멈추지 않는 한 24시간 소수자로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할 때 나는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스탠스’들을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실을 의식하면 소수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기라도 한다는 뜻일까. 맥락에 따라서는 강조점이 달라지면서 어느 한 쪽이 부차화되기도 하지만, 또는 자본의 힘이 워낙 센 나머지 좌파로서의 입장에 거의 언제나 더 많은 비중이 놓이곤 하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자의식을 하루에 몇 시간은 좌파라거나 지금 내 의식의 몇 퍼센트는 자유주의자라는 식으로 ‘부분’으로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모든 입장들의 중첩이 ‘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을 어떤 ‘정체성’으로도 환원시킬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희진은 ‘그 모든 것이 나’라고 말하는 대신, ‘그 어떤 것도 실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상이 자신을 책상이라고 부르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은 물론 비유겠지만, 썩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책상은 사람이 아니다. 책상에게는 인식도 의지도 없지만, 나는 세상 안에서 자기를 인식할 수도 있고, 세상 속에서 내 이해를 실현할 의지도 있는 사람이다. “모든 지칭은 좋은 의미든 아니든 타인의 의도와 권력에 의한 규정으로 나의 ‘본질’과 무관하다.”는 말의 맥락적 취지는 이해하지만 전적으로 승인할 수 있을지는 아무래도 미심쩍다. 다른 사물들에는 이름을 붙이면서 자기 자신을 예외로 둘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소아병이 아닐까. 또는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는 명명의 주체일 수 있지만, 유독 자신이 그 대상이 될 때만 타자의 언어를 내면화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자면, 어차피 ‘말’이란 본질적으로 ‘타자’의 것이다. 좀더 정확히는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며, ‘나’에게도 ‘그’에게도 온전히 속하지 않지만, 동시에 ‘나’와 ‘그’ 모두에게 속한 것이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하다. 정희진이 적절히 지적했듯, “자신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이미 타인(‘제3자’)의 시선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제3자인가가 여전히 문제이긴 하지만, ‘나를 명명하는’ 타인의(실은 공통의) 언어를 통하지 않고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나친 자의식은 물론 문제지만(세상에 지나쳐서 좋은 건 어차피 없다), 나는 다름아닌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자의식의 핵심이라고 알고 있다. 자신을 상대화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일말의 자의식도 없다는 뜻이고, 그 결과 타인의 의도와 권력의 작용이 내면을 잠식하도록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해, “모든 시민이 각자의 문제나 절박한 관심사를 정치적 의제로 삼고 살아가는 참여와 연대”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어떤 문제를 인식하는 자신을 지칭하지 않고도 그것을 정치적 의제로 삼을 수 있을까. 물론 정희진도 지적했듯 “보편성은 구성되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구성’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일차적으로는 ‘공통의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경험이란 어차피 철저하게 개별적인 것이다. ‘객관적 사건’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경험이 다른 사람의 경험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엇갈리는지를 확인해야, 논쟁이든 연대든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무슨 수로 확인하는가. 바로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는 ‘말’이다.

당연히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아니라면 ‘논쟁’이나 ‘연대’는커녕 공허한 독백에 머물 테고, 그 독백들의 무더기는 엄청난 소음 공해만을 야기할 것이다. 지금 실정이 그렇다. 다른 사람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각자 자기 말만 하는데 무슨 논쟁이 되겠으며, 경험이 공유되지 않는데 어느 세월에 연대가 이루어질까. 현실적으로 논쟁이나 연대의 범위는, 공통의 현실 인식에 기반한 ‘공통의 언어’를 공유하는(혹은 공유한다고 간주되는) 무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연대는 서로의 언어를 배워나감으로써 ‘공통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키려는 노력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보편성’의 폭력‘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쓸지라도 최소한의 소통을 위한 공공재로서 ‘공통의 언어’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가령 계급 이외의 다른 문제를 부차화․비가시화․위계화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서구의 근대만을 ‘정상’이라 여겨서도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민주화’라는 말의 의미를 독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주체를 승인할 수 없다고 해서, ‘일베’에서의 터무니없는 비틀림을 지적하는 일마저도 ‘보편성의 폭력’이라 매도할 수 있을까. 또는 정희진이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면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범주로 싸잡아 아울렀을 때, 그것이 또다른 ‘보편성의 폭력’을 잠재하지는 않는가. 내게도 틀림없이 ‘식민지 남성성’이라 지목될 만한 특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정희진의 말투를 빌자면 ‘24시간 식민지 남성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식민후기 사회’라는 인식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해 없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부차적이라는 뜻도 아니고 ‘계급’이라는 인식틀만 중요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어떤 차이도 사소하지 않으며, 그것을 “가십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그 어떤 시도도 ‘폭력’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폭력’이 과연 보편성이라는 관념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인지를 질문하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위계화’는, 타인의 언어를 배우려 들지 않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려 들지 않는 ‘몰상식’한 이들의 언어를 나만 일방적으로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공통 인식’으로서의 상식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몰상식의 폭력에 굴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내가 마땅히 귀기울여 배워야 할 ‘이웃’의 언어와 나의 ‘본질’과 상관없이 나를 함부로 규정하려 드는 ‘권력’의 언어를 언제나 무쪽 자르듯 구별할 수 있는가.(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체성의 정치’일 것이다.) 또는 구별할 수 있다 한들 과연 ‘누가 이웃인가’라는 문제를 우회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좌파’라는 말이 단지 “명명의 권력게임” 이상의 의미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계급’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공통의 경험을 구성(!)해 온 ‘어떤’ 이웃들의 언어를 배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나아가 앞서 짧게 언급했듯, “모든 시민이 각자의 문제나 절박한 관심사를 정치적 의제로 삼고 살아가는 참여와 연대”가 가능하려면, 관심사를 공유하는 각 개인의 정치적 자원(이해관계를 표현할 언어와 의제화를 실현할 권력)이 동등하게 분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아닐뿐더러 대부분의 문제들은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 자체가 의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상태에서 “다중적 주체들의 이합집산”이 벌어지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언제나 내부의 차이가 내부와 외부의 차이보다 큰”데 개별 주체의 정치적 자원은 불균등하기 때문에 허울좋은 ‘참여’와 ‘연대’는 언제든 처참한 ‘동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쩌면 ‘다중적 주체’라는 개념이 문제적인지도 모른다. 만일 이 개념이 이미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연대하는 주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면, ‘동원’의 위험은 논리적으로 기각된다. 하지만 대신에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더 치명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물론 다중적 주체는 “곧 과정적 주체”이므로 “각자의 문제나 절박한 관심사를 정치적 의제로 삼고 살아가는 참여와 연대”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탄생할 것이다!(‘한 발이 빠지기 전에 얼른 다른 발을 내디딘다’는 환상의 ‘걸어서 태평양 건너는 방법’이 떠오른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런 단순무식한 형식논리로 재단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아마도, 가령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그러했듯, 그 길이 대다수가 바라는 방향이라면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조금씩이라도 진전되기는 할 것이다. 다만 다중적 주체가 이루어낼 “바람직한 정치”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그 도상에서 ‘필요악’이든 ‘일부 부작용’이든 필연적으로 수반될 ‘동원’의 참화가 나는 더 무섭다. 더구나 그렇게라도 해서 정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전시켜야 한다는 건, ‘보편성의 폭력’을 매섭게 질타한 정희진이 내놓을 수 있는 주장도 아닐 게다. 그러니 내가 터무니없이 오독한 게 아니라면, 이것은 결국 일정한 수준 이상의 정치적 자원을 이미 가지고 있거나 앞으로 가지게 될 이들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바람직한 정치”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자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문화적 기득권으로 보편성을 독점하는 깡패짓일랑 그만두고 각자 자신의 문제에나 집중해. 그게 민주주의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 해석이 옳다면, 여기에 댓거리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속이 후련해지도록 지당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이해를 표현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것을 점점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라는 점에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내가 정희진의 글에서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란, 그가 ‘말한’ 내용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나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이다.

다시 나는 왜 ‘좌파’인가

정치적 당파성이란 결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 또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실천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정희진의 글에는 이 질문을 생략하기 일쑤인 “일부 좌파 남성”들에 대한 질타만 있지, 정작 그래서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정희진 자신의 통찰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약자를 위한 투쟁 이전에 ‘없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끄덕일 만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약자를 ‘위하’거나 없는 사람을 ‘존중’하는 주체를 전제하는 그 시선이 나는 불편하다.

누군가의 문제를 ‘존중’한다는 것은 실은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어떤 문제도 다른 문제보다 부차적이지 않은데 누구에게나 자기 문제가 가장 절박하고 중요하다면, 내 문제에 관심을 덜 가지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내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불균형이 발생하는 순간 내 문제는 ‘부차화’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그가 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나도 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식의 ‘공평’한 정치적 거래를 ‘연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의 문제가 다름아닌 내 문제이기도 하다는 자각 없이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족이지만, 그의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물론 다 다르고, 심지어 본질적으로 다 다르다. 그러나 동시에 의식하건 않건 서로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의제화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들과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핀, 자신의 이해를 표현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웃들은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의제화할 수 있을까. 언어가 빈약해진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이해를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데 제약을 받는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타인의 경험을 받아들일 통로가 협소해진다는 뜻이고, 따라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해를 명료하게 인식할 길조차 막연해진다는 뜻이며, 나아가 연대의 매개를 강탈당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회구성원의 언어가 점점 더 빈약해지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일상의 관계망은 단절되고 파편화되었으며, 엄기호의 책 제목처럼 “교사도 학교가 두려운” 판국에 학교도 제 구실을 못하고, 다른 기회에 좀더 상세히 따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출판도 재생산 기반이 와해되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나날이 신기술로 무장하는 매체들은 온통 한통속으로 현실을 속여두는 눈요깃거리 판타지만을 팔아대며 장삿속 채우기 바쁘고, ‘연대’의 통로로 흔히 오인되곤 하는 소셜미디어는 정희진이 비판하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가 만개하는 온상이다.

이 참혹한 상황에 무심하거나 속수무책인 채로 ‘연대의 희망’을 말하는 건 사기가 아니면 마스터베이션이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너무나 안일한 진단이다. 예컨대 ‘일베’가 ‘보수’인가. 그건 ‘보수’가 아니라 ‘몽매’다. ‘몽매화’에는 (자칭) 보수와 (자칭) 진보가 따로 없기도 하다. “국가 건설 방식”은 언감생심이고 차라리 누가 더 굳세게 귀를 틀어막고 더 큰 목소리로 떠드는지를 경합하는 형국이다.

실은 내게도 뾰죡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내가 질식 상태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건, 사회적 의제가 종교화되는 경향이나 일상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유린하는 자본의 위력을 자기 문제로 인식하는 이웃이 매우 적거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세상이 혹시 대다수에게는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인데 공연히 몇몇이서만 죽이 맞아 유난을 떨어대는 게 아니라면,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생존의 나락으로 내몰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문제로서 의제화하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내 문제를 의제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니 나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언어의 황폐화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좌파’의 실천적 의미를 따져묻는 일조차 “나만 진짜 좌파”라는 독선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달리 말해, ‘좌파’는 전방위적으로 포위되어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더욱 처참하게도, 심지어 ‘좌파’ 담론조차도 시장에 포획되어 현실과 치열하게 긴장하며 인식의 확장을 꾀하는 대신 ‘상품화’된 지식목록을 수집하는 것으로 허위의식을 달래는 ‘패션 좌파’만을 부지런히 만들고 있다. 대개는 어떻게든 ‘몽매의 동맹’에 균열을 내고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일 뿐 차마 고의였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도 ‘틈새시장’이라고 아예 발가벗고 뛰어든 야바위들이 아주 없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준엄하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뿐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진정성을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교란 속에 고립은 더 견고해진다. 이때 몽매에 편승하는, 시장에 포획된, 온갖 ‘잡파’들의 교란을 물리치고 ‘자본주의 너머’를 향한 상상이 숨쉴 구멍을 조금이라도 더 넓혀가는 일이, 과연 철저하게 비가시화된 삶을 강요당하는 이웃들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일과 다른 일일까.

그것이 다르지 않다면,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김규항)는 맥락에서, 그것은 내가 ‘좌파’라는, 적어도 ‘좌파’로 살겠다는 실천적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내 삶으로써 입증해야 할 ‘다짐’(질문의 화두)이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패션’의 대열에 휩쓸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선언’(당위적 구호)이 아니다.

발표지면 말과활 3호, 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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