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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사라진 세상을 꿈꾸며
작성자 똥개

일찍이 김규항은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평론에도 제 나름의 사회적 역할이 있는 만큼은 평론도 (물론 파생적인) ‘생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이 이 말을 했을 때, 그가 이 자명한 이치를 도외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제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평론과 그것으로 밥벌이를 삼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평론가들을 질타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가령 미술평론은 필요하지만, 모든 화가나 조각가가 평론가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영화평론이 필요하다고 해서 모든 영화감독이나 배우가 평론가여야 할 까닭도 없다. 출판으로 국한시켜 말하더라도 모든 저술가나 문예창작자가 평론가여야 하는 건 아니므로, 제아무리 평론가가 본디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출판평론가에게도 생산자가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제 나름의 생산 영역은 있을 터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출판에는 저술이나 창작의 층위와는 다른 ‘생산’의 층위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모든 출판편집자에게는 평론가의 안목과 언어가 필수적이다. 물론 김규항의 발언 취지를 고스란히 살리자면, 편집자 역시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다시, 이것은 ‘기생’에 대한 윤리적 비난이 결코 아니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기생’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비루한 오만함’이고, 빈약한 자의식이다.) 그래서 공정하게 말하자면 편집 또한 당연히 (파생적인) ‘생산’일 수 있겠지만, 딱해지는 건 출판평론가다. 모든 편집자가 이미 평론가일진대, 평론가가 달리 필요할 까닭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실 비슷한 궁색함은 이른바 ‘정치평론’에서도 발견된다. 민주 사회가 모든 성인에게 차별 없이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정치 현상에 대한 책임있는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즉 주권을 가진 모든 시민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이미 ‘정치평론가’인데, 새삼 ‘정치평론가’에게 무슨 사회적 쓸모가 있을까. 그것은 뒤집어 말해, ‘출판평론’도 틀림없는 문화평론의 한 갈래이긴 하지만, 다른 문화 영역의 평론보다는 어쩌면 ‘정치평론’과 더 많은 유사성을 공유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흔히 ‘표현의 자유’라고 통칭되긴 하지만, 노래 부를 자유, 그림 그릴 자유, 연극을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할 자유 등등과는 달리 하필 ‘출판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와 함께)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시되어 있는 사정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쉽게 말해 출판 현상을 빚어내는 생산 활동은, 본원적이든 파생적이든 다른 문화 영역의 생산 활동과는 달리 ‘보편적’인 속성을 지닌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심지어 문학예술조차도, 특정한 표현 수단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재능(또는 좀더 정확히는 그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지녀야만 의미의 생산이 가능하고, 혹시 그 재능을 인정하는 사회적 기준의 공정성이나 다양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자연스럽기까지 한 제한 자체가 부당하다고 여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지식이 담긴 의견을 말하거나(언론) 그것을 글로 옮기는(출판) 것은 말주변이나 글솜씨가 빼어난 사람만의 특권일 수 없다. 따라서 다른 문화 영역에서는 생산 활동에 발현된 생산자의 재능을 가늠하는 사회적 인정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평론의 무시할 수 없는 기능(가운데 하나)이겠지만, 출판에서라면 이런 기능은 무의미하거나 위험하다.

달리 말하자면, 다른 문화 영역의 평론가(을 포함한 파생적 생산자)에게는 표현 수단과 관련된 일정 수준 이상의 심미안이 적어도 얼마간은 요구된다. 그러나 출판편집자에게 필요한 평론가의 안목이란 (문학예술에 속하는 영역을 논외로 한다면) 그저 ‘성인으로서의 건강한 분별’로 족하다. 그것은 유권자에게 책임잇는 주권 행사를 위해서는 그저 최소한의 균형잡힌 정치의식이 요구될 뿐이라는 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정치 행위나 정치 현상에 대한 시비와 선악, 미추의 판단이 ‘정치평론’이 굳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이미 유권자가 감당해야 할 정치 행위이듯, 출판 행위나 출판 현상에 대한 시비와 선악, 미추의 판단 또한 ‘출판평론’ 이전에 이미 편집자가 수행할 수밖에 없는 고유의 생산 활동이다. 요컨대 ‘출판평론가’란 (다른 문화 영역의 평론가들과는 달리) ‘순수한’ 잉여다.

또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 어떤 유권자라도 자신만의 정치적 판단이 있을 터이고, 그것을 적절한 계기에 공개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치평론’일 테고, ‘정치평론가’란 그저 다른 유권자들보다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공표할 기회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을 뿐인 ‘유권자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유권자가 다른 유권자보다 구조적으로 더 많은 발언의 기회를 가지는 것을 과연 공정한 정치과정이라 할 수 있을지 무척 의심스럽기는 하다. ‘출판평론가’의 처지인들 크게 다를 바가 있을까. ‘출판평론가’란 그저 ‘심하게 편중된 발언 기회’라는 조건이 투영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출판에 대한 제 나름의 식견과 안목이 없는 편집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기회가 더 다양한 편집자들에게 더 공정하게 개방되기만 한다면 ‘출판평론가’가 달리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출판뿐 아니라 모든 문화 영역에서 평론이 제도화되고 평론을 위한 안목과 언어가 전문가 집단에 폐쇄적으로 전유되는 것보다는 수용자들에게 폭넓게 개방되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모든 사람이 음악이나 미술, 문학예술 따위를 생산해 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듯, 평론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만한 안목과 식견이 있어야만 문화 생산물을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런데 앞서 살폈듯 출판의 표현 수단이 ‘보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출판 행위를 통해 평론가의 안목과 언어를 일상적으로 구현할 수밖에 없는 편집자들뿐 아니라, 실은 ‘성인으로서의 건강한 분별’을 지닌 모든 독자(수용자)들까지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은 잠재적으로는 평론가일 것이다. 가령 음악감상이나 영화관람은 취미일 수 있어도 독서가 취미일 수는 없다는 이치를 곱씹자면, 출판편집이 특별한 훈련을 받은 전문 집단에 독점되어야 할 근거는 없다. 하물며 출판평론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니, 굳이 ‘출판평론’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면, 역량 있는 ‘출판평론가’를 ‘발굴’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원고료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발표 지면을 넓히는 것보다, 다양한 현장의 ‘편집자’들(과 나아가  ‘독자’들)이 거리낌없이 발언할 수 있도록 ‘공론장’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이다. 가령 더 많은 ‘정치평론가’가 만들어지는 것과 더 많은 유권자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에 가까울지만 짚어봐도 당연한 일 아닌가. 무릇 ‘잉여’란 더 많은(나아가 ‘모든’) 사람이 골고루 누리는 게 옳다. 그리고 ‘평론’이 본디 ‘생산에 기생하는’ 잉여라는 사실을 부인할 도리도 없다.

어쩌면 요즘 같은 SNS 시대에 그런 공론장은 이미 차고넘친다고 반문할 이들이 없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SNS 시대가 만들어낸 것은 ‘더 개방적인 공론장’이 아니라 ‘말의 공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분별’의 건강함이 경쟁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공론장(?)은 제아무리 진입장벽이 낮다 해도 공론장이 아니다. 게다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도 결코 아니다. 이미 충분한 사회적 자원을 기득권으로 가지지 않은 ‘평범한’ 갑남을녀가 오로지 제 분별의 건강함만으로 ‘듣보잡’ 취급을 면하기는 ‘개천에서 용 나기’보다 더 힘들어졌다.

이제 내 이야기를 하자. 나는 꽤 많은 분량의 ‘출판평론’을 써 왔고, ‘정치평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주간지의 고정 지면에 ‘방송평’을 쓰고 있지만, 그 모든 글은 ‘평론가’로서 쓴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내가 쓴(또는 앞으로 쓸) 글들은 ‘평론가’가 아닌,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 시야에 포착된 정치 현상, 문화 현상(또는 특히 내가 밥줄을 걸고 있는 출판 현상)에 대한 내 나름의 시비와 선악, 미추의 판단을 드러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생산에 기생’하는 ‘잉여’의 허망한 존재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드러낼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발표지면 기획회의, 201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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