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가입에는 이메일 주소 외에 어떤 신상 정보도 필요하지 앟습니다.
똥개네집 통합검색
편집자 광장
책마을 소식
진로 상담
출판실무 Q&A
예비편집자 공부방
강의실
참고자료
비평적 산문
출판칼럼
매체 비평
인물론 & 인터뷰
사적 진술
주목을 바라는 글
저작목록
똥개와 수다떨기
일상 속 단상
퍼온글 모음
노출광의 일기
똥개를 소개합니다
똥개의 즐겨찾기

  인물론/인터뷰  Personal criticism & Interview
저자론을 비롯한 인물론 성격의 글과 인터뷰 글을 올려두겠습니다.
이 게시판의 게시물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으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단, 영리/비영리 목적을 막론하고 고형물(인쇄물, CD 등)의 형태로 복제하여 배포하려면 운영자의 사전 승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인터뷰] 강준만, 불온한 합리주의자와의 만남 - 강준만 전북대 교수
작성자 똥개

언어는 존재방식이며 동시에 권력이다. 낯선 외국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반가움은, 굳이 뜬금없는 '애국심'으로까지 비약시키지 않더라도 '소통하는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확인만으로도 충분히, 아니 그 어떤 의미보다도 가치 있다. 비단 외국어뿐이랴. 같은 한국어로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온 서울 한복판조차도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여기에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 존재방식이 같으며 동시에 정치적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이 출현한다. 나는 반가움에 들떠 그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무식한 사람은 보이는 그대로를 말할 수밖에 없다.”

먹물들의 닳아빠진 수사처럼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온통 뒤얽혀 있는 한국사회에서 일관된 자신의 언어를 고집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가능할지라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실제로야 어떻건 공식적으로 논박되기를, 전근대적 가치는 청산해야 할 시대착오라 하고, 근대적 가치는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하며, 탈근대적 가치는 철없는 무모함일 뿐이라고 말한다. 굳건하게 견지할 만한 일관성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남기 위해 오로지 믿을 것이라곤 이러저러한 '연줄'밖에 없다. 아무도, 심지어 지식인이라는 자들조차 다른 ‘연줄’의 패거리를 서로 헐뜯으며 패거리 불리기에만 급급할 뿐, 그 어떤 일관된 가치를 치밀한 언어로써 생산하거나 재생산하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말로는 누구도 더 이상 환영하지 않는다는 전근대가 여전히 온존하고, 근대는 도래하기도 전에 실종되었으며, 허황한 탈근대가 유령처럼 떠돈다. 근대적 합리성으로 일관하고자 욕망하는 나의 언어는 절망어린 자살충동에 휩싸여 거의 가학적으로 누군가의 자살행위를 기대하다가 마침내 기름진 먹이감을 포착하고야 만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정치평론으로 보이지만 정치평론으로 읽어치워서는 안 될 '한국정치의 딜래머'라는 부제가 붙은 두 권의 저작을 통한 그와의 첫만남이 그것이다.

그의 언어는 놀랍게도 자본주의체제가 한국 사회에 성립된 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일관된 주장으로 펼쳐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언급조차도 미미했던 '공정함'이라는 가치로 무장하고 있었다. 부언하자면 나의 놀라움은 두 가지 사실 모두에 대한 것이다. 탁배기잔을 들고 있었으면 어울렸을 수더분한 촌부의 인상으로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곳은 호텔커피숍이었다!) 나를 맞이한 그에게 나는 첫미끼로 이 놀라움의 경험을 던졌다. 용감무쌍한 투사의 기개나 하다못해 잔뜩 폼을 잡은 화려한 수사 따위를 기대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다른 각오쯤은 털어놓으리라는 어설픈 의도를 그는 너무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슬쩍 맞받아넘긴다. "나는 그리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해 무식하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공부한 것을 풀어내느라 오히려 이론에 치어 버리기도 하지만 무식한 사람은 보이는 그대로를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공정한데다가 솔직하기까지 하다구?

“나는 서클을 만들지 않는다.”

이쯤되면 웬만한 미끼에는 걸리지도 않겠다. 아예 큼직한 놈으로 던지자. 그는 <김대중 죽이기>의 '여는 글'에서 <언론의 '부르심' 따위에 연연하기에는 너무 큰 자부심>이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는 근거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제시한 <'지역차별' 문제에 관한 한 체험적 전문가>라는 또하나의 근거나, 학연으로 똘똘뭉친 한국 사회에서 학부전공과는 다른 학문을 택한 '지방대학'의 무명교수라는 정황까지 참작한다면, 그로서는 다소 억울할지도 모르지만 이 '자부심'은 사회적 소수의 자기암시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베스트셀러의 저자이며, 자기 발언의 무게를 스스로 확보해 낸 제법 알려진 지식인이다. 여전히 그는 그의 '자부심' 앞에서 당당할까. 그는 한국 사회의 지식인정치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누구나 힘을 가지고자 하지만 정작 힘을 가지게 되면 그 힘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나는 천성적으로 사교적이지 못하다. 교수들끼리 칵테일파티를 해도 눈에 안 띄는 구석자리에 조용히 서 있곤 한다." 천성까지 동원하면 토를 달기가 궁해진다. "더구나 대학 사회에서 학술논문도 아닌 상업출판물의 베스트셀러 저자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맞는 말이다. 한술 더떠 그는 유학직전 잠시 방송국에 몸담았던 기억을 회고하며 덧붙인다. "방송국을 그만두면서 이름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금단현상’을 경험했다. 오래 전에 그 길을 포기하면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유명세에 편승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미련은 졸업했다."

그래도 불충분하다. 그가 한국정치의 딜래머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해 낸 '김대중죽이기'라는 술어는 이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정치적 술어로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내게 언제 정계에 진출할 것이냐고 물어오곤 한다. 처음 몇 번은 진지하게 대꾸했지만 이젠 아주 진저리가 날 지경이다. 나는 적어도 정치에 관해 논해야 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인은 아예 정치인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나면 만나는 만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판에 빨려들어 비판자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게다가 안 그래도 오해를 받는 판국에 그 술어 덕분에 '골수DJ맨'으로 찍히끼까지 했으니 비판자의 입장을 지키고자 하는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막심한 피해를 입은 셈인데, 그의 어법을 고스란히 빌자면 피해자를 붙들고 더 따지고 든다는 것도 공정하지 않은 일이다.

그는 나아가 새로운 판짜기의 가능성도 부정한다. “나는 어떤 서클에도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서클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서클은 공적 영역에까지 힘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작업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발언에 대한 색안경은 정치입문의 억측이나 ‘패거리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든 또다른 패거리짓기의 의혹뿐이 아니다. 그는 내게 되묻는다. "왜 상업주의에 대해서는 안 묻나?"

어지간히 당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굳이 질문할 필요를 못 느낀다. "폭력혁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물론 폭력혁명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고, '문화투쟁'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나. 결국 시장 아닌가. 상업적 성공이 왜 문제가 되는가. 책의 내용에 동의한다면 오히려 칭찬받을 일 아닌가. 좋은 내용이라면 더 많이 팔아야 한다. 물론 돈만 벌자는 것과 돈도 벌자는 것을 명확하게 가를 수는 없지만, 그건 사후에 고민할 문제이지 상업적 성공 그 자체를 백안시해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물론 게중에는 변절(?)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 우여곡절이야 많겠지만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가야할 먼 길 아닌가. 한마디쯤 거들고 보니 아차 싶다. 내 자리로 돌아가야지. 공연히 별 재미도 못보는 미끼던지기일랑 집어치우고 본격적으로 추궁해 들어가 보자고 작정한다.

그의 발언이 힘을 가지기는 애시당초 틀린 일이다.

그의 신작 <전라도 죽이기>는 호남차별에 관한 실증적 논구이다.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매력은 우리가 경험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 똑같은 구성으로 논구하더라도 또한 똑같은 가치의 글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보편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문면상으로는 '호남차별'이라는 특수한 현상을 분석하였지만, 사실은 학력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장애인차별, 동성애자차별 등 온갖 사회적 차별이 가지는 보편적 구조까지 논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하지 않은 사회를 향해 공격적인 독설을 구사하던 그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못 엉뚱하기조차 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들이 차별을 포기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그들은 대신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말을 쓰는 위선을 범하는 데엔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 호남차별을 하려면 얼마든지 하라.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해 두자. 그건 옳지 않다. 그것만 인정해 달라.> 아니, 이렇게 순진할 수가! 도대체 차별이라는 '악마적' 범죄조차 포기하지 않는 그들이 고작 위선을 범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리라고 기대하다니!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사람들이 차별을 했겠는가 말이다.

결코 그냥은 못빠져나가리라고 기대했건만 그는 너털웃음으로 흔쾌히 동의한다. “그들이 ‘도덕적 자괴감’을 느끼건 말건 차별의 부당함을 ‘인정’하건 말건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의 전략은 그들(지식인)의 위선을 또다른 그들(대중) 앞에 낱낱이 발가벗겨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의 자가당착적인 결론은 폭로를 위한 의도적 착오라는 설명이다.

“나는 일반인들의 편견에 대해서는 옳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그들의 편견을 공적 영역에서 유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을 추상적인 원론만으로 논박해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일일이 거명하여 구체적인 논증으로 공격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점점 더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 마디의 발언에도 큼직한 무게가 실리는 소위 원로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발언의 무게가 확보된 것이다. 그의 발언이 힘을 가지기는 애시당초 틀린 일이다. "사람들은 '인신공격'이라는 말을 매우 모호하게 사용한다. 이름을 들먹였다고 인신공격은 아니다." 이 땅에선 고작 이만큼의 합리적인 항변조차도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그는 정말 불온하기 짝이 없는 자살행위를 하고 있는가.

그는 단지 불온한 공격 방법을 택했을 뿐 여전히 합리적 계몽주의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꿈을 갖자!>는 <전라도 죽이기>의 어정쩡한 대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기껏 양심과 도덕을 쓰레기통에 내던지라고 통박하면서 아무리 찾아도 길이 없다는 절망을 명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도처의 행간에 깔아놓고서는, 결말에 가서는 밑도끝도 없이 선한 양심에 호소하는 것도 모자라 말콤엑스도 아니고 마틴루터킹의 인용이라니! 도대체 그는 정말로 이 문제가 해결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제도의 공정함만 확보되어도 문제는 풀린다>고 확언하지만 그 제도를 결정할 힘을 가지려면 불공정하게도 패거리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현실 또한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를테면 시간강사들은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도 교수들의 권위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다. 교수가 되면 마음껏 발언하겠다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교수가 되면 사실은 더 못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어렴풋한 단서라도 보았기에?  "얼마전 학생들이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솔직하게 아무 희망도 대안도 없다고 말했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다. 교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역설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희망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일종의 중독증세라는 나의 진단에 그는 선뜻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마지막에나마 거짓 희망이라도 있는 척 둘러대지 않고서는 전체적인 설득력이 떨어진다”는데야! ‘설득력’이라고? 그는 여전히 합리적 계몽주의자이다. 단 차분한 교설이 아닌 불온한 폭로와 공격을 그 방법으로 택했을 뿐.

그래서 그가 희망없음을, 혹은 ‘선한 양심’이나 킹의 인용 등등이 단순한 전술적 고려였음을 의외로 순순히 털어놓았다고 해서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자신 또한 사람인 이상, 더구나 합리주의자라면 어디에라도 희망이 남아 있음을 믿고 싶어할 것이다. 그의 ‘전술적’ 호소에 응답할 ‘선한 양심’의 실체는 도대체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몇 차례나 말을 바꿔가며 추궁했을 때에야, 한사코 도망치고자 말을 돌리던 태도치고는 너무나 당당한 어조로 마지막 비상구를 공개한다. "아무데도 없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라는 존재이다." 드디어 드러난 본색에서 데카르트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에게 걸려진 혐의는 다시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문득 쓸데없는 호사취미를 주체할 수 없는 먹물근성이 객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는 <'선한 양심'에 호소한다>고 말했지만 문맥상 그것을 '합리적 이성'이라고 바꿔놓아도 무리가 없을뿐더러 어쩌면 더욱 독특한 맥락이 생성된다. 웬 형이상학이냐고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천연덕스러운 딴소리로 좀더 구체적인 지점을 겨냥한다.

"선한 양심이든 합리적 이성이든 그 정체를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책을 덮고 나면 다시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되돌아갈지라도 내 글을 읽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선동되지 않겠는가. 이런 선동이 선거시기에 활용되어 정치적 의사 결정에만 작용하더라도 의미는 충분하다." 그는 못내 ‘선동’에 방점을 찍고 싶어하면서도 ‘되돌아감’에 큼직한 방점을 찍는 내게 솔직하게 동의했다. 진정 대안은 없는가.

“잔머리 굴린다고 없는 대안이 나오나?”

"대안이 없다고들 하는데 대안은 없는 것이 아니다. 기득권자들이 가진 것을 포기해야만 대안이 생기는데 그럴 의사가 없으니 대안이 없는 것이다." 말은 옳다. 그러나 역사 이래로 기득권자들이 스스로 그것을 내놓은 일이 있었나? "그러니 잔머리 굴리지 말라는 것이다. 잔머리 굴린다고 없는 대안이 나오나? 언제는 노선이나 길이 없어서 해결이 안되었나? 옳은지 그른지만 대답하라는 것이다. 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기득권을 빼앗을 의사가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그의 책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던 구절을 드디어 그의 육성을 통해 다시한번 마주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제이니 만큼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이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디 한국 사회가 그리 만만하다던가. 언제는 옳은 것이 옳은 줄 몰라서 문제가 해결이 안되었던가? 정작 대답을 해야 할 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도망을 가고 있다. 그러나 밉지는 않다. 이것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거시적 기획에만 지나치게 얽매어 있었다. 보잘것없는 '나'를 억압하는 ‘구조’는 언제나 끔찍하게 커다랗고, 그 구조에 대항할 만큼은 또 '우리'라는 기획이 거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한번 ‘나’는 한없이 작아져만 가는 순환 속에서 ‘내가 경험하는 억압과 고통’조차도 '나'와 함께 한없이 작아져만 갔다. 나아가야 할 길만을 충직하게 바라보다가 정작 출발점을 잃어버린 꼴이다. 목적지와 노선이라도 분명하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무튼 그건 지금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중이다. 과연 어디에서부터? 이 위기에서 ‘대안’이 아닌 ‘공정한 규칙’을 문제삼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전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의 사고틀은 신선한 충격이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출발점만은 늘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나'는 '세상'만큼이나 크다. 다름아닌 바로 내가 경험하는 억압과 고통이야말로 바꿔야 할 세상 그 자체이다. 신기하게도 앞뒤가 꼭 들어맞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끝내 숨길 수 없었던 그의 희망의 근거가 아니었던가. 우연만은 아니리라.

그러나 발상전환이라는 무시하지 못할 의미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면 충돌에 대한 회피임에는 분명한 이상 추궁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가는 데까지 쳐들어 가 보자. 옳으냐 그르냐의 근원적 인식을 따질 때조차도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의도를 포기할 수 없는 한,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화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땅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선한 양심’들이 그의 호소를 받아들여 또다시 패거리라도 지어 해결하라는 것인가. 안될 말이다. 그가 서두에서 이미 인정했다시피 모든 패거리는 해결할 힘을 가지는 순간 해결할 의사를 잃는다. 그들은 단지 힘을 가진 패거리일 뿐 더 이상 선한 양심이 아니다. 더구나 그 ‘선한 양심’은 지금 실체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실체라곤 그 자신의 존재뿐이라고 고백했다면 다름아닌 그가 우선 대답해 주어야 할 일 아닌가. 아쉬운 대로 낡은 구분법이라도 끌어다 들이대자면 그는 도대체 좌인가 우인가,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지식인에게 슈퍼맨을 요구하지 말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보수적 기능주의자이다. 나는 지금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잇는 일을 할 뿐이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식인이 해야할 기능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식인을 공격하는 것도 그들이 일반인들보다 잘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특별히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분명히 반대한다. 다만 그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지식인이 다 제 기능을 다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내가 지적하는 공정하지 못한 현실이지만, 어떻든 나는 운이 좋았다. 법만 어기지 않으면 쫓겨나지 않을 직장이 있다. 학부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가 신설되면서 부임했기 때문에 학교내에서 특별히 눈치를 보아야 할 패거리도 없다. 만일 내가 다른 자리에 있었다면 살아남기 위해 패거리를 쫓아다니며 정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점에서 기회주의자이다.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좋은 기회를 활용한다면 기회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할 능력은 있지만 사실 그 이상의 능력은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할 뿐이다.“ 거짓말처럼 잠잠하던 침묵의 바다에서 최초로 수면위로 이 문제를 끄집어 올린 것이 그이고, 또한 딱히 그 말고는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갈 실체도 보이지 않는데, 숫제 난 모르는 일이라는 말투다. 그는 정말로 ‘비겁하지만 운이 좋았을 뿐’인 기회주의자인가.

“능력도 자격도 없는 내가 어떤 그림을 억지로 그려서 보여준다 해도 그건 결국 사기이다. 지식인에게 슈퍼맨이길 요구해서는 안된다.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 능력밖의 일을 하려고 욕심을 내면 꼭 사고가 난다. 기능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고발의 발언을 할 수 있는 위치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하면 된다. 또한 그 이상의 기획을 해낼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발휘할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네 권의 <오늘에감> 중에서 그가 이전에 유일하게 접했었다는 2호를 짐짓 들척이며) 여기 어디에선가 봤는데, 그 말 참 좋던데…… 당신들 또한 도전과 고발의 입지만을 고집하고 있지 않은가." '사기를 치지는 않겠다'는 회심의 배수진을 친 것도 모자라 뒤통수까지 호되게 갈기고 있으니 더 이상 추궁할 길이 막연하다. 딱한 일이지만 이쯤으로 접어두고 그가 하겠다는 ‘능력 안의 일’이나 더 들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생각해 보면 나는 나쁜 놈이다.”

"내가 마치 전라도의 대변자처럼 되어버렸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래서 계속 다른 차별구조들로 이야기를 바꿔나갈 생각이다. 학력차별 혹은 학교차별에 대하여, 또는 성차별에 대하여, 장애인차별에 대하여, ‘한국 사회의 딜레머’ 시리즈가 계속될 것이다." 옳거니!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타지역 사람중에 호남차별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사람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어떤 종류의 차별이든 그 차별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는 정신을 폭로하고 교정하면 다른 분야의 차별도 저절로 사라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연패거리와 학연패거리는 쌍둥이처럼 늘 붙어다니고 있으니 학벌차별은 그만두고라도 성차별에 관한 그의 생각쯤은 말나온 김에 확인해 봐야겠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그는 '페미니스트'인가?

"전에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분노한다. 그러나 아내와의 관게에서는 아무래도 떳떳하지 않기에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설마, 그럴 리가! 왜 그는 집안에까지 공정함이라는 가치를 연장시킬 수 없을까. "우선은 가사노동 문제이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가사노동 분담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인데, 나는 가사노동을 전혀 분담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전적인 오해의 소치이다. 생활주변에서 숱하게 목도하는 성차별에는 침묵으로 동조하면서 알량한 가사노동 분담이 무슨 대단한 것이기라도 한 듯 '페미니즘'을 혀 끝에 달고 다니며 진보주의자연하는 몰지각한 남성들이 차라리 더 문제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면죄부(?)를 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릇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법! "사실 이건 남녀간의 문제라기보다는 퍼스낼리티의 문제이다. 나는 유학하면서도 빨래하는 것은 아주 질색이었고, 친구들끼리 어디 놀러가서도 남들이 다 밥을 짓는다고 달라붙으면 혼자 미친 놈처럼 그냥 놀았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나는 나쁜 놈이다. 가사노동을 안하는 건 내가 나쁜 놈이어서지 남자여서는 아니란 말이다." 찬찬히 음미할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얼핏 실소가 먼저 나오는 궤변이다.

아마도 그는 학벌 차별은 모르지만 성차별에 대해서는 적어도 <전라도 죽이기>와 똑같은 어조로 떳떳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저 ‘내가 나쁜 놈’이라는 변설만으로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성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동인이 바로 가족내의 성별분업이라는 연결고리를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 아닌 그의 발언을 되돌려줄 좋은 기회가 왔다. “내 책에 대한 반응 중에서 ‘영남사람이 이런 책을 썼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안타까움들이 있는데, 이 말 자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책에서도 밝혔다. 어떻게 같은 말을 하는데 호남 사람이 하면 설득력이 없고 영남사람이 하면 설득력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결코 타 지역 사람은 아무래도 이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릇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의 실체를 똑바로 볼 수 없나니, 그래서 그가 ‘서클’을 거절했던 것이 아닌가. 그로서도 그가 ‘남편’이라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 아마도 참으로 유감스러울 것이다.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평범하지 않은, 그래서 가장 평범해야 할……

그는 시종 평범한 옆집 아저씨의 솔직담백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그 아저씨의 직업이 대학 교수라고 해서, 또는 직업상 조금은 남다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이름이 좀 알려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듯. 그는 불온하지만 치열한 사명감에 불타는 투사가 아니었으며, 합리주의자이기는 해도 자기도취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쏟아낸 불온한 절망과 합리주의자의 희망, 그 뒤편을 끈덕지게 추궁해서 발견해 낸 것이 그 어떤 거창한 명분이나 유장한 프로그램이 아닌 오로지 그의 자존(自尊)뿐이라는 평범한 결론이 차라리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설령 이 의미만으로는 실망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그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성격상 어떤 패거리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공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고, 또한 직업상 그것을 일관된 언어로 표현했을 뿐인, 한 평범한 지식인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결코 평범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탓일 것이다. 그렇다. 공정함은 무모한 자살행위가 되고, 근대적 가치로 일관하는 주장은 돈키호테적인 좌충우돌의 해프닝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라는 조건에서라면 분명 그는 평범하지 못하다. 남달리 불온한, 대단한 합리주의자이다.

아마도 그가 끝내 대답하지 못했던 ‘그가 꿈꾸는 세상’의 정체는 별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공정한 태도가 당연할지언정 남다르지 않고 지식인의 일관성도 직업이 요구하는 필수적 기능일 뿐 굳이 대단할 것도 없는, 그래서 그 자신이 특별히 뛰어날 것도 없는 -- 그저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에나 충실할 뿐 이름조차 미미한 -- 평범한 먹물일 수 있는 그런 세상이나 아닐는지.


나의 그에 대한 탐색 여행은 끝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무려 세 번이나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지는 모르지만"이라는 못미더움을 감추지 못하는 단서를 붙여가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막 자리를 털고 일어설 무렵에는 언뜻 “말이 통하는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소통하는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을 토로했던 것도 같다.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 존재방식이 같으며 동시에 정치적 이해를 공유하는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한다. 언어는 존재방식이며 권력이다.

발표지면 오늘예감 5호, 1996. 봄
단행본수록 상식으로 상식에 도전하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