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력은 국가 경쟁력의 관건이다?
옛날에 원숭이를 키우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원숭이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4개씩의 먹이를 주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원숭이들에게 “이제부터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고 말하자 원숭이들은 무척 화를 내었다. 그는 원숭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렇다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로 하자”고 말했다. 그제서야 원숭이들은 좋아하며 만족하였다.
이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조삼모사(朝三募四)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삼모사라는 말은, 헛된 말장난으로 교묘하게 속이는 일, 또는 그런 말장난에 속아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비꼬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을 고작해야 자신이 기르는 원숭이쯤으로 깔보지 않는 다음에야 조삼모사의 말장난을 일삼을 리가 없건만, 세상에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말재주를 부려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일’을 저지르면서도 비난을 모면해보려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또한 원숭이도 아닌 멀쩡한 사람이 그런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속임수에 걸려들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곤 하기도 한다. 최근 1,2년 사이에 여성의 고용환경과 노동조건을 두고 벌어져 왔던 갑론을박들에서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여성차별을 개선하려는 진지한 의지보다는 여성차별로 인해 생겨나는 이익은 조금도 양보할 의사가 없으면서 조삼모사와 같은 공연한 말장난으로 성차별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감지한다.
불합리한 고용관행이나 여성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는 노동조건들은 물론이려니와 더욱 본질적으로는 가부장적 결혼에 기초한 전근대적 가족제도를 통해 여성의 사회적 노동력이 사장되어 왔던 현실을 어떤 방법으로든 개선해야만 한다는 과제는 이제 비단 불합리한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여성들만의 외로운 목소리에서 그치지 않고 ‘국가경쟁력 강화’와 ‘세계화’라는 구호와 함께 명백하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교육기회의 확대로 여성 노동력의 사회적 가치는 증가했으나 이에 뒤따라야 할 고용기회가 좀체로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여성의 교육을 위해 투자되었던 비용이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지 못한 채 사장되는 극심한 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더구나 고용기회의 확대를 향한 여성의 요구는 더이상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구태의연한 관념의 방패로 무시해 치우기에는 버거울 만큼 크게 성장했다. 문제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면 조삼모사의 말장난으로 회피할 필요 없이 그대로 해결하면 된다. -- 즉 여성 노동력의 고용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더욱 커다란 고민거리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노동력을 사장시켜야만 생겨날 수 있는 몇 가지 이익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딜래머에 직면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력은 단지 출산 능력을 핵심으로 하는 재생산 노동력으로만 인식되어 왔으며, 여성의 사회적 노동력의 가치는 부인되거나 폄하되었다. 설령 여성이 제한적으로나마 사회적 노동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여성의 본분은 가사라는 뿌리깊은 편견은 여성 노동력의 사회적 교환가치를 평가절하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노동의 기회를 원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를 잠재적 실업자로 확보함으로써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고용이라는 구조가 더욱 확고하게 유지되었다. 또한 이렇듯 가족내의 성별 분업에 기초하는 가족제도가 재생산 노동을 여성에게 무상으로 전가함으로써 누구도 그에 투여되는 여성 노동력에 대하여 지불의무를 가지지 않으므로 그 만큼의 초과이윤이 발생한다. 이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여성의 고용을 확대하겠다는 모든 공언(公言)은 공언(空言)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여성의 고용을 확대할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단지 ‘세계화’라는 상징조작에 구색이나 맞추고 여성의 절박한 요구를 적당히 무마하려는 정도에서 그치는 조삼모사의 사탕발림을 던져놓음으로써 또 한 가지의 무시할 수 없는 효과가 발생한다. 여성의 고용 기회가 이렇게 늘렸는데도 실제로 여성의 고용이 그에 상응할 만큼 늘지 않는다면, 여성 노동력의 사장에 따른 ‘경제적 손실’의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사회적 노동을 기피하고 재생산 노동에 안주하려는’ 여성에게로 돌려질 수밖에 없다. 마치 손발을 꽁꽁 묶은 채 가두어 두고 있다가 손발을 풀어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마지못해 문을 활짝 열어주면서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고는 문이 열려 있어도 못 나오는 건 순전히 나올 의사가 없는 탓이라고 눈을 부릅뜨고 힐난하는 꼴이다. 이를 통해 성차별은 더욱 정당화되고 성별 분업에 기초한 가족제도 또한 의심의 화살을 비껴가며 따라서 이러한 차별을 통해 초과이윤이 생겨나는 폭력적 구조는 안전하게 유지된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진정으로 여성이 문밖으로 나오기를 원한다면 손발을 묶고 있는 족쇄를 풀어주어야 한다. 문까지 열어준다면 친절한 일이지만 손발이 자유롭다면 얼마든지 제 손으로도 문짝쯤은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하기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고용환경이라는 것이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는 없는 견고한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던 만큼 이제 그 자물쇠를 열어주겠다는 생색이라도 내겠다면 굳이 말릴 이유야 없지만 그것으로 이만하면 할 일 다했다고 손을 턴다면 너무나 뻔뻔한 일이다. 더구나 아예 문을 열어주는 대신 족쇄는 더욱 조이겠다는 식이라면 조삼모사의 말장난이라기에도 지독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 비유가 그나마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여성의 노동력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터무니없는 모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다면 실제로 전개되어온 논의 과정을 음미해 보자.
모성보호 - 양보할 수 없는 인권
노동조건의 세계화를 위해 근로기준법을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으로 개정하겠다는 1994년 봄 노동부의 발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현행 60일로 되어 있는 출산휴가를 90일 내지 120일로 확대하고 남성도 육아 휴직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등의 그야말로 환영할 만한 내용에 덧붙여 논란의 불씨가 매달려 있었으니 바로 월 1회의 유급 생리휴가를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을 특별하게 보호하기 위한 기준이 국제적으로 합의된 최소한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파생된 특수한 제도이니만큼,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한 특혜를 초래할 수는 없다는 부연설명쯤이야 나무랄 데 없는 논리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대하여 국제적 합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은 대단한 선심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확보하는 것인데 굳이 그 대가로 이미 확보되어 있는 선진적인 제도를 후퇴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전면적 반론이 펼쳐지는 한편에서, 조심스럽게나마 출산과 육아 등 실질적 모성보호가 획기적으로 확대되는 이익이 생리휴가라는 잠재적 모성보호를 일단 포기하는 손실보다 크다면 생리휴가 폐지를 조건으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직장탁아 등의 문제에서 더욱 진일보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지 않느냐는 현실론이 대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분하게 모성보호의 의미를 되새기는 가운데에서 실질적인 조치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논쟁이 진행되기는커녕 유감스럽게도 전혀 엉뚱한 지점에서 소모적인 난상토론이 되풀이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전개되었다.
모성보호 정책에 관한 진지한 토론이 시작하기도 전에 마치 생리휴가가 여성에 대한 특혜라도 되는 양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기 시작하면서 ‘모성보호’라는 최소한으로 전제되어야 할 개념마저 실종되어 버렸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예 모성보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감정적인 매도가 횡행함에 따라 생리휴가 자체만을 두고 되풀이되는 소모적인 시비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는 와중에서 슬그머니 모성보호의 확대라는 원래의 논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매우 의심스럽게도 얼마전 밑도끝도 없는 ‘고용할당제’를 맨처음 제기한 여성고용 확대방안은 사기업에도 강제하겠다는 그 자체만으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내용까지 담았으나 고용확대를 보장하는 대신 모성보호를 위한 비용은 부담하지 않겠다는 폭력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혁명적(?)인 방안은 사흘만에 공식입장이 아니라는 변명끝에 철회되기는 했지만, 애당초 생리휴가 문제를 제기한 것부터가 결국 모성보호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치밀한 의도의 일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명시적인 의도라기보다는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모성의 보호는 성차별없는 동등한 노동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사회적 과제이다. 왜냐하면 임신.출산.수유에 따르는 신체적 부담은 여성 개인이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결정적인 오해가 나타나곤 하는데 이것은 실제의 임신.출산.수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 실현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은 잠재적으로 모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신체적 부담을 평생 지니고 있다. 다시한번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뒤해 부언하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모성이란 흔히 ‘여성다움’으로 이야기되는 사회적 의미의 모성이 아니라 임신.출산.수유의 능력과 그에서 파생되는 생리적 특성을 가리키는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모성이다. 사회적 관념체계로서의 모성을 모든 여성이 가지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오히려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매우 폭력적인 편견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편견은 여성 고용의 확대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주범이다. 남성과 꼭같이 사회적 노동을 하는 여성에게까지 가사 노동이 강요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서는 고용할당제보다 더 획기적인 방안을 시행한다고 할지라도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로 이끌어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조삼모사를 연상시키는 흔한 우스개로 ‘맞고 할래? 그냥 할래?’라는 질문도 있지만, 여성에게 있어서라면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 “직장일도 하면서 가사노동도 할래? 그냥 가사노동만 할래?” 그런데 일상적인 가사노동이나 결코 자질구레할 수만은 없는 가족내의 여성의 성역할은 여간해서는 깨뜨리기 어려운 엄청난 편견의 힘에 의해 강요되고는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힘에 맞설만한 대단한 용기를 발휘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이를 둘러싼 사회적인 관계들을 변화시킴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도 있다. 아직도 형편없이 모자라고 얄팍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이미 누구도 되돌이킬 수 없는 경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모성의 문제만큼은 제아무리 대단한 의지나 용기로도 결코 선택하고 말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해도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모성의 보호 조치가 전제되지 않은 여성 고용 확대는 구두선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 비인간적인 강제노동을 권장하는 꼴이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위 ‘굶어죽을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제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쉬운 얘기로 출산이 소꿉놀이가 아닌 바에야 출산휴가가 무급화된다고 해도 울며겨자먹기로 급여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게중에는 경제적 손해나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할 수 없어 휴가를 포기하겠다는 끔찍한 경우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미 언급했듯이 모성은 실제적인 임신.출산.수유만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잠재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생물학적 특성이라면, 여성의 노동조건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폐지하는 것은 평등고용은커녕 가장 악질적이고 비인간적인 성차별인 것이다. 하기는 실제적인 임신.출산.수유조차도 만족할 만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잠재적인 모성의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성 보호를 위한 장치의 실제적 적용 범위야 어떻더라도 최소한 모성 보호의 개념과 원칙만이라도 분명히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생명에 대해 대략적인 보상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금전적 가치로 환산될 수는 없듯이 어차피 모성 보호의 적정 수준이라는 것도 경제적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출산휴가가 몇일일 때 공평하고 적정한 보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산을 전후해서 1년쯤의 유급휴가가 보장된다고 해서 이것을 여성에 대한 특혜라고 볼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생리휴가는 없을 수도 있고 현행처럼 월 1일일 수도 있고 또는 월 2일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월 5일쯤 된다고 해서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생리휴가를 인정할 것인가 또는 출산휴가는 몇일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모성이란 무엇이며 왜 보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치 생명의 존엄은 도외시한 채로 목숨값을 계산해 보자는 시도만큼이나 위험한 태도일 것이다.
여성 고용 확대 - 속빈 강정의 말잔치
생리휴가 문제가 소모적인 입씨름으로 흐지부지될 무렵 군필자 가산점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물론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 체제에서 어떤 형태로든 군복무기간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 함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취지가 좀더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로 인해 또다른 불평등이 야기된다면 심각한 자가당착일 것이다. 과연 군복무 기간이 임금 산정에 있어 근무 경력으로 간주되는데 굳이 시험에서까지 적지않은 가산점을 부여할 필요가 있는지는 분명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심지어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출산 휴가나 육아휴직 기간은 전혀 호봉 승급에 반영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가산점제도의 발상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다. 반대로 군복무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하지 않다. 설령 3년 복무를 5년쯤의 경력으로 인정해준다고 하더라도 승진 기회에서의 우대를 의미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시비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가산점이라는 것은 그만큼의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는 말 그대로의 특혜이다. 1점 미만에서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에서 3점내지 5점의 가산점이 일률적으로 부여된다면 가산점 해당자가 아니면 경쟁을 포기하라는 기회 박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는 거꾸로 전혀 다른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가산점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고용할 의사가 없는 경우에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생색에만 그칠 수도 있다. 면접 등 고용주의 자의적 의사를 반영하는 점수에서 가산점을 초과하는 불이익을 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합리는 여성 고용 확대 방안의 하나로 가산점 제도가 거론되었을 때 오히려 여성계에서 부정적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사실은 여성들이 시험에 자신이 없어서 아예 응시하지 않거나 남성응시자보다 실력이 모자라서 공정한 경쟁으로는 취업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산점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실질적인 고용 확대 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다. 별다른 실속도 없는데다가 오히려 공연한 특혜 시비에나 휘말릴 제도를 환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를 다시 거꾸로 적용해 보자면, 만일 군복무를 마쳤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현저한 실력차이가 나서 공정한 경쟁으로는 도저히 취업할 수 없고 따라서 단지 군필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응시를 포기하게 된다고 전제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전제할 때에만 군필자의 고용 확대를 위한 특혜로서 가산점 제도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자체가 어불성설일 뿐더러 의무적인 군복무기간을 어떤 형태로든 보상받아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는 군필자라 할지라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이 문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여성 고용을 가로막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가산점을 주어 특혜를 준다 해도 할당제를 통해 기회를 확대한다 해도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될 여성의 굴레는 무엇인가를 살펴 보자.
삼성그룹이 ‘신경영’의 요란한 구호를 내세운 끝에 여성사원 대규모 공채라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제도를 선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은 참으로 참담하다. 여성의 고용기회를 대폭 확대하고, 노동조건도 남성과 전혀 차별하지 않겠다는 무지개빛 약속에는 실천의지를 의심하고도 남음직한 비현실적인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충분한 기회와 동등한 조건을 보장하는 대신 여성에게도 차별없이 야근이나 출장을 부여하는 등 한 마디로 말해서 남성과 꼭같은 만큼의 강도로 기업조직을 구성하라는 요구이다. 말이야 백번 옳은 말이다. 남성들이 기업조직의 부속품이 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여성이라고 해서 봐줄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래야만 동등한 조건을 보장하겠다니 우리나라에 삼성그룹만 있다면 얼마나 환영할 일인가. 그런데 불행하고도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삼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건희 회장은 그의 무지개빛 전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직장에서의 사회적 성취에 매달려 집안을 돌보지 않는 며느리와 아내에 대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편견의 폭력을 휘두르는 시집식구들과 남편들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생색만 내다가 마는 입빠른 소리일 뿐이다.
연전에 유수한 대기업들에서 유행처럼 직업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부정하는 폭거를 자행했었다. 지방공장에 간부사원을 발령하면서 전가족이 근무지로 이주하도록 강요하고 불응하면 사표를 받았다.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단신부임해봐야 임시로 거쳐가는 곳으로 여겨 서울근무로 복귀할 궁리만 할 뿐 좀체로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더라는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폭력적인 전제가 담겨있는데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족관이다. 만일 그의 아내가 전업주부가 아니라 서울을 근거로 하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어떻게 되는가. 요새 한창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까지는 아니라도 여하튼 자기 일을 가지고 있는 아내라면 이 가정은 졸지에 풍비박산의 위기에 놓인다. 둘 중에 한 사람이 사표를 써야 한다는 얘기니 말이다. 이같은 처지에 직면하게 되면 웬만하면 여자가 지게 마련이다. 여자 스스로가 결정하든 어떻든 그 상황을 둘러싼 무언의 압력을 모두 여자가 받아야 한다. 이래 놓고도 여자가 결혼하면 가정이 우선이라 직장일을 쉬이 맡길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직장을 우선하려 해도 그 배우자인 남자들에게 압력을 가해 결국은 그 압력의 피해자는 여자가 되게 만들어 놓고서 말이다. 이런 현실은 그대로 두고서 남성들이 직장에 목을 매는 만큼 여성들도 덤벼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말하자면 성별 분업에 기초한 가부장적 결혼제도 하에서 삼성이 요구하는 새로운 여성이 되려면 결혼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불평등한가. 남성들에게 결혼이냐 일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기업이 있다면 웃음거리일 것이다. 여성들에게만 사회적 노동의 권리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구성할 권리 중 어느 한 쪽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더욱 우습게도 우리 사회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가 사회에서 얼마나 심각한 편견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만 한다. 거의 성희롱 수준의 모멸을 일상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적응하는 여성만이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다니. 그래서 처음에는 호기롭게 ‘프로인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다’는 환상에 속아 시작했다가도,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성희롱에 정당한 항의의사를 표현해거나 또는 남성들이 그러하듯이 거리낌없이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가 안팎곱사등이 노릇에 등터지느라 버거워하거나 나아가 그래서 결국 애써서 쌓아온 경력을 물거품으로 돌리고 별 수 없이 주저앉으면, 그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할 것인가. 여자들은 기회를 주어봐야 제 밥그릇도 못 찾아먹는 한심한 족속이니 집에서 살림이나 해야 한다고, 분수도 모르고 일한다고 설치며 분위기만 흐려놓는다고, 여성들 스스로가 사회적 노동에 참여할 의지가 박약한데 고용을 확대해 봐야 조직의 효율성만 떨어진다고 그렇게 말하겠지.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점은 군필자 가산점 문제를 둘러싼 논란 역시 생리휴가 문제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갔다는 점이다. 군복무에 대한 더욱 합리적인 보상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나아가 징병제 자체에 대하여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대신 오로지 존재하지도 않는 여성들의 ‘이기주의’에 대한 감정적인 매도만 횡행하다가는 소모적인 입씨름에 식상한 여론의 관심권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는 대중소통과정을 통한 사회심리 형성에 관한 더욱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지만 굳이 암시를 남겨놓자면, 사회적인 지배계층의 피지배계층에 대한 허구적인 피해의식이 과장되면 엄청난 폭력이 나타났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수두룩하다는 점을지적해 두고 싶다. 가장 극단적인으로 나치의 유태인 학살, 관동대지진때의 재일 한국인 학살 등의 뒤에는 반드시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과장되고 조작된 집단적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으며, 최근 우리 사회에서 펼쳐져온 여성 문제의 논의 과정에서 남성들의 집단적 피해의식이 조작되고 있다는 단서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 생리휴가나 군필 가산점 문제는 물론이고 성희롱 재판 때도 꼭같았으며 가장 쉬운 보기는 바로 ‘간 큰 남자’시리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다른 기회로 접어 두자.
고용할당제의 딜래머 - 강요되는 슈퍼우먼의 신화
이런저런 논란이 오고간 끝에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여성 노동력을 사회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정책 방안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98년도까지 여성 합격자 비율이 15%에 이르도록 3-5점의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골자이지만, 사실 가산점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 98년도까지 이 목표치를 달성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를 두고 가산점제와 할당제 사이에서 팽팽한 접전이 벌어지다가 절충안으로 타협이 되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즉 명백한 고용 확대의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 막연한 가산점제에 여성계가 반대한 반면 정부에서는 한사코 할당제의 도입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할당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정부에서는 그토록 극심한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가부터 살펴 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겠다.
고용 할당제 뿐 아니라 일반적인 할당제에 관해 기억에 남는 논의들을 죽 훑어보자면, 최근에 각 대학들에서 농어촌 학생 특별전형을 통해 출신 지역별 할당제를 실시하려다가 좌절된 일이 있고(농어촌 특별전형은 실시), 지방 자치 선거를 앞두고 지역의원 비례대표에 여성 할당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정당의 공직선거 후보에 할당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자면 장애인고용촉진법에 따라 대규모 사업장에는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에 따라 고용할당제가 이미 실시되고 있으며, 한 성이 일정 비율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당제가 교육대학 입시에 도입된지도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 사례들은 거의 예외없이 논의 단계에서부터 순탄치 못한 진통을 겪었거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민학교 교사의 여성비율이 증가함으로써 교육적 문제가 야기된다는 얼토당토 않은 문제제기 끝에 교육대학 입시에서 여성합격자의 비율을 제한하자는 데까지 나아갔던 논의는 성차별적 발상이라는 반론에 부딪쳐 결국 형식적으로나마 평등하게 ‘남성이나 여성의 비율’이 일정 비율을 못넘도록 규정하는 선에서 합의되었지만, 애초의 문제제기가 여성비율 증가를 경계했던 내용이니만큼 ‘눈가리고 아웅’하듯이 실제로는 여성합격자의 비율을 규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장애인 고용 할당제도 취지를 못 살린 채 의무 고용 비율을 지키지 못한 기업들로부터 고용촉진분담금만을 받아내는 데서 그치고 있다. 장애인 고용에 따라 생겨날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드는 비용이 고용분담금보다 얼마나 큰 지는 알 수 없지만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고려해서라도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마땅할 장애인 고용이라는 문제를 손쉽게 돈으로 해결해 버리려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은 분노에 앞서 서글픔마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여성의 고용 할당제가 전면 도입되었을 때 꼭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우선 가시적으로 모성보호의 비용의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기업 문화를 양성의 평등 공존의 기업 문화로 전환하는데 따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 비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기업들이 고용 할당제에 펄쩍 뛰는 것은 이 때문이고, 급기야 ‘고용 할당제를 도입하는 대신 모성보호 제도를 축소하겠다’는 식의 망발이 나타나기까지 한 것이다. 아마도 고용 할당제가 도입된다고 하더라도 대개의 기업들은 그 취지에 걸맞도록 여성의 고용을 확대하는 대신 장애인 고용 할당제에서처럼 분담금 형식의 벌과금을 부담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실효성도 없을 제도의 도입으로 세금 아닌 세금의 부담을 추가로 떠안기만 하는 꼴을 달가와할 리가 없다.
여기에서 생겨나는 타협안이 모성보호 비용을 공공기금으로 부담하자는 원칙이다. 이것은 사실 단순한 타협안이 아니라 마땅히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사회복지 정책의 확대이다. 걸음마 수준이기는 하지만 고용보험 실시를 이미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사회의 발전 수준으로 볼 때도 국가가 모성보호의 원칙을 명확히 하고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정책 방안에는 이 부분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 사기업에 부담시키지는 않는다는 속이 들여다 보이는 원칙만 천명되어 있을 뿐 그 대신 부담해야 할 주체는 아직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고용보험이냐 의료보험이냐를 놓고 노동부와 복지부가 서로 떠넘기는 희한한 모양새가 바로 우리 나라 정책 당국자들의 여성 문제 인식의 현주소인 것이다. 여성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노동부가 난색을 표하는지, 여성의 건강은 보건복지가 아니라서 복지부도 나 몰라라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설령 이렇듯 의료보험이든 고용보험이든 공공기금으로 모성보호 비용을 충당한다고 할 때에도 여전히 고용 할당제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바로 간접 비용의 문제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삼성그룹식의 이상론은 전혀 실현가능성이 없으며, 따라서 여성의 고용을 확대하면 기업조직의 운용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야근, 숙직, 출장 등에서 부딪칠 문제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고용이 전면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여사원’의 역할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야말로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좋았을 여자들이 일을 한다고 모든 관행들을 뒤집고 휘저어 놓는 바람에 조직이라는 것이 어디서나 그렇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반드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이 적당히 ‘여사원’으로만 있어준다면 상상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생돈 떼이는 꼴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이 그렇듯이 경직되고 구조화되어 있는 조직일수록 이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남녀차별이 아닌 여여차별’이라는 기발한 조어까지 만들어낼 만큼 불완전한 남녀고용평등법마저도 차라리 벌금을 물고 말겠다는 배짱으로 버젓이 내놓고 위반하고 고발당하는 기업이 수두룩한 현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다 바꾸라’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상에 사로잡힌 한 재벌 회장의 억지일 뿐이다.
흔히 이해당사자의 반발이 큰 사안일수록 관철했을 때의 실리는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고용 할당제에 대한 반대가 극심했다고 해서 그것을 무릅쓰고 관철한다고 하더러도 여성의 고용이 실질적으로 확대되리라고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것에 딜래머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고용 할당제는 그 자체만으로는 진일보한 획기적인 방안이며 더구나 일반 기업과는 달리 공무원이라면 ‘고용분담금’으로 면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이마저도 명시적인 할당제가 아닌 모호하기 짝이 없는 ‘목표치 제고’로 희석된 형태로 나타났으니 더 두고볼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더욱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설령 전면적인 고용 할당제가 시행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동안 견고한 자물쇠로 잠그고 못질까지 해놓았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일 뿐 손발을 묶고 있는 족쇄를 풀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실상 기업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정부에서조차 할당제를 반대하는 것도 바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남성 대신 여전히 족쇄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을 고용하는 데 따르는 부담 때문이다.
이 족쇄는 모성보호 비용의 사회적 지불로 어느 정도 느슨해지고, 가사노동의 전면적 사회화가 획기적으로 진척됨에 따라 상당한 부분에서 제한적으로나마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사실은 매우 멀고 험한 길이 앞에 놓여 있다. 여성에게 전가하던 가사 노동이 사회적 생산 부문으로 대체된다면 무상으로 제공받던 재생산 노동에 대하여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문제를 안게 된다. 쉽게 말해서 주부에게 육아를 전가시킬 때는 지불할 필요가 없는 비용을 탁아소를 이용할 경우에는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렇게 세대 재생산 비용이 늘어남에 따라 요구되는 임금 수준 역시 증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기업들과 그들의 이해를 곧바로 대변하는 국가기구는 여성들을 묶어두고 있는 족쇄를 풀어줄 의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용할당제라는 획기적인 정책조차도 조삼모사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가족관계에 따른 의무’가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여전히 부족하다. 모성보호는 인권의 차원에서 보장받고 가사노동의 사회화도 조금씩 조금씩 시장을 형성하면서 진전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가장 견고하고 결정적인 족쇄가 있다. 그 정체는 <한겨레신문>의 다음과 같은 사설이 명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취업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의 어려움에 놓여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인식되어 온 가족관계에 따른 의무 때문이다. 여성을 집안노동에서 해방시켜 사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탁아나 공동육아시설 지원, 혹은 초등학교의 전면적인 급식실시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노인문제나 오래 앓는 환자를 돌보는 문제 등 가정에서 여성에게지워진 의무의 무게를 두고는 단순히 여성에게 기회를 조금 더 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회기본시설과 의료복지시설 기반이 없으면 여성의 사회참여가 여성에게 이중삼중의 노동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은 문제의 지점은 명확하게 지적했지만 보수적인 독자를 의식했음인지 지나치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족관계에 따른 의무가 비단 노인이나 환자가 있는 가족에서만 특수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노인복지와 의료복지의 기반은 당연히 필요하고 또한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기에 굳이 지목을 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해결해야 할 과제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도 아니다. 가족관계에 따른 의무는 본질적으로 가족관계가 바뀌어야만 해소될 수가 있다. 쉬운 예를 들어 1급호텔 수준의 양로원이 동네마다 세워진다고 해서 사회적 노동을 위해 시부모를 양로원으로 모시는 며느리가 ‘일하는 여성의 모범’으로 칭찬받을 수 있는가, 또는 전문 간병인(호스피스)도 이미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환자를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간병하도록 하는 것이 적어도 비난받지 않을 만큼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사회적 비난도 가볍지는 않지만 그쯤은 여성이 의지와 용기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치자. 어차피 일하는 여성이 얼굴에 철판 깔 일은, 이번 정책방안조차도 쏙 빼놓고 지나간 ‘직장내 성희롱’ 문제를 필두로 해서 한두 가지가 아닐테니까. 그러나 잊었는가. 그것은 ‘가족관계에 따른’ 의무이며, 그 의무 부과의 주체는 일차적으로 가족이다. 사회복지 제도가 제아무리 확충된다 할지라도 복지혜택을 이용하는 대신 굳이 여성에게 떠넘겨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전근대적인 가족관계의 여성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남이 아닌 가족의 비난은 누구라도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겨레신문>의 결론은 백번 지당하다. 이러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여성을 묶고 있는 족쇄를 풀어주지 않고서는, 문짝만을 활짝 열어 사회적 노동으로 내몰았을 때 나타날 결과란 슈퍼우먼의 신화, 이중삼중의 고통의 강요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이야기해야 하는가. 도대체 사람들의 관념을 제도로서 어떻게 바꾼다는 것인가. 정부가 제도적인 뒷받침만 해줄 수 있으면 그뿐이지 아예 나서서 가족관계를 변화시키라고 계몽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가족들의 의사에는 전혀 상관없이 여성의 의무로 떠넘겨질 가능성이 있는 모든 대상자를 복지시설에 강제수용하는 공권력의 폭력이라도 휘둘러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전근대적인 가족관계의 변화가 움직일 수 없는 전제라면 사회통념이라는 이름의 관념도 관념이려니와 아직도 고쳐야 할 제도는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지경이다. 먼저 가족법에 남아있는 모든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잔재를 일소해야 할 것이다. 성별 분업에 기초하는 가부장제가 옹호되는 한 여성은 ‘가족관계로부터 부과되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호주제도의 폐지, 동성동본 금혼제의 폐지는 물론이려니와 나아가 미혼모-사생아에 대한 신분적 차별의 페지와 아울러 가부장제 옹호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극심한 사회적 편견에 직면해 있는 미혼모-사생아는 물론, 고아, 독신가족, 이혼가정, 편부-편모가정 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누구도 그 가족형태를 이유로 고용에 있어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획기적인 사생활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취업면접에서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거니와, 뿌리깊은 관념을 쉽게 바꿀 수 없다면 강제규정으로라도 취업면접에서 사생활을 질문하거나 인사기록 따위에 이같은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해야 한다. 또한 가정내 폭력, 즉 부녀자 및 아동 학대 반사회적 범죄로서 강력한 처벌규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남녀고용평등법은 사회적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직장에서조차 성별 분업의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부당한 의무가 부과되는 일이 없도록 강화되어야 하며, 성희롱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제 겨우 고용 할당제조차도 우여곡절을 겪고 있으며, 모성보호의 개념조차도 합의되지 않는데다가,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물론 여타의 복지제도도 제자리걸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엄해지자. 이 꿈이 하나둘씩 현실화되어 가지 않는 한 그 어떤 제도도 조삼모사의 사탕발림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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