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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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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여자? - 죄 없는 자 돌을 들어 치라
작성자 똥개

여자가 못나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몇 가지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그는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칭찬에 익숙해져 있고, 커가면서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을 깊이 느낀다. 그러나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어도 어머니가 외출했다면 그다지 바쁜 일도 없어보이는 아버지와 동생들의 저녁밥상에 자연스럽게 걱정이 미친다. 때로는 투덜거려보기도 하지만 왠지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은 께름직한 마음에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결국은 어머니 대신노릇을 하게 된다. 그가 좀더 자라 친구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관심사들과 아울러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일도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어딘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옷이나 머리모양, 장신구들에 대한 애기도 무시하지 못할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늘 생각하곤 하지만 애인 하나 없는 스스로의 모습은 늘 초라하고 불안하다. 어느샌가 이성친구에 대한 관심이 성적이나 취업에 대한 부담보다 더 커지기도 한다. 그는 이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모든 것을 남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아가 딸은 ‘여자답게’ 또는 아들은 ‘남자답게’ 자라도록 통제하고 간섭하는 어머니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그런데 그 불평등의 원인을 진단하는 시각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 아마도 가장 그럴듯한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이 바로 여성 자신의 순응적 태도, 의지박약, ‘말로는 평등을 떠들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한치도 더 발을 내딛지 못하는’ 비겁한 이중성들에 대한 지목일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아무리 잘 나봤자 여자’이고, ‘하여간 여자들은 그래서 안되’며, 심지어 ‘차별당해도 싸기’까지 하다. 왜 좀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또는 말로만 주장하는 것조차도 몸소 실천하지 못하는가. 얼마간 노력하는 척하다가도 또는 아예 애초부터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데 도대체 무슨 평등이 거저 주어진단 말인가. 대충 이런 투의 겉으로는 몹시 안타까와하는 척하면서도 또는 아예 그런 거추장스러운 수사마저 생략한 채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평가들이 귀를 간지럽힌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반여성적이라고 공박하는 소위 ‘여성잡지’들을 도대체 누가 사서 보는가. 결국 여성들이 아닌가. 또는 이렇게도 말한다. 취업기회의 불평등을 성토하기도 하지만, 결혼하면 직장일에 그만큼 소홀해지는 건 그저 편견만이 아니라 어느정도는 사실이지 않은가. 또한 도대체 취업을 위해 (적어도 남성들만큼)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가. 아예 ‘취집(?)’을 위한 배우자 구하기에 더 급급한 모습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남자라면 아무 소리 없이 해낼 일을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저렇게 회피하면서 걸핏하면 제 편한 대로만 차별이니 불평등이니 목소리를 높여대서 골치만 아프게 하는 여직원을 어느 회사에서 좋아하겠는가. 제 아무리 양성의 평등을 주장하고 싶은 이라 할지라도 이 반문들이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강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관념과 현실, 정서와 이론 사이에서 정신없이 휘둘리다 보면 어느샌가 ‘여성의 권익’을 주장하는 사람이 매우 모순적이게도 ‘여성’을 비난하고 공격하게도 된다. 한 마디로 ‘저런 여자들이 여자망신 다 시킨다’? 그래서 동생이 언니를 공박하고, 언니가 동생을 질타하고, 딸이 어머니를 비난하고, 어머니가 딸을 구박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혐오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시비하고, 가질만큼 가지고 배울 만큼 배웠다는 여자가 그렇지 않은 여자를 무시하고, 못 배우고 없이 산다는 여자가 그렇지 않은 여자를 질시하고, 게다가 점입가경으로 이것은 또하나의 빌미가 된다. 같은 여성들끼리조차도 이렇게 ‘적전분열’(?)을 보이면서 무슨 ‘여성의 단결된 힘’ 어쩌구를 떠드느냐는 식의 비아냥이 하나 더 덧붙여진다. 이쯤되면 여자들이란 그저 사소한 일에나 목숨걸다가 좀더 단결하고 연대한다면 어렵게나마 찾아먹을 수도 있을 제 밥그릇 하나도 못 챙겨먹는 지지리 못난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모습을 과연 흔히 말하는 대로 단지 ‘일부’의 모습이 전체인 양 과장되었을 뿐이라고 애써 평가절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여성들이 어느만큼씩은 하다못해 자기 내면에서조차 겪고 있는 갈등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김없는 현실이라고 맞장구치자니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차별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 만큼 부당하다고 분명히 느끼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여성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는 망연자실 두 손을 들어버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하늘을 찌른다 해도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여자로 태어난 게 죄라는 팔자탓밖에 남을 것이 없다. 잔인하게도 이렇게 체념하고 주저앉은 뒤통수에도 어김없이 비난의 화살은 그것보라는 듯이 날아 온다. ‘어쩔 수 없는 노예근성’이라고.

평등을 주장하려면 굶어죽어라?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논리로 여성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분풀이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 차분하게 분을 삭이고 냉정하게 되돌아 보자. 백걸음을 양보해서 여자들이 못났다고 치자. 도대체 그것이 왜 여자들의 탓이란 말인가. 만일 서두에 제시한 풍경과 정반대되는 풍경이 펼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에서 열까지 모조리 들춰내 보자.

‘계집아이’가 도통 부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신경하기 그지없다면 지기 싫어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데다가 남들이야 어떻게 봐주건 말건 외모 따위에는 전혀 무관심하다면, 아마도 반대의 경우 날아오는 비아냥보다 훨씬 더 강도높은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처참하게도 그것은 말로만 때우고 마는 단순한 비난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불이익으로 고스란히 다가온다. 아니 심지어 그렇게까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닌데도, 다시말해 늘 부엌데기 노릇을 감수하다가도 어쩌다 한번 소홀해 져도 또는 그다지 강한 어조도 아니고 무척 조심스럽게나마 그야말로 ‘말참견’ 한번 해도 그리고 곧잘 꾸미고 다니다가도 한번쯤 ‘실수’를 해도, 절대로 너그럽게 넘어갈 수 없고 비난과 불이익의 강도는 조금도 약하지 않다. ‘계집아이’에게는 ‘단 한번’조차도 용납되지 않으며, 한 번이라도 이미 전부인 것이다. 이런 꼴을 그대로 두고 ‘철없는 선머슴애’에 대한 편견어린 비난을 전혀 철회하지 않은 채로 또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불이익을 고스란히 온존시키는 채로, 그래도 평등을 원한다면 그 모든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용감해 져야 한다? 아무리 ‘병주고 약준다’는 속담도 있다지만 도대체 이토록 고약하고 뻔뻔한 논리가 또 어디에 있는가.

한술 더 떠서 ‘프로인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다’는 교묘한 사탕발림의 망장난을 던져놓고는, 희한하게도 ‘남자보기를 돌같이 하면서 일에만 전념하려는 여성’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기는커녕 성희롱마저도 서슴지 않는 놀림감으로 씹어댄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현명한(?) 여성’이라면 ‘일할 때는 프로, 화장할 때는 여자’여야 한다고 눙치기까지 하면서 도대체 어디다 대고 ‘여자가 아무리 잘나봤자’라고 혀를 차고 이중성이니 모순적이니 입을 놀려대는가. ‘여자답지’ 못한 여자를 향해서라면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아니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평판으로 작용할 온갖 험담을 일삼으면서 바로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면화된 ‘여성스러움’이 겉으로 드러났다고 어떻게 ‘그러니까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고 함부로 싸잡아 타박할 수 있는가. ‘노처녀’라면 뒷구멍에서뿐 아니라 아예 대놓고 ‘어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무슨 낯으로 그가 결혼을 고려한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는 여자’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는가. 이 따위 돼먹지 못한 정서적 폭력도 과연 여성이 못나서 자초한 것인가.

대졸 여성 취업률이 단지 탁상머리의 통계수자만은 아닌 사회에서, 그리고 상대적으로는 그나마 많을지 모를 고졸 여성의 일자리라 봤자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어차피 어린 여자를 데려다 놓아도 별반 댤라질 것 없는 기껏해야 사환노릇이 고작이니 나이들수록 공연히 월급이나 올려줘야 하는 게 부담스러워 결혼을 재촉해대는 그런 사회에서, 그나마 남편이 벌어다주는 수입에라도 기대지 말라면 여성은 다 굶어죽으라는 말인가. 그 뒤통수에다 대고 ‘결혼은 인생의 전부’를 여성 의식의 후진성이라고 떠들어 대기까지 한다면 도대체 양성 평등을 주장하려면 아예 굶어죽기로 작정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런데 더욱 우스꽝스럽게도 입만 열었다 하면 여성운동이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과격하다고 노래를 불러대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사회적 발언권과 영향력이란 그 사회에 대한 참여도와 활동의 비중에 기초하게 바련인데, 여성이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이렇듯 철저하게 봉쇄하고서도 여자들이 모자란 탓이라고 여성들이 비겁하고 순응적이며 의지가 박약해서 제 밥그릇하나 못챙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성들이 지레 주저앉는 것이 안타깝다고 마음에도 없는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좀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그리고 조금씩이나마 실천해보려 하는 여성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접해왔는지를 냉정하게 반추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곱씹어봐도 끝내 ‘알고보니 후안무치한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았다’고 끄덕일 수 없다면, 바로 그런 당신 한사람 한사람이야말로 이 모든 폭력의 주범이다.

게다가 여성이 사회활동으로부터 이렇게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해서 그렇게 처참하게 떠밀려 집안으로 쳐박히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더욱 참혹한 모순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받는 아내, 성공하는 남편’이라는 허구에 가득찬 신화가 횡행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아내의 충분한 ‘내조’를 받지 못하는 남자는 무능한 팔불출로 낙인찍어 비난과 불이익을 안겨주면서, 결혼한 여자가 직장보다 가정에 신경쓰는 것이 못마땅하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말인가. 딸과 아들을 차별없이 평등하게 키워봐야 씻을 수 없는 좌절과 혼란만을 안겨 줄 황당한 사회에서, 남편은 돈이나 벌어다 주면 되고 아이들은 전적으로 아내 책임으로 미뤄두어야 그나마 가정경제의 경쟁력이 확보된다는 사회에서, 걸핏하면 날아오는 ‘애들 잘못 키웠다’는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지 않을 재주라고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성차별의식으로 무장하고 ‘집안단속’에 전념하여 가부장적 질서를 재생산해야 하는 길밖에 더 있을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니를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회에서 온 가족이 손맞잡고 도태되자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무슨 배짱으로 ‘남다른’ 평등가정을 꿈이나 꾸겠는가. 더구나 그 모든 것이 주부로서의 여성의 책임이라는데야! 이른바 ‘남성보다 더 보수적인 여성’은 도대체 누가 만들고 있는가.

여성, 가장 치밀하고 추악한 굴레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인위적 개입이 분명한 성비 불균형과 세계적인 태아살해율이 상징하듯 태어나기 전부터, 철저하게 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은, 그렇게 딸로 키워지고 여성으로 길들여진다. 이 땅의 딸은 무슨 짓을 해도 구박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성적 매력’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도 그것을 함부로 드러냈다가는 ‘화냥년’ 소리 듣기 꼭 좋다. 결혼하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폭력을 감수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사회적 편견을 감당해야 한다. 결혼하고도 일을 계속 하면 반쪽짜리 주부라고 타박받고 안 가지면 주부로서 존중되기는커녕 부엌데기 취급이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여성이 사회적 편견과 그보다 더 극심한 현실적 불이익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에 뒤따를 심리적 상처와 공황으로부터 놓여나는 길은 오로지 스스로의 주체적인 인격을 부인하는 ‘인격적 자살’뿐이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다.

이것은 차라리 교묘하게 계산된 혼란이다. 여성이 이렇듯 복잡하고 모순된 상황 속에서 극심한 정체성 위기를 느끼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삶을 선택하건 여성은 이미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적대적이다. 다만 개인이 놓여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 더하고 덜한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다양한 처지에 놓인 여성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렇게 ‘여성의 적’으로 점점 더 구조화되어 간다. 한편에서는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임신.출산.수유라는 전통적인 여성과 치열하게 싸워가면서, 또 한편에서는 (또한 그 자신 안에 있는)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사회적 자아실현의 욕구를 억눌러 거세해 가면서, 그리고 그 외에 다양한 대립점에서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나아가 한편에서는 이토록 끔찍한 자기혐오에조차 고집스럽게 저항하면서. 그리하여 독신주의자 언니는 모성(母性)만이 존재의 의미라는 동생과 다투고, 삼종지도를 좇아 살아온 시어머니는 바깥일을 하려는 며느리를 억누르고, 그리고 그 외에 다양한 대립점에서 여성이 여성을 미워하며, 나아가 어떤 여성은 이렇게 서로를 보듬어주지 못하고 대립하기만 하는 여성들을 적대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만물이 자기부정과 지양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면, 이렇듯 다양하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여성’도 서로를 지양하면서 더욱 성장하고 발전해가야 옳지 않은가. 이 질문에는 하나의 대답과 하나의 숙제가 남는다. 하나의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 ‘여성’은 바로 이러한 분열과 대립이라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것은 이미 굴레이며, 이러한 분열이야말로 가장 견고하고 치밀하고 추악한 굴레가 아니던가. 이 모든 과정 자체가 남성중심사회가 여성에게 던져놓은 덫이다. 그리고 하나의 숙제가 남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굴레를 벗고서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 덫을 대신 치워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저들이 무어라 비아냥거리든 이 사회가 어떤 편견의 폭력을 휘두르든 아니 심지어 여성 스스로조차 그 편견에 어떻게 무릎을 꺾든, 저들이 그러하듯이 여성이 여성을 비난하고, 여성이 여성에게 편견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리하여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끝내는 스스로 무릎을 꺾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모든 여성이 지금 당장에 다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다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다 여성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으리라고 어설프게 기대하지는 말자. 가부장적 질서가 그렇게 손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면 그토록 오래도록 유지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일 지금 여기에서 여성이 저들의 편견을 내면화하고 있고, 그 질서에 순응하고 있고, 그 폭력에 동참하고 있고, 또한 그렇게 분열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여성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런 참혹한 상황으로까지 내몰고 있는 저들의 폭력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이 폭력을 근절시켜야 할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책임일 터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는 폭력에 떠밀렸을 뿐인 여성을 힐난하는 대신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정서까지를 조작해가며 폭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지배자들을 더욱더 분명하게 겨냥해야 하는 것이다.

발표지면 미상, 1995.
단행본수록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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