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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이라는 딜레마 - 백재희에 관한 고찰
작성자 똥개

백재희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다

1995년,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미덕’이라 믿어져 온 성격을 가진, 이성에 대하여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한 남성을 거의 열광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러한 남성을 <모래시계>에서 처음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재희’는 전혀 새롭게 느껴진다. 그 이전의 ‘재희’들은 유약하고, 섬세하며, 한마디로 전통적인 ‘남성적 매력’이라는 점에서 늘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들은 늘 그보다 훨씬 더 ‘남성적’인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성격이 만화적으로 과장되면 될수록 더욱더 바보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사랑놀음’이라는 전형적인 스토리에서 패배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모래시계>의 재희는 오히려 바로 그 ‘여성성’이 강조되고 과장되면 될수록 역설적으로 더욱 ‘남성적’이었고, 제3자의 논리체계로는 여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결말이지만 그 자신의 논리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마저 버리는’ 지극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무엇이 <모래시계>의 재희를 이전의 ‘재희’들과는 다르게 하는가, 또는 정작 주인공들인 태수나 우석보다 강한 매력으로 다가오게 하는가. 다른 한편으로 재희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단순히 ‘공주와 기사’의 구도에 놓여 있는 기사의 역할일 뿐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그의 등장에 열광하게 하는가. 물론 <모래시계> 전체의 구조로 보거나 인물 자체의 성격만으로도 백재희는 매우 만화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이런 것이 과연 있기나 할는지)의 소산은 아닐 것이다. 분명 현실에는 ‘재희’를 닮은 -- 한 마디로 말해서 ‘여성적인’ 남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재희는 그러한 현실의 반영이며 사실을 말하자면 거꾸로 <모래시계>의 재희가 ‘현실의 재희들’을 닮은 것이다. ‘현실의 재희들’과 그를 닮았으면서도 훨씬 과장된 <모래시계>의 재희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모래시계>에서의 재희는 전형적인 ‘남성’ 태수를 그 반대편에 전제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혜린의 태수에 대한 애증관계가 주축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에서, 재희의 혜린에 대한 헌신은 보조축을 형성한다. 전형적인 구조에서라면 태수와 대비되는 재희는 바로 그 헌신성으로 인해 혜린에게 무시당해야 하며, 그 비극적 죽음 또한 지극히 당연한 퇴장으로서 안타까움이나 연민이 아닌 비난이나 조롱의 정서를 유발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이야기 방식이다. 흔히들 이것을 두고 몇 가지 주변장치들만 바뀔 뿐 늘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들에 식상한다고도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다른 새로움이 주는 신선함에서 느끼는 재미를 위해서만 드라마를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름아닌 바로 똑같다는 점 그 자체, 익숙함이 주는 안도감에서 더 많은 재미를 느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 태수는 헤린에게 절대적인 애증의 대상이 되고 재희의 헌신은 무시되는 것이 익숙한가. 단지 그런 소설, 그런 드라마에서 무수히 그런 ‘재희’들을 보아왔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전형적인 구조에서조차도 ‘재희’는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다. 즉, 소설이나 드라마 이전에 이미 익숙한 것은 현실이다. 전형적인 구조란 다름 아니라 ‘현실의 혜린들’에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다시한번 소설이나 드라마가 보여줄 때 많은 ‘혜린’들은 ‘재희’가 아닌 ‘태수’의 선택이라는 자신의 삶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현실에서의 ‘재희’들은 여전히 ‘남성적’인 매력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의 헤린들은 왜 태수를 선택하는가이다. 만일 그것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당연한 선택이라면, 굳이 드라마 따위의 힘을 빌어 안도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고 그야말로 재미없고 뻔한 이야기에 식상할 것이다. 사실상 현실의 ‘혜린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재희’를 향한 선망이 있을 것이다. 헌신적이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을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남성들만의 특권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현실은 그러한 선망을 용납하지 않으며, 남성들에게만으로 그 특권을 제한한다. 여성이 이 굳건한 성역할의 벽을 넘으려면 숱한 좌절과 사회적 비난, 현실적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설령 용감하게 그 벽을 돌파하려 한다 해도, 현실의 ‘재희’들은 <모래시계>의 ‘재희’처럼 절대적으로 헌신할 수가 없다는 또 하나의 벽이 있다. 비단 한 여성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와의 관계에서 ‘재희’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자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팔불출’은 남성으로서는 사회생활에 결코 달가운 평가가 아니다. 기껏 용기를 낸 선택이 그토록 사회적으로 초라할 수밖에 없는 남자라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누가 감행할 것인가.

여기에 <모래시계>의 전혀 현실과는 다른 ‘재희’가 던져진다. 혜린의 보디가드가 바로 재희의 직업이다. 재희에게는 혜린과의 관계 자체가 이미 사회적 관계이며 그 외의 사회적 관계란 없다. 만일 ‘현실의 혜린’들이 <모래시계>의 혜린처럼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성역할에 대한 정서적 억압을 스스로 극복해낼 수 있다면, 또한 결국 ‘여자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온달’에 지나지 않을 스스로에 대해 정서적 거부감은커녕 <모래시계>의 재희처럼 한없이 만족할 수 있는 남성을 발견한다면, 하나도 아닌 수많은 ‘재희’의 헌신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의 헤린들은 부자집딸이 아니며, 따라서 태수의 남성성이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보이는 정서적 억압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설령 ‘재희’를 만난다 해도 남성적인 매력을 좀체로 느낄 수 없고, 나아가 ‘여성성’으로 인한 사회적 부적응이 그저 딱하기만 하고 심지어 무기력한 ‘온달족’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자집딸도 아니고 바보일 수도 없는 ‘현실의 혜린’들은 그렇게 태수를 선택한다. 아니 선택 이전에 이미 정서적으로 그것만이 남성의 긍정적 가치라고 내면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성들에게만 허용된 ‘헌신적 사랑을 받을 특권’에 대한 선망까지 송두리째 사라지지는 않는다. 특히나 그가 사회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자신이 선택한 ‘현실의 태수’에게 헌신적일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면, 그와 반비례하여 그 선망은 더욱 증폭된다. 한번쯤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여자가 얼마나 되랴. 이 모순이 백재희에 대한 열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미 전례가 없지도 않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기록적인 판매부수를 기억한다. 강민주와 황남기의 관계는 또 얼마나 헤린과 재희의 관계를 닮았는가.

그러나 적어도 ‘태수’의 존재로 인해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그래서 더욱 시사적이다. 끝까지 재희는 보디가드일 뿐 헤린의 상대는 태수이다. 만일 이와는 달리 혜린이 재희에 대하여 미안함과 고마움뿐 아니라 태수에게의 그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을 느끼고 표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원하건 원치않건 반대급부를 받는 것은 더이상 ‘절대적 헌신’이 아니기에 재희는 더이상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 뿐일까. 혜린에게서 태수가 재희에게 패배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상하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해 선망의 충족만이 유일한 관건이 아니며, 전통적인 구조에서 태수가 태수이기 위해 초라한 재희가 필요하듯, 거꾸로 재희 역시도 재희이기 위해서는 혜린의 진짜 상대인 태수를 필요로 한다. 현실에서라면 결코 한꺼번에 가질 수 없는 두 가지를 모두 누리는 만화 주인공을 보면서, 현실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안도감과 함께 그로 인해 배제될 수밖에 없는 선망의 대리충족까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강요되는 선택 자체가 필요없는 상황 설정이다. 즉 태수의 존재가 전제되는 한에서, 정서적으로조차 불안한 도박을 감행하지 않고서도 안심하고(!) 재희의 헌신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라면 설령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려는 재희가 옆에 있다 해도, 그 헌신은 바로 헌신이기 때문에 부담스럽기 짝이 없고,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단순히 받는 것조차도 거의 신경질적으로 거절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현실의 혜린은 만화 주인공이 아니기에 절대적일 수 없고, 태수를 향한 선택이 조금이나마 흔들릴 가능성을 스스로 배제하지 못하는 불안감을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모든 남성은 태수이며, 태수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혜린의 눈으로 재희를 보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전제를 한번만 더 확인하자. <모래시계>의 재희와는 분명히 다르지만 현실에도 ‘재희’들이, 그것도 현실의 수많은 ‘혜린’들이 태수와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만큼이나 적지않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재희’에게 열광할 수 있었던 ‘혜린’들이라면 이 사실 자체를 승인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선택 이전의 내면화’라는 정서적 기제가 크게 작용한다. 수많은 ‘재희’들을 만나고서도 한번도 그들을 ‘남성’으로 의식해 보지 못했기에 ‘여성성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남성적인’ <모래시계>의 재희에게서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현실의 재희들을 만날 차례이다. 그들을 복원하지 않고서는 재희는 만화 속의 인물로서만 대리충족의 대상으로서만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재희를 만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장애물이 하나 있다. ‘남성성’으로서의 태수, ‘여성적 남성’으로서의 재희와는 또다른 남성상 ‘우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감스럽게도 ‘현실의 우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물의 성격이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는 대전제에 위배되지 않는가? 물론 그러한 의미에서라면 ‘우석’은 현실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태수나 재희처럼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보다 세련된 ‘태수=남성성’의 모습일 뿐이다. 곤혹스럽지만 <모래시계>의 작가 송지나가 여성이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같은 작가의 <여명의 눈동자>에서 ‘우석’에 해당하는 장하림은, 드라마 속에서는 매우 평면적인 인물이었지만 원작소설에서는 그보다 훨씬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사실상 태수의 또다른 모습이었던 셈이다. <모래시계>의 우석은 또 얼마나 평면적인가. 다시 말해 ‘태수:우석’이라는 대립항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특히나 여성들에게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라면 ‘우석’은 그저 태수가 입고 있는 옷일 뿐이다. 우석이라는 옷을 걸쳐입었다 해서 태수가 태수가 아닌 것은 아니다. 만일 <모래시계>에서 우석과 태수의 대립적 성격을 그대로 둔 채, 사건 전개에 있어서 그들의 위치를 바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정해 보자. ‘휴머니스트’ 우석이 불우한 가정에서 깡패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남성의 야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태수가 천신만고 끝에 검사가 되었다면 말이다. 우석은 반쯤 태수가 되어 있고, 태수는 반쯤은 우석을 닮아 있어야 어느정도나마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청자들은 인물의 성격에서 매우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 우석을 태수와 전혀 다른 또는 대립되는 인물로 설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모든 남성은 태수이다. 태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우석’이라는 옷을 아주 어색하게 또는 아주 익숙하게 걸쳐입고 있다. 그렇다면 ‘우석’이 남성의 본질이고 ‘태수’가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래시계>가 스스로 보여준다. 태수의 역동성과 우석의 평면성으로. 그렇다면 우석보다도 훨씬 더 만화같은 인물 ‘재희’는 왜 단순한 허상이 아니며, 어떤 점에서 태수와 다른 또하나의 남성인가. 도대체 ‘현실의 재희’란 누구인가.

남성들은 태수이건 재희이건 어느 만큼은 남성우월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매우 의미있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남성우월주의라고 하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든가 ‘여자가 감히’ 식의 공세적인 모습이 거의 대부분이었던 반면, 물론 여전히 이런 공세적 태도가 맹위를 떨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소위 ‘역차별’을 이야기거리로 삼는 수세적인 태도가 활발하게 담론화되고 있다. 물론 수세적이라고 해서 공세적인 것보다 덜 폭력적인 것은 아니며, 더 많은 경우에는 오히려 더 폭력적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해자 집단이 피해자 집단에 대하여 ‘피해 의식’을 과장하려는 경향은, 파시즘의 상징조작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종주의자들은 흑인에 대하여 ‘멸시’라는 공세적 태도보다 ‘위험’이나 ‘공포’와 같은 수세적 태도를 더 유용하게 이용한다. 나치즘의 경우에도 유대인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폭력은 독일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피해의식을 집단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나 과장되고 때로는 전적으로 허위에 지나지 않는 ‘피해’가 도대체 어떻게 집단적 피해의식으로 조직될 수 있을까. 또는 남성우월주의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그 폭력성의 우열을 가리기조차 힘든데 누구는, 또 언제는 공세적인 데 반해 다른 한편에서는 수세적인가.

공세적 남성우월주의가 여성운동에 대해 주로 백안시하는 태도를 취했다면 수세적 남성우월주의는 이보다 훨씬 더 과격한 어조로 여성운동을 공격한다.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조금도 이완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교묘하게 강화되고 있는 현실도 이들에게는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차라리 공세적 태도라면 현실을 다 인정하고서도 ‘하늘이 정한 이치’라는 영원한 도피구가 마련되어 있지만, 수세적 태도는 오히려 ‘남녀평등’이라는 관념을 (물론 전혀 다른 뜻으로) 승인하고 있기에 ‘역차별’이라는 억지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사실 이들의 유일한 근거는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피해’이다. 그리고 그에 집착하는 한 그 어떠한 현실 상황을 반론의 근거로 제시한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여성이 어떻게 차별받고 있건 간에 ‘나도 역시 당한다’는데야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피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말한다. “가사노동? 남자는 놀면서 돈 벌어다 주나?” 또는 “모성보호? 애 낳는 게 그렇게 대단하면 군대 3년은 누가 보상해 줄래?” 뒤집어 보자면 이들에게는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취’도 더이상 자랑스럽고 떳떳하지 않으며, 전통적인 남성상에서라면 가장 남성다운 역할인 군 복무도 어쩔 수 없는 고역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더이상 ‘남성성’은 기득권의 상징이 아니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건 그들은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왜 그들은 이 특권을 공세적 남성우월주의자들처럼 뻔뻔스럽게 즐기지 못하고, 심지어 할 수만 있다면 기득권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남성으로서의 성역할에서 벗어나고 싶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

사회적 배경은 조금 뒤에 묻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태수’를 내면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태수’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모래시계>에서의 대립적 의미망을 굳이 대입하자면 이들은 ‘태수’보다는 ‘재희’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이들은 ‘재희’가 아니다. 차라리 ‘재희’일 수 있다면 피해의식 따위는 가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현실의 혜린이 ‘재희’가 아닌 ‘태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바보가 아니기에 ‘태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들이 주장하는 피해의 정체는 바로 이런 삶의 괴로움일 것이다. ‘재희’로서 살고 싶기도 하지만 아무 방법이 없다. 헌신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태수’가 되어야 한다.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재희처럼 비극적이지만 행복한 최후는커녕 결코 ‘혜린’일 수 없는 현실의 많은 여성들 앞에서는 오히려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가 보여주는 바 그대로 우스꽝스럽고 남성적 매력이라곤 전혀 없는 푼수일 뿐이다. 기껏 호의적인 반응이라고 해봤자 “넌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야”이고, 그 이상의 애정을 상대에게 요구한 적이 없는데도 그저 자기가 표현하는 것조차 거절당하고 ‘친구’의 위치에서마저 쫓겨나기 십상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태수’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재희는 남성우월주의자이거나 사회적 패배자이다

가부장제 질서가 무너진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런 엉뚱한(?) 남자들이 튀어나온 것일까. 흔히 ‘신세대’ 담론에서 이야기되듯 물질적 풍요로 인해 어려운 일의 극복보다는 회피에 익숙해져, 권리도 필요없고 대신에 의무도 없는 ‘쉽고 가벼운 삶’을 선망하는 치기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단순한 치기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남성=어른스러움:여성=소녀적 치기’의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감안한다면 이들은 매우 ‘여성적’이다. 그리고 신세대를 물질적 풍요와만 연관시키는 것이 오히려 기성세대의 편견일 수도 있음이 자주 지적되기도 하지만, ‘남성성’에 관해서라면 다른 배경을 더 고려해 볼 여지가 있다. 남성이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프로이트는 거세공포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아버지를 동일시함으로써 남성성을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이들에게 남성성이 충분히 내면화되지 못했다면, 그들의 성장기에 ‘부권의 부재’라는 상황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동일시되기 위해서는 권위의 두 측면, 공포를 유발할 수 있는 힘과 사회적 학습 대상으로서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사회 변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60-70년대 사이에 대부분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일관된 모습일 수 없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일관성을 수반하지 않는 힘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기는 하겠지만 권위를 기대할 수는 없다. 흔히 정치적으로 그러하듯이 공포만을 유발하는 힘은 저항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아버지는 동일시의 대상이 아닌 더욱 분명한 증오의 대상으로 고착되고,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극복의 통로를 찾지 못한다. 거세공포가 동일시를 통해 해소되지 못하고 고착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부권’을 요구하게 된다. 전통적인 남성은 ‘리더’이지만 그들은 상실한 아버지 대신에 ‘리더’를 필요로 하는 ‘스탭’의 역할에서 훨씬 더 정서적으로 안정된다. 아버지가 될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도 심지어는 사회적 성취로서 승진을 통해 리더가 되는 것도 불안하다. 물론 아버지가 누리게 될 특권이나 리더로서의 재량권 확대 또는 사회적인 지위 역시도 부담스럽거나 적어도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든 남성은 말단사원조차도 ‘잠재적 리더’로 간주된다.

사회적으로 처음부터 ‘태수’로 살지 않으면 안 될, 아니 그 이전에 ‘태수’를 내면화해야만 할 남자가 필요로 하는 ‘부권’은 역설적이게도 여성에게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시대에 이른바 ‘사랑’이란 ‘절대성’의 담론에 포섭되어 있다. 이 경우의 ‘부권’ 역시도 두말할 나위 없이 절대적 권위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재희’가 탄생하는 사회심리적 기제이다. 절대성에 대한 맹종, 그 구체적 표현으로서 이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과 헌신은 상실한 부권에 대한 고착이 그 대리물을 향해 표출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대부분의 여성에게 ‘남성적’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아직도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은 더더욱 아니다. 차라리 여성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 용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성정체성의 전환을 꿈꿀 수도 있다. 다만 그저 유아기에 고착된 심리적 미숙아(!)일 뿐이다.

남성을 내면화할 기회가 없는 채로도 그들은 학교 교육, 가족관계 등 제도에 의해 남성을 주입받는다. 남성에게 여성은 늘 정복의 대상이다. 하물며 전도된 부권으로서의 맹목적 집착과 반복되는 좌절(그는 여전히 남성적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의 결과는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헌신적인 ‘재희’--페미니스트가 되는 대신 오히려 수세적일망정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가 된다.

이들은 ‘재희’를 보면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이다. ‘재희’조차도 ‘태수’로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재희’가 ‘재희’로 살다가 ‘재희’로 죽음을 맞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그러나 반대로 극단적인 혐오감을 드러낼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 편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이 심리적 미숙아라는 점까지를 감안한다면 동일시를 통한 대리충족보다는 한 차원 낮은, 현실에서 좌절된 선망에 대한 즉자적인 질투의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재희’에 그토록 열광하는 그 어느 누구도 현실에서 ‘재희’를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 드라마니까 안심하고 즐길 뿐이다. ‘재희’를 만난다 해도 ‘태수’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에서의 ‘재희’는 남성우월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미 사회적 패배를 감수하고 있는 초라한 모습일 것이다. 그가 아무리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며 그 헌신과 희생이 미안하고 고마울 만큼 실제적 도움이 된다 해도, 사회적 성취를 포기한 남성은 그저 봐주기조차도 거북스럽고 민망한 노릇이다. 재희처럼 여성성이 오히려 남성적 매력으로 전도되는 것은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재희들은 어찌할 것인가. 결국 ‘여성성’과 아울러 ‘남성성’이 헤채된 사회라는 한편으로는 공허한 모범답안 말고는 딱히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 외디푸스 컴플렉스니 하는 것 자체도 가부장제에서나 가능한 개념이라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한 가지 꼭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남성우월주의가 공세적이기만 할 때는 그들이 내면화한 그 이데올로기는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이해,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위해 봉사했다. 그러나 수세적인 남성우월주의가 대두한다는 것은 비록 일부이기는 할망정 남성들조차도 남성의 정체성을 거절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전혀 현실성이 없는 유아적 발상이기는 할지라도 ‘할 수만 있다면’ 남성의 기득권마저도 포기할 수 있다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설령 이미 깊숙이 정서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여성이라면 누구나 스스로가 ‘여성성’의 잣대로 규정되는 것을 질곡으로 느끼고 있다. 도대체 남성도 여성도 원치 않는데 아직도 이 틀이 견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남성성을 거절하는 남성과 여성성을 거절하는 여성을 빼면 남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듯도 한데.

새삼 하나의 경구를 상기한다. “모든 역사적 시기에 있어 지배적인 사고는 언제나 지배 계급의 사고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남성과 여성의 질곡에 가둬두는 것은, 현실에서 재희와 태수와 헤린을 만들고 있는 것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화 속의 ‘재희’를 만들어 내고 우리로 하여금 속없이 열광하게 하는 것은, ...?!

발표지면 미발표, 1995.
단행본수록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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