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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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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보면 말도 못 본다" - 이오덕의 '우리글 쥐어짜기'는 정당한가
작성자 똥개
80년대 초, 중반에 대학을 다니거나 또는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해 이른바 '사회과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들을 접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골방에서 숨을 죽여가며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어야 했던 문서들의 대부분은, 고작해야 번역이라고 하기조차 낯뜨거울 만큼 난삽한 문장들의 짜깁기였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운동권 사투리'라는 다분히 비아냥이 섞인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엉성한 말투가 횡행하기도 했고, 또한 필연적으로 '대중'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이들에게 그 말버릇은 스스로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리고 '글을 쉽게 쓰자'는 가장 실용적인 요구로부터 거창하게도 '민중'의 언어라는 심오한 철학(?)까지 담고 있으며 게다가 친절하게도 구체적인 사례를 세심하게 열거한 '작문지침(?)'이 바로 그곳에 던져졌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의 속삭임'이었고, 아무런 의심도 제기될 수 없는 '절대선'이었다. 한심한 일이지만, 이 '성서'의 권위에 이의를 표시한다는 것은 곧바로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대의에 도전하는 '먹물의 현학적 태도' 나아가 '민중'을 무시하는 '천박한 엘리트주의'를 뜻했다.

기억에도 새로운 몇 년 전의 사건을 새삼 떠올려 보자. 패기만만하게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던 한 연구자는, 그 나름대로 정연하게 제시한 과학적 근거에 대한 성의있는 반론 대신 오히려 마치 '더불어 토론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예의 '작문지침'으로 자신의 글이 난도질(?)당하는 '친절한 가르침'만을 되돌려 받았다. 가능하면 아니 심지어는 가능하지 않더라도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이야기하지 말자는 주장에 대해, '과학'이라는 인류 역사가 이룩한 고도의 추상능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반론을 들이댄 것 자체가 무모했으리라.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이 작문지침의 작성자나 그것을 성서인 양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한결같이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인데, 유감스럽게도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도 또한 그나마 쟁점이라도 될 만한 구체적인 언어표현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 만큼 정밀한 틀거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학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구체적 현상을 방대하게 분석한 체계에 추상적인 원론만으로 덤볐으니 변변히 싸움조차 못해보고 패배하는 것이 백번 당연한 일이다.
* 이 점은 언어학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연구과정에서 인접 사회과학과의 유기적 연관에도 천착하지 못했으며(최근 유행이다시피 한 '담론'이론의 수용과정에서 언어학자들의 이름을 볼 수가 없다), 교육 등 연구 성과의 대중화에도 초연(?)한 태도로 일관했다(소위 '학교문법'은 이러저러한 이론들을 정치적(?)으로 절충한 앞뒤도 제대로 안 맞는 짜깁기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밝혀야 할 것은 '신성한' 작문지침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허구라는 점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평생을 교단에 바친 성실한 교육자의 치밀한 작업이 사실은 전혀 치밀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국어를 배웠지만 단 한번도 한국어를 과학의 대상으로 바라볼 기회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문지침이 금과옥조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성실하게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연구의 성과물까지도 옳으리라고 무의식중에 미루어 판단해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본론에 앞서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갈 전제가 있다. 이 작문지침의 작성자 이오덕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하여 성실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특히나 그가 주장하고 몸소 평생을 실천했던 교육은 무척이나 뜻깊고 존경할 만한 일이다. 또한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왔을 '글을 쉽게 쓰자'는 논지나 '글말보다는 입말을 중심으로 보는' 언어관, 나아가 '헛된 관념이 아닌 참된 삶에 뿌리박은 민중언어'를 향한 지향 등은 오히려 더욱 강한 어조로 강조해 두고 싶은 원칙이다.

이렇게 그의 핵심주장을 다 긍정하고도 할 말이 남아 있는가. 물론 있다.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이야말로 본론이다. 전혀 뜻밖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이른바 대항언론을 표방하는 월간지에 고정란으로 장기간 연재되었으며 단행본으로만도 벌써 여러 권이 출간된 이오덕의 작문지침은 그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지침을 어김없이 지켜서는 결코 '쉬운 글'을 쓸 수도, '입말'에 충실할 수도, 나아가 '민중언어'에 이를 수도 없으며, 거꾸로 그가 주장하는 바를 따르고자 한다면 그 방대한 지침들은 심한 말로 '노인네의 잔소리'(?)쯤으로 무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어휘론은 많은 긍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입말로 했을 때 뜻이 드러나지 않을, 다시 말해 한글로 써서는 뜻을 모를 한자어'는 글에서도 쓰지 말자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 보기를 보면 '입말로 했더라도 뜻이 드러나며 한글로 써도 이해에 지장이 없는' 한자어까지 도매금으로 넘기고 있다. 어휘의 의미는 어휘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역동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쯤은 언어연구에서 상식에 속한다. 그러하기에 스스로도 '관념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말'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 명백한 전제를 잊었는지 고의로 무시했는지 모든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거의 신경질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는 '쉽다=단순하다'는 그야말로 단순한 등식이다. 언어행위의 사회적 기능은 정보의 전달이며, 적어도 '바르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추상적 가치가 아닌 '쉽다'는 실용적 가치를 말한다면 그 효율성을 문제삼겠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정당하다. 그리고 단순한 대상은 단순하게, 복잡한 대상은 복잡하게 말하는 것이 표현하기도 이해하기도 쉽다. 단순한 것을 어렵게 돌려말하는 것은 물론 고쳐야 할 태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것까지 단순하게 말해야 한다면 그것을 표현하기도 이해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대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며,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쪼개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있다>는 말이 있는데 굳이 <존재한다>, <위치한다> 같은 '어려운' 한자어를 왜 쓰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맥락에서 이 세 어휘의 뜻이 정확히 같은 대상을 일컫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나의 어휘가 국적(?)을 불문하고 사회적으로 힘을 얻어 쓰일 때는 반드시 그 특유의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다. 대상을 단순하게 표현하려는 쓰임새도 있을 수 있고 좀더 정교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쓰임새도 있다. 어떠한 대상도 가능하면 단순하게 인식하자는 것은 세계관에 관한 문제이니 그의 '사상의 자유'라 하더라도 이미 입말에서도 폭넓게 쓰이는 어휘를 '쓸데없는 군더더기'로 몰아세우는 것은 누가보아도 '참된 삶'과는 거리가 먼 그의 '관념'이다. <있다>도 소중하게 지켜가야 할 낱말이지만 <존재한다>, <위치한다> 또한 <있다>의 어떤 측면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자 할 때 무척이나 쓸모 있는 낱말들인 것이다. <푸르다> 하나에도 서로 다른 말맛을 가진 낱말이 수없이 쓰이는 따위의 '풍부한 어휘'는 우리 말의 자랑거리가 아니었던가.

물론 하필 한자어로 인해 토박이말의 의미영역이나 실제 쓰임새가 좁아지는 것은 원통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난 한자실력일랑 덮어두고 본다면 '입말'에서도 버젓이 쓰이고 '한글'로 써도 아무 지장이 없는 이 낱말들의 어원이 한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쯤에 이르면 '쉬운 말'을 제대로 가려 쓰려면 한자도 많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거나 적어도 무식한 민중들은 '어렵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니, 생생한 '입말'을 살린 민중언어는커녕 한자실력의 자랑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
* <미명으로>를 <아름다운 이름으로> 또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로 써야 한다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나 과연 <미명>이라는 낱말을 쓰는 사람중에 그것이 <美名>임을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는 <미명>이 허울좋든 아름답든 <이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뜻의 영역이 달라진 것을 어원, 그것도 한자의 어원만을 가지고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 심지어 '순우리말'이라는 말에는 순(純)자가 들어가서 안되고 '토박이말'은 토(土)자를 연상시키므로 곤란하다고 여기는 극단적 국수주의자들까지도 있는데 그야말로 '아는 게 병'이다.

그렇지만 이오덕은 한자어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어렵다', '입말에서 안 쓰인다'고 말할 뿐이다.* 이미 여러해 전에 정년을 넘기고 은퇴한 '어른'의 경험을 낮보는 것은 젊은 후학으로서 차마 못할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분명히 쓰이는 말을 안 쓰인다고 하니 그가 경험이 짧아 보지 못했거나 보고도 못본 척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할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물론 그는 여기에 대해서도 그럴듯한 방패막이를 마련해 두고 있다. 먹물들의 못된 글습관이 입말에까지 잘못 배어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멋 모르고 끄덕이기 꼭 좋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다가도 웃을 궁색한 변명이다. 불행한 역사이긴 하지만 못된 글버릇을 가진 먹물이 하나둘이 아니고, 그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말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건만 하필 어떤 말은 '난삽하다'고 욕만 실컷 얻어먹고 마는데 어떤 말은 또 입말에까지 배어들기조차 한단 말인가. 이놈저놈이 하도 많이 써대니 그렇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말은 왜 먹물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데 어떤 말은 그렇게도 많이 쓰이게 되는가.**
* 그는 <납득하다>를 <이해하다>, <알아듣다>, <곧이듣다> 등으로 고치라고 한다. 물론 뒤 세 낱말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는 맥락에 따라서 결정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뒤의 세 낱말이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면 <납득하다> 또한 그렇지는 않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감각의 문제가 아닌가. 게다가 <납득하다>가 <이해하다>보다 '어렵다'는 객관적 근거를 굳이 찾자면 우습게도 <納得>이 <理解>보다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한자에서 놓여나자'는 이 주장의 핵심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 게다가 말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주입한다고 해서 널리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한 때 방송에서 그렇게도 목터져라 <문지기>, <모서리차기>를 떠들었지만 <골키퍼>와 <코너킥>을 대체하지 못했다. 먹물들이 탁상머리에서 만들어낸 억지 조어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대답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 그야말로 '억지 조어'라면 배어들 리가 없는 것이다.


어휘가 대상에 대한 개념의 표현이며, 어휘 의미의 변화는 곧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어휘가 사회적으로 의미가 공유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건 추상적이건, 쉽건 어렵건 그러한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이고 단순한 어휘만 참된 개념이고 추상적이고 복잡한 어휘는 헛된 관념일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본질적으로 생산 대중의 활동에 의해서밖에는 생겨날 수 없는 인식의 진보는 늘 새로운 낱말 또는 이미 있는 낱말의 의미변화가 사회적으로 공유됨으로써 생산 대중에게 되돌려져야 한다. 동시에 그것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하는 활동을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사회에서라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임무이기도 하다.

먹물에게 말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 책임을 방기하라는 뜻이며, 심지어 기존 개념의 변화(인식의 진보)를 시도하지 말고 낡은 세계관을 고수하라는 엄청난 주장이 된다.* 먹물들이 담지한 지식은 민중의 것이 아니므로 가치가 없다는 논리는 얼핏 가장 민중의 편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소수에 의해 독점된 지식이 본질적으로 민중의 것임을 부인하고 민중의 소외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인식의 진보, 역사의 진보를 불신하고 낡은 가치와 질서를 옹호한다.
* 추상적, 분석적인 낱말이 구체적, 포괄적 낱말에 대하여 현학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또한 공식적 표현이 사적 표현에 대하여 권위적인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동일시하는 등식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현학이나 권위주의는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쉬운 말'을 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쉬운 말'로도 얼마든지 잘난 척하고 짓누를 수도 있다. 물론 이오덕은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말고 삶을 바꿔야 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관계를 다름아닌 '말'이 매개하고 있다는 전제부터가 '현학'이나 '권위주의'의 실체를 은폐하는 것은 아닌가.


문장론으로 들어가 보면 이러한 반동적 역사관이 더욱 잘 드러난다. 물론 어휘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장론 또한 많은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김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일본책들을 마구잡이로 베껴먹는 통에 도무지 뜻이 통하지 않는 낱말의 나열이 문장으로 둔갑하는 현실에 대한 통렬한 지적은 지당하다. 그러나 어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뜻이 통할 뿐 아니라 더욱 정교한 말맛을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까지도 단지 '전에는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투로 몰아세우고 있다. (누구나 대화를 녹음해서 들어보면 알겠지만 '입말'에서는 완결된 문장을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글말'이 잘 조직된 문장을 지향하는 것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거리 때문에 생겨나는 지극히 당연한 언어활동으로서 오히려 뜻을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배려이다. 따라서 문장론에서는 더이상 '입말'에 가까운가는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실 해방 이후 교육 세대에게 우리 옛말을 전공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면, 어떤 표현이 예전에 우리말에서 쓰이고 있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전공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서양말투이건 일본말투이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표현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에서 가지는 의미작용일 것이다. 이를테면 <-로의>와 같은 이중조사는 일본말투이니 쓰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성실하게 다듬어 "얼마나 시원스럽게 읽히는가"라고 제시한 문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시원하게 읽히기는커녕 원래 표현이 가지고 있던 정교한 말맛을 무시해버려 허전해지기 때문이다.*
* 같은 보기로 <-적>, <-화>, <-성> 등의 어미를 아예 쓰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그같은 어미를 모조리 떼어내고 고쳐쓴 문장들은 본래 문장의 분석적인 말맛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직화하다>는 <조직하다>와는 뜻이 다르며 굳이 말하자면 <조직해가는 일을 하다>일텐데, 이렇게 뜻을 분명히 하자면 오히려 <조직화하다>가 훨씬 '시원스럽게' 읽힌다.

그는 그만큼 왜말, 양말에 깊숙이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어떤 표현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필요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표현의 풍부함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엉뚱하게 중독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낱말이 대상에 대한 개념을 나타낸다면, 문법은 개념과 개념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대상에 대한 인식이 복잡해질수록 관계에 대한 인식은 정교해진다. 이를테면 조사를 두세개씩 겹쳐쓰는 것은 무작정 왜풍을 따른 결과가 아니라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정교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활동의 발로이다.*
* 일본말에서 <-의>에 해당하는 <の>가 자주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인 흉내를 낼 때 <-노>를 자꾸 붙인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예전보다 <-의>가 자주 쓰이는 것은 일본말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전에는 좀체로 명사로 쓰이지 않던 낱말을 명사화하여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를 수식하는 낱말과의 관계도 '우리 문법에 따라' 바뀐 것이다. 그는 왜 본디 명사가 아닌 말을 굳이 명사로 쓰려 하느냐고 한번 더 반문하겠지만, 이 또한 어미 활용을 하지 않는 명사일 때 음상과 의미의 결합이 공고해지는 '우리 문법'의 작용이다.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 말에서 쓰는 말까지도 단지 '일본에서도 그렇게 쓴다'는 이유로 회피해야 하는가. 우리말 가려쓰자고 한자도 모자라 일본말까지 배워야 한다는 것인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쉽다=단순하다'의 어처구니없는 등식이 개입하고 있다. 세상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마도 그는 정말로 '답답한 문장'과 '시원한 문장' 사이에 존재하는 뜻의 차이를 모를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것을 굳이 복잡하게 표현하여 답답하게 한다고 불평할 수밖에.) 그러나 지금은 자급자족적인 농경사회가 아니다. 물론 하필 우리말의 표현이 정교해지기 위해 왜말이나 양말이 스며들어야 하느냐는 항변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그것을 몽땅 쓸어버리자면 역사를 구한말로 되돌려놓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식의 억지밖에 남는 것이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근대적 인식은 자본주의가 그러했듯이 안에서 자라나기보다는 밖에서 강제로 이식되었다. 그것은 현실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역사나 또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정치, 군사, 문화적 압력이 정당한 일인가를 묻는 것과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아니 때로는 외래적 요소에 대한 맹목적 백안시가 오히려 더욱 치열해야 할 역사적 현실을 향한 직시를 방해하기도 하고, 어설픈 자기위안으로 대체함으로써 문제의식 자체를 희석시키기도 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더 풍부한 보기를 들어보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오덕의 작문지침의 대부분이 그 자신의 원칙을 배반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성실한 노력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왜곡된 언어관과 시대착오적 역사관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 이래로 수십년을 우리 글 다듬기에 바쳐온 그에게는 다소 억울한 일이겠지만, 왜 이 작문지침이 '지금 여기'에서 새삼 각광을 받고 있는가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실현가능성도 그다지 보이지 않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전혀 의미있는 힘을 가지지 않은 공허한 작문지침에 굳이 고역스러운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뻔히 들여다 보이는 자가당착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지침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딱한 '사회 분위기'(?)를 향한 것이다.


이오덕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구체적 표현이 '우리 말'인가 아닌가이다. 이러한 사고틀을 무비판적으로 좇아갈 때의 폐해는 사못 심각하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복고주의적 태도이다. 그의 '우리 말'은 무척이나 편협하며 퇴영적일 뿐 아니라 '민족의 순수성'이라는 허깨비를 씌워 자본주의화 이전의 농촌사회를 신비적으로 미화한다. 그에게는 기형적 고도성장으로 피페한 농촌의 현실만 안타깝고, 6백만 농민만 '순수한(?) 민중'이다. 일제나 미제 기계를 돌리면서 일본인이나 미국인으로부터 기술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부정되고, 1천만 노동자는 외래 기계 문명에 '물든' 불순하고(?) 가엾은 식민지의 사생아들이다. 그가 주장하는 '우리 말'만을 '우리 말'이라고 믿는 광신자들에게는 노동자란 (그 언어를 교정함으로써) '순화'해야 할 대상일 뿐, 역사 발전의 주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문제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말'이건 그 무엇이건 언어 기호는 의사소통의 매개일 뿐이다. 그것은 '헛된 관념'이 아닌 '참된 삶'을 언어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이오덕 자신도 이미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또한 '말'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은 '말 너머에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말'인가 아닌가를 시시콜콜히 따지는 동안 그 성실한 분석의 방대함에 넋이 나간 시선들은 역설적이게도 '말'에만 머물 뿐 '말 너머의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철저하게 봉쇄당한다. 심지어 <경제적 사회구성체>와 같은 말도 '현학적인 먹물이 어거지로 만들어낸 쓸데없이 어려운 말'이라면 도대체 어떤 개념의 잣대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인가. (그는 "나는 무식하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식의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못 배운 사람이 무식하다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김을 받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이다. 그러나 무식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가 '말'보다 말을 만들어 내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말'만을 끊임없이 트집잡는 작문지침에만 골몰하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자기 모순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물며 '참된 삶'은 그만두고라도 그토록 공들여 온 '말'에 대해서조차도 과학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환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즉 전혀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가상의 '우리 말'을 전제하면서 이에 합치하지 않는 말은 무조건 배제하고 그렇게 남겨진 것만을 '우리 말'이라는 전제로 되돌려 놓는데,* '우리 말'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 조사 <-보다>만 우리말이고 부사 <보다>는 일본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미 폭넓게 자리잡은 그 쓰임을 나무란다. 나아가 이를 반영한 남북한의 사전까지 싸잡아 왜풍을 따른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현재 쓰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면, 말의 변화에 보수적인 우리말 사전에까지 버젓이 올라간 표현이 우리말이 아니라면, 그의 우리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진정 그에게 '교육자적 양심'이 있다면, 이러한 자기 모순과 순환 논리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야말로 '헛된 말장난'으로 그나마 '올바른 언어생활'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일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작문지침에 얽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보다 훨씬 뒤늦게 '삶'과 '말'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그와는 견주기조차도 민망할 만큼 어린 후학들이 늘 마음에 담아 두고 스스로를 경계하는 경구를 헌사한다. "말만 보면 말도 못본다!"
발표지면 오늘예감 2호, 199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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