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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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잔치'는 끝났는가
작성자
똥개
길을 찾는 친구에게 --
가을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차다. 요즘들어 부쩍 가슴이 시려오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는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되돌아보기만 해도 뜨거움이 느껴지는 -- 아니, 되돌아보면 막상 철없는 치기나 어리석은 방황,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던 삶의 무게들은 차라리 어렴풋하고 오로지 뜨거웠다는 기억만이 선연하게 살아오는 -- 한 시절이 어느샌가 가버리고야 말았다는 상실감에 더욱 오싹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민들레처럼>이 튀어나오고 어릿광대 잔치에 지나지 않았던 대학가요제에서 <선언>이 불리워지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 어리둥절한 채로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어설픈 감회에 사로잡혀 보다가도 한편으로 숨길 수 없는 '좋아진(?) 세상'에 대한 배신감을 발견하는 것은 그런 상실감 때문이겠지. 얼마전 어느 술자리에서는 "차라리 80년대가 좋았다"는 푸념도 들었다. 오죽 상실감이 컸으면 그 따위 망발을 입에 담았을까마는 우리가 잃어버림을 못내 안타까와 하는 것은 시린 겨울을 이겨내던 우리들 안의 뜨거움이지 그 겨울의 추위는 아닐텐데 싶은 마음에 버럭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소위 문민을 자처하는 이 시절이 지난 추위를 녹인 따뜻한 봄이라면, 그토록 어렵게 만들어낸 좋은 세상 마음껏 누리면 그뿐이지 무엇때문에 이토록 불안해 하고, 상실감에 가슴을 떨고, 뜨거움의 기억을 잊지 못해 심지어 그 참혹한 추위까지도 그리워하게 되는 걸까. 그래, 짐작하겠지만 세상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고 그런 만큼은 우리에게 여전히 뜨거운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들 뿐이라고 --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니 정말로 시작한 적도 없었다고 -- 눈을 부릅뜬대도 사실 그다지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들이 세상 밖에 놓여 있었지? 우리들이 달라졌다면 세상은 달라진 게 아닌가? 하물며 우리 스스로 뜨거움이 더이상 필요없다고 집어던진 적이 없는데,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이겨낼 최소한의 저항수단(?)마저 슬그머니 못쓰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달라진 모습이 정녕 아니란 걸까. 세상은 분명 엄청나게 달라지긴 한 게야. -- '잔치'는 끝나고야 말았어! -- 그렇지 않다면 가슴시린 상실감은 허황한 피해망상일 뿐이겠지.
조금은 겸허해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한 때는 단지 뜨겁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옳을 수 있었고, 어쩌면 거꾸로 단지 옳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쉽게 뜨거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들 설익은 혀로 자신만만하게 떠벌였듯 옳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만 의미가 있고, 더욱이 뜨거움만으로는 더이상 옳음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로 세상이 몰라보게 좋아져서 뜨거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듯 옳음이 곧바로 뜨거움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상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 좋을지도 모른다. 이미 잃어버린 기억 속의 뜨거움만을 안타깝게 아쉬워할 수만은 없다. 시린 가슴으로라도 비로소 무엇이 진정 옳은가를 차분하게 되물어야 할 때가 아닐지. -- '잔치'는 이제야말로 시작이다?! -- 우리들 안에 더이상 뜨거움이 없다면 다른 새로운 대책을 벼려내야만 이미 닥쳐오고 있는 더욱 참혹한 겨울을 얼어죽지 않고 이겨낼 수 있을 게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에, 아니 우리들 자신에게까지도 겸허해지다가는 끝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무엇이 옳은지 진정 모르겠다고 비관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아직도 어설픈 뜨거움(아니 사실은 뜨거움의 기억)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성싶다. 정작 문제는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알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일테고 -- '잔치'가 끝났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냐'고 꼿꼿하게 돌아앉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다! -- 우리가 여전히 옳다는 자만 역시도 더이상 알기를 포기하기로 따지자면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문득 2-3년전 어느 잡지에 실린 글(한 때 우리들에게 전설이었던 선배의 옥중서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서 보았던 말이 떠오른다. '이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 -- 한편에서는 이성의 비관을 넘어서 의지의 비관으로까지 몰고가고 다른 한편에선 의지의 낙관이 지나쳐 이성의 낙관을 지탱하는 모습들을 볼 때 새삼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어쩌면 의지가 비관하게 되는 것도 이성의 어처구니없는 낙관에 이끌리고 부추겨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 '잔치'가 끝났을 때 새로운 '잔치'를 겸허하게 준비하지 않고,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하는 건 '잔치는 끝나지 않으리라'던 암시에 대한 조롱이 아닌가 -- 그 글을 쓴 선배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의지의 낙관이 필요할수록 이성은 더욱 비관하고, 동시에 이성이 비관할수록 의지는 새삼 낙관해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읽혀진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밤이 부쩍 늘고 있다. 어렸을 때는 내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묻느라 잠을 설치곤 했다. 철이 들 무렵엔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었다. 그러다 이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자문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할 수 있는 일마저도 정작 남아 있지 않다는 절실함에 자주 시달린다. 우리들이 착잡한 상실감으로 되돌아보는 지난 시절의 뜨거움의 정체란 기실 '자기'를 잊는, 때로 버리기까지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 때는 그것이 당연했다. '혁명'은 눈앞에 보였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이미 '자기'만의 내일을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참담한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나'의 내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내일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야할 일이 무거웠던 만큼이나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오늘은 왔는데, 여기엔 '우리'가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 어제의 내가 기약하지 않았던, 기약할 수 없었던, 잊었던, 때로 버렸던 그래서 더욱 초라해져 버린 모습들만 던져져 있을 뿐이다. 더이상 짱돌 몇 개, 글 몇 줄, 노래 몇 곡조 따위로는 아무것도 -- 심지어 밥벌이조차도! -- 할 수 없는데, 우리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 어쩌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 것이라곤 그런 것들밖에는 없다. 우리들의 상실감이 더욱 뼈저린 것은 그 때문일 게다. 설령 정말로 세상이 좋아졌다 하더라도, 이렇게 좋아진 시절에 -- 하물며 그토록 살벌했던 세상에서도 얼마나 할 일이 많았는데! -- 정작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들처럼 미처 이 날을 예비하지 못했던 것이 어리석었다고 참회록을 쓰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래서도 안된다. 누가 억지로 시켰던 것이 -- 흔한 말로 역사의 부름을 받고,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도 --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일 뿐이지. 이 모든 결과를 알고 다시 산다 해도 같은 상황에서라면 똑같이 살 수밖에 없으리라는 심경을 차라리 고백하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더라는 쓰린 현실을 겸허하게 인정(이성의 비관)하는 한편으로 그래도 일그러지고 초라한 채로라도 무언가 할 일을 찾아보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지의 낙관)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게다.
우습지만 거창하게 역사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던 몇몇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처연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거나 심지어 속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도 하겠지만, 소박하긴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후회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지 않을까. 옳음을 좇아 뜨거움에 몸을 맡겼건, 혹은 뜨거움에 취해 옳음을 갈구했건, 그 양상이야 어쨌건 말이지.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일테고. 어쩌면 -- 지금 새로 시작할 '잔치'가 오늘 끝나버린 어제의 '잔치'보다 내일 더 야릇한 여운으로 끝날지도 모르는데 -- 우스운 꼴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겠지.
벌써 새벽이 다됐구나. 해뜨는 시각이 조금씩 늦어지고는 있지만 두어 시간 뒤면 동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깜깜하기만 할 뿐 재깍이는 시계바늘 말고는 어디에서도 그 징조를 읽어낼 수 없다. 시계가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새벽이 오고 있음을 알았을까. 자질구레한 겨울준비는 제대로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렴. 또 편지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