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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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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읽기’는 ‘나 읽기’이다
작성자 똥개

TV는 마보상자인가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가장 피부로 와닿는 구체적인 증거로 곧잘 거론되는 것이, 가족간의 대화가 단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영상매체가 활자매체와 달리 수동적이어서 깊이 있는 사고의 여지를 빼앗고 말초적인 감각만을 자극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하기도 하며, 가능한 한 가까이 하지 않거나 최소한 의식적인 통제 아래 시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일면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텔레비전의 모든 측면을 다 설명해주는 진실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한번쯤은 특정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의 대화에서 소외되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텔레비전이 대화를 단절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의 매개로서 화제를 형성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사실 대화가 원활한 집단에서는 오히려 텔레비전 시청으로 인해 이야기거리가 풍성해진다. 다시 말해 대화 단절의 원인이 텔레비전 때문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가 원활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깊이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각자가 화면에만 몰입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상매체가 활자매체에 비해 수용태도에 있어 능동적인 ‘읽기’보다는 수동적인 ‘보아넘기기’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의심할 나위 없이 타당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험일 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거꾸로 활자매체 역시, 거의 모든 문자의 발생 과정 자체가 종교적 맥락에 깊이 맞닿아 있듯이 그리고 또한 활자매체 고유의 고정성으로 말미암아, 맹목적인 추종과 맹신의 대상(소위 ‘도그마’)이 될 위험이 크다. 그렇다면 영상매체의 가벼움은 오히려 활자매체의 이러한 위험성을 완화시키지는 않을까. 객관적이고 고정적인 ‘문장’이 아닌 주관적이고 유동적인 ‘이미지’를 담지한 영상매체에 의존하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보다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기호(嗜好)가 우선하게 되는 것도 어느 만큼은 사실이겠지만, 지식과 정보 혹은 정서적 공감이 개인의 인식과 실천에 현상함에 있어 양자 사이에 우열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 마디로 말해 치밀한 사변보다는 직관적인 통찰이 때로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론적인 반론을 떠나서라도, 우리는 이미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강력한 영향권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것은 한 개인의 텔레비전에 대한 태도나 시청 시간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대통령 후보들이 텔레비전 토론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래도 텔레비전이 그저 ‘바보상자’일 뿐이며, 안 보면 그만일까. 텔레비전에 대한 편견은 수정되어야 한다. 텔레비전의 화면에 대해 무방비상태라면 분명 텔레비전은 ‘바보상자’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들만 텔레비전을 무기로 활용하라는 법이 있겠는가. 오히려 텔레비전을 무작정 경계하는 것이 무방비상태를 방치하고 조장하는 결과를 빚는 것은 아닌가.

왜 TV를 보는가

이제 텔레비전에 대한 편견어린 선입관은 접어 두자. 텔레비전은 우리 생활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또한 텔레비전 읽기에 대한 모든 당위적인 접근도 일단 집어치우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에까지 시시콜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우리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이유는,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시청보다 더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들은 언제라도 텔레비전 시청을 포기할 수 있다. 뉴스는 어차피 다음날 아침신문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교양 프로그램들은 굳이 텔레비전으로 보지 않더라도 꼭 필요하다면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연속극쯤은 하루쯤 빠뜨린다고 해서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으며, 하물며 오로지 즐거움에만 초점을 맞춘 쇼 프로그램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사람마다 즐거움의 종류는 다를 수 있다. 교양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알기 쉽게 접하는 것이 즐거울 것이고,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은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이야기 자체가 즐거울 것이다. 쇼 프로그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긴장을 풀어주는 오락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들이 더이상 즐겁지 않다면, 누가 시키거나 전문가들이 미주알고주알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텔레비전을 꺼버린다. 텔레비전은 결코 수동적인 메체가 아니며 우리는 이미 능동적인 시청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그러한 시청 태도는 고스란히 시청률에 반영된다. 따라서 광고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방송사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우리들의 시선을 잡아두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흔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비판한다면서 “시청률만을 의식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은 과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자. 방송사가 시청률을 의식하는 것은, 시청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태도일지언정 전혀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파악하여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한다는데, 도대체 왜 우리가 분개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즐거움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며, 즐겁다는 것이 꼭 저열하고 말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자기비하에 다름아니다. “지나치게 재미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라면, 그것은 우리들이 “지나치게 추구해서”는 곤란한 종류의 재미에만 즐거워하고 있다는 고백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들이 즐거워하는 화면이 충분히 즐거워할 만한 가치가 있고, 또 아무리 즐거워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오히려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더욱 좋은 그런 재미를 주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대한 그만한 자신감과 자긍심이 있다면, 우리는 텔레비전이 주는 재미를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시비할 이유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TV읽기인가

물론 이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동적인 시청자일 수밖에 없으며, 가슴아프게도 고급 지식이나 최신 정보 또는 인문적인 교양보다는 저급한 말초적 쾌락에 훨씬 더 탐닉하기 쉬운 약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라면 사실 텔레비전을 향한 비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를 바보로 아느냐”는 비판을 하는 것은 사실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혹시나 비판하는 ‘나’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바보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비판을 통해 텔레비전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더욱 위험한 생각일 뿐이다. 자신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잘난 척을 하기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을 바보로 폄하해버린 꼴이기 때문이다. 즉 시청자가 수동적이며, 나아가 부정적인 대중관을 전제한 상태에서의 TV비판이란 투정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고 심지어는 잘난 척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텔레비전을 읽어야 하는가. 왜 비판적인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결코 바보가 아닌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이며, 또는 우리들 자신이 더이상 바보가 아니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마나한 말잔치에 더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고급 양질의 정보를 담아 보도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 수밖에 없으며, 우리들이 그럴듯하기는커녕 앞뒤도 안 맞는 엉성한 줄거리에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작품성이 있는 드라마를 만들 수밖에 없고, 우리들이 억지웃음이나 강요하거나 내용없이 현란하기만 한 화면에는 더이상 눈길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재미가 우러나는 쇼 오락 프로그램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텔레비전 읽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텔레비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다시 말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한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자존심 상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이며, 우리들이 변화한다면 우리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재미가 좀더 건강해진다면, 우리들의 눈길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방송 프로그램의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방송이 권력의 시녀라고 손쉽게 말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들이 재미있게 보아주기만 한다면 심지어 ‘혁명의 이념’조차도 외눈 하나 깜빡 않고 팔 수 있다. 이념이 혁명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눈속임에 분노하기 전에 우리가 그런 눈속임에 더이상 속아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시청률’을 희생하면서까지 속이 뻔히 보이는 눈속임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TV를 비판적으로 읽으려면

그러므로 텔레비전을 보는 자세는 철저하게 보여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어떤 프로그램을 놓고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으로 그만이라면, 다시 강조하지만 투정이 아니면 잘난 척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갖춰야 할 덕목은 솔직함이다. 직업적으로 평론을 쓰는 평론가가 아닌 다음에야 정말 전혀 재미도 없고 짜증스럽기만 한 프로그램이라면,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까지 그 프로그램을 지켜보았을 리가 없다. 아무리 잘못 만들어진 프로그램일지라도 내가 그 프로그램을 보았다면, 채널을 돌리거나 아예 꺼버리지 않고 지켜보게 한 요인이 분명히 있다. 텔레비전은 그런 매체이다. 실컷 재미있다고 손뼉을 치며 웃고 나서 목에 힘주고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저질 오락이라고 목청을 돋워봐야,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에 손에 땀을 쥐고 몰입하고 나서 짐짓 점잖은 표정으로 소재가 부적절하니 화면이 자극적이니 떠들어대 봐야, “나는 바보다!”라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자신이 무엇에 재미있어 했는지에 대해 스스로 솔직해지는 데서부터 텔레비전 읽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텔레비전 읽기란 자신이 느낀 재미가 과연 건강한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두번째로 요구되는 덕목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자기긍정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 앞에서조차도 결코 바닥까지 솔직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애절한 불륜 관계의 사랑이 나에게 공감을 주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늘씬한 연기자의 외모에 반해서였다면, 당당하게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속마음에 대해서 혼자서만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꽁꽁 감추어두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겉으로만 아무리 비판적인 시각을 역설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제작자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바로 그 속마음을 알아내어 거기에 프로그램의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만큼씩 비판받기를 두려워한다. 자기긍정보다는 자기비하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긍정이 있으면 어떠한 비판에도 겸허하게 열린 태도로 임하지만, 자기비하에 익숙해지면 별 것 아닌 사실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텔레비전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프로그램 제작자에 앞서 시청자인 우리 자신을 비판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비판할,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나마 비판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텔레비전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굳이 거리를 두고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솔직하게 빠져들 때는 빠져들어가면서 충분히 즐겨도 상관없다. 그 자체가 ‘비판의식이라고는 없는’ 잘못된 시청 태도는 아니다. 다만 보고 나서 ‘비판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나는 왜 즐거웠으며, 또는 어떤 점이 즐겁지 않았는지.

발표지면 미상, 1997.
단행본수록 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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