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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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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을 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한 고언
작성자 똥개
1. 왜 문화비평인가

이상한 공식을 딱 하나 만들어 내서 그 공식만 가르치는 학원을 내는 거야. 그건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공식인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어려운 공식인 거야. 물론 써먹는 데는 한 군데 있긴 있어. 한 문제 푸는 데 약 두 달 걸리는 암호와 역사 연대표, 아프리카 인디언들의 이상한 풍습 등등 안 나오는 게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몰라도 되는, 알면 골치만 아픈 이상한 공식인 거야. 그 공식은 학원에서 마음대로 바꾸는 거야. 일월에는 이것이 정답이고 이월에는 저것이 정답이고, 장이 나쁜 사람은 정답이 또 틀려. 시력이 나쁜 사람, 충치가 있는 사람, 사람에 따라 날씨에 따라 정답이 달라. 하여튼 그런 공식을 가르치는 학원을 만드는 거야. 어디다 써먹냐구? 그 공식 시험을 봐서 합격하는 사람은 우리 학원 강사가 되는 거야. 그러면 그 강사는 또 그 쓸데없는 공식을 가르치는 거야. 그 학원 출신은 그 공식만 잘 풀면 취직은 1백%되는 거야. 그리고 월급을 많이 주는 거야. 그래야 학원생들이 많이 모일 거 아냐. 학원생들이 많이 모이면 자연히 돈이 많이 생길 것이고, 학원선생님한테는 될 수 있는 대로 월급을 많이 주는 거야. 다른 곳에선 써먹을 수 없지만 자기 학원에서만 써먹는 공식, 그런 공식을 가르치는 학원 어때? (전유성,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중 '진짜 장사 될 만한 아이디어 몇 가지'에서)

이것은 결코 익살꾼의 실없는 재담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얼마전부터 이런 학원(?)을 주위 곳곳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학원은 이른바 '문화판'이라고 일컬어지는 담론 장이고, 이른바 '문화비평'이라고 하는 물건들이 바로 이상한 공식이다. 이 학원은 요 몇년 사이에 때아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화'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문화라는 것이 별 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일 터이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 관해 알고 싶어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일텐데도 이 때아닌 문화담론 범람에 새삼 쓴웃음부터 짓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쩌면 다름아니라 바로 문화란 별 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삼스럽게 뭘 가르치고 배워서 알고 말고 할 게 없는 것을 기를 쓰고 배우겠다고 드는데다가 배짱좋게 가르쳐주겠다고 나서기까지 하니 이처럼 희한한 일이 또 있을까.

명색 '문화평론가'라는 간판에다가 또 문화비평저널의 객원편집위원이라는 딱지까지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다 보니, 종종 문화비평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의 길잡이를 주문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물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어찌된 연유이든 자기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 사람에게 길잡이를 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황당해 지곤 한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도대체 '문화비평'이라는 것을 하는 데 무슨 과정이 필요하고, 특별한 공부가 필요하며, 친절한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우선 나 자신부터가 문화비평을 위해 무엇인가를 따로 준비한 일이 전혀 없는데도 어느샌가 문화평론가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평론가가 되는 데 소설가나 시인처럼 '등단' 절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문화평론'이라고 부를 만한 글을 쓰는 외에 달리 하는 일이 없는 자들이 자신을 사회 안에서 범주화하기 위해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문화평론가'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평론가도, 방송평론가도, 대중음악평론가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단순히 수없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문화평론가가 무슨 벼슬이나 자격증도 아닌 다음에야 '문화평론'이라는 것을 쓰고 스스로 문화평론가라 칭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문화평론'이라고 하는 글이 또 그렇다. 어제 애인과 보았던 영화 한 편에 대해 구구절절 소감을 늘어놓거나 지난 주말에 TV로 보았던 쇼 프로그램을 놓고 심심풀이 삼아서라도 이러쿵저러쿵 안주거리를 삼는 것이 꼭 '글쟁이'들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문맹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든지 그 일상적인 입담들을 글로 옮겨 놓지 못할 이유가 없고, 그저 그렇게 일상적인 문화적 체험들을 자기 나름의 해석을 담아 표현한 글이라면 언필칭 '문화비평'일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문화평론가를 자칭할 사람 손들어 달라고 하고 헤아려 낼 수도 없는 일이니 문화평론가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문화비평을 하고 싶다면, 그저 당장 문화비평을 하면 된다. 문화가 별게 아닌 만큼 문화비평도 별 게 아니다. 요즘의 젊은 층이 애인과 데이트하면서 나누는 얘기들의 대부분이 아마도 문화비평일 것이다. 또는 조금은 진지한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격론을 벌이거나 의기가 투합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문화비평일 것이다. 하다못해 일상생활(바로 그것은 문화적 체험이다)에서 시시때때로 희노애락의 감정이 생겨나고 적어도 왜 그런 느낌을 가지는지를 스스로 생각해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문화비평이다.

그런데도 문화비평을 해 보겠다는 사람이 아주 없다면 모르겠는데, 웬 문화비평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데 정작 문화비평을 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많아보이지 않는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이쯤 되면 독설밖에 되돌려 줄 것이 없다. 마치 이상한 공식만 가르치는 학원에 강사가 되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들락이듯이 죽을 때까지 해 보지는 못하고 줄곧 하고 싶어만 하다가 말지어다. 그렇다, 바보가 아니라면 남의 학원을 기웃거릴 필요가 전혀 없다. 스스로 이상한 공식을 만들어서 자기 학원을 내면 된다. 여기에 무슨 길잡이가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한가. 그래도 미심쩍다면 몇 가지 근본 전제들만을 환기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2. 비평을 위한 전제

1) 비평은 세계관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가져야만 살 수 있다. 사람마다 관계의 방식은 다르지만 그것들을 통틀어 '인식'이라고 일단 이름붙여 두자. 인식은 주체가 대상을 이해함으로써 성립한다. 같은 대상이라도 사람에 따라 그 이해가 다르며, 그것은 사람마다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두고 흔히 '세계관'이라고 한다. 비평이란 다름아니라 일정한 대상에 대한 특정한 주체, 곧 자신의 이해과정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 보여주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의 표현이 곧 비평이다.

나는 자신과 세계를 어떤 형식으로 관계지우는가,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디인가. 더구나 문화라는 대상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 내 눈에 보이는 지금의 세상은 어떤 곳이며, 나는 궁극적으로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비평은 이 질문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답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경험적으로 축적되는 세계와의 관계들에서 마련될 수밖에 없다. 세계관을 위해 필요한 것은 부단한 경험이다. 자신만의 경험이 축적되면 자신만의 세계관이 된다.

물론 같은 시대에 비슷한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은 어느만큼까지는 닮아 있을 것이다. 다만 비슷하게 닮아있다고는 해도 꼭같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착각하는 바이긴 하지만 비평이 꼭 독특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이라는 행위가 소통을 통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만큼은 독특하면서도 또 어느만큼은 또한 보편적이어야 하며, 비평은 이 아슬아슬한 긴장 위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세계관에는 일관성이라는 덕목이 요구된다. 그러나 얼마나 일관되는가 하는 정도의 편차가 있을지라도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세계관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자신이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라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그 이외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요컨대 세계관의 일관성은 '좋은 비평'의 조건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비평'의 조건은 아니다. 세계관의 일관성이 결여된 비평은 보편성과 개성 사이의 긴장이 깨지면서 초래되는 혼란으로 인해 의미의 정확한 파악이 어려워질 뿐이다.

2) 감수성의 비밀은 용기이다

세계관이 체험들의 축적이라면, 세계관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체험의 밀도와 축적의 심도가 필요하다. 이러저러한 경험들의 모자이크가 세계관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과 세계를 얼마나 긴밀하게 관계지우는가에 따라 체험의 질이 좌우될 것이다. 나는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 얼마나 투명하게 대상을 응시할 수 있는가. 대상에 대해 끝까지 투명할 수 없다면 제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해도 그것들은 이미 아무 것도 아니다. 이같은 체험의 밀도를 흔히 '감수성'이라고 한다.

나는 감수성을 개인의 성격적 요인으로 환원하려는 통속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얼마나 민감하게 대상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그 대상과 자신을 밀착시키고 있는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밀착된 대상에 대해서는 민감해지게 마련이다. 감수성이란 기실 대상에 밀착된 '관심'에 다름 아니다. 관심이란 어차피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이데올로 기적이든 혹은 그보다 더 일상적이든 주체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관심의 확장은 이해관계의 범위가 확장되는 과정이나 혹은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뛰어넘는 과정에서만 일어나게 되는데, 어느 쪽이든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겨버릴 수도 있는 대상을 향해 새삼스럽게 관계를 맺고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는 자신과 세계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즉 대상 앞에서 '투명'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흔히 이것은 대상에 대한 지식의 문제로 오해된다. 잘 모르기 때문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이러한 오해를 부추기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게 되는 것뿐이다. 무지는 '투명하지 못한 시선'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진정한 원인은 무지가 아니라 '타성'이다. 더 말할 나위도 없이 타성을 깨뜨리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용기(!)이다. 타성을 용납하지 않는 용기만이 대상을 향한 투명한 감수성의 유일한 조건이며, 투명한 감수성은 용기있는 자만이 가지는 미덕이다.

3) 상상력은 비약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기준(세계관)으로 자신과 밀착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밀도있는 체험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이 체험의 의미들이 세계관 안에서 다시 조직되고 축적되지 않으면 그 많은 체험들은 낱낱으로 흩어질 뿐 일관성의 확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체험들을 일관되게 조직함으로써 축적되게 하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이다. 일상생활 자체가 문화적 체험인데 여기에서 아무런 희노애락의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면 감수성이 모자란 탓이지만 충분하게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기 나름의 언어로 해석해내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상상력의 결핍이다.

타당한 근거들을 유효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다면 비평은 풍부해진다. 그런데 비평을 위한 근거들은 이미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비평자의 인식 안에 존재한다. 그것들을 어떤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인용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비평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감수성이 작용하는 것도 사실은 상상력을 통해 구성된 맥락 위에서이기 때문에 상상력은 다시 감수성을 자극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로 감수성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상상력이 작용할 범위 자체가 협소해지는 까닭에 감수성이 또한 상상력의 재로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즉 감수성과 상상력은 상호 자극하고 상호 기반을 제공하면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비평을 성립시키는 두 개의 핵심 축이다.

상상력은 체험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상상을 통해 조직되고 축적된 의미 맥락은 단순히 현실을 넘어선 백일몽이 아니라 오히려 '재구성된 현실'이다. 그리고 비약을 통하지 않고서는 현실은 주체 안에서 재구성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비약의 산물인 것이다. 비약은 주체의 욕망 과 내재적 자유를 그 요건으로 한다. 욕망하는 자만이 꿈꿀 수 있으며, 자유로운 자만이 현실에서 상상으로 비약할 수 있다. 자유로운 상 상력, 투명한 감수성에 치열한 체험들이 세계관으로서 작용할 때 비평이 존재한다.

3. 비평의 동인

나는 주변에서 두터운 세계관을 믿음직하게 견지하고 있으며, 투명한 감수성에 용기있게 열려 있을 뿐더러, 또한 동서고금의 다기한 현상들을 종횡무진 엮어가는 역동적인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을 아쉽지 않게 마주한다. 그들은 모두 잠재적인 비평가들이다. 물론 이들중 대다수는 '비평'이라고 불리우는 행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언제라도 적절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비평'을 서슴지 않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비평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움추리기만 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최근 들어 언론기관이나 사회단체, 또는 문화운동단체들에서 문화강좌들이 가히 폭발적인 성업을 누리고 있다. 이로 미우러 보건대 문화에 대한 관심, 나아가 비평을 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가 풍부한 취미 생활과 그보다는 실질적인 취업준비의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순한 취미생활에 10여만원의 수강료를 기꺼이 부담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문화강좌를 통해서 강의내용으로 시험이라도 봐서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다가 설령 그렇다고 한들 문화평론으로 밥벌이가 될 리도 없고 보면, 여기에는 무언가 심각한 사회적 오해가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차라리 비평가가 먹고 살 만한 직업이기라도 해서 그 자격이나 숫자가 제한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이상할 것은 없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무역회사도 아닌 일반 기업체의 취직 시험에 영어과목이 빠지지 않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는 해도 그러한 이유로 입사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외국어학원을 찾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또는 문화현상에 대한 비평이 아주 고상한 취미생활 또는 유한 계층의 여가활용이라고 해도 몇 십만원의 수강료가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비평'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체험하는 현실을 얼마나 투명하게 응시하고 자유롭게 재구성하는가만이 비평의 전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비평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른 과정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비평을 위한 '준비'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비평적 체험들 -- '실험'과 '도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을 향한 욕망들이 허다한 '준비'에만 매달려 소모되곤 하는 것은 아무래도 담론 장의 권력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전유성의 재담에 나오는 이상한 공식을 만들어내어 시험을 보도록 하는 학원처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려운 이론들을 짜깁기해서 나열한 것을 '문화비평'이라고 여기게 함으로써 감수성과 상상력에 기반한 체험들보다 이러저러한 이론의 습득에 근거한 지식이 문화비평의 관건인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나 아닌지.

물론 지식 또한 간접적인 체험인 까닭에 이론의 습득에 배진하는 태도는 칭찬할지언정 말리거나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그렇게까지 집착해야 할 일인가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사실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인문사회과학의 이론들이란 자연과학의 이론처럼 실험을 통해 참과 거짓으로 무우쪽 자르듯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며, 모든 이론은 본질적으로 가설이다. 따라서 '준비'로서의 이론 습득에 집착하는 한 영원히 '준비'에서만 맴돌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더 알아야 할 아직 모르는 것들이 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을 끌어 설명해 보려는 시도는 물론 정당하다. 그러나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는 숨겨둔 채 이러저러한 이론의 나열로 독자를 압도하려는 얄팍한 잡문을 비평의 전범인 듯 동경하고 추종하려는 태도가 횡행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사회악이다.

비평은 다름아닌 주체의 자기정당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이론은 그 이론가의 치열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된 현실이며, 그러한 점에서 가설이다. 나에게도 내 나름대로 현실을 재구성할 상상력이 있다면 나 또한 나의 '이론'을 하나의 가설로 표현할 수 있다. 그 근거는 현실에 있고, 근거의 타당성은 나만의 그러나 보편적인 체험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나의 상상력이 현실에 근거하기 위해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다른 어느 누구의 이론적 논구와 주장이 아니라 나 자신의 투명한 감수성뿐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비약의 자유와 현실 앞에서의 용기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허다한 이론의 숲에 압도되어 주눅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즉 자기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이론에 정통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섭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기가 막힐 일이다. 도대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근거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그 근거를 찾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를 안심시키지도 못할 것이 무슨 '자기정당성'인가. 참으로 답답한 마음에 서두에 제시한 독설로 대답을 대신하곤 한다. 그렇게밖에는 도저히 자기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다면 죽을 때까지 '준비'만 하다가 말지어다. 현실 앞에 투명할 수 있는 용기와 마음껏 비약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가 이미 자기정당성인 것을! 비평의 동인은 다름아닌 자기정당성이다.

4. 비평을 위한 프로그램

일관된 세계관, 투명한 감수성, 자유로운 상상력은 가르치고 배워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전혀 아니다.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며, 용기이고,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비평'을 위해 탁월한 강의나 틀잡힌 이론 세미나, 혹은 도서관이나 절간같은 골방의 엄청난 장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이를테면 더 좋은 비평을 위한 다른 비평가와의 진지하지만 부담없는 대화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 내용이 제아무리 충일하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체혐, 용기, 욕망에 머물 뿐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프로그램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문화비평'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문화비 평을 흉내나 내면서 되지도 않는 잘난 척으로 폼을 잡고 싶어하는 것인지 그 욕망의 정체가 아리송하기만 하다.

물론 일관된 세계관이나 투명한 감수성, 자유로운 상상력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닌 이상 치열한 도야의 과정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용기없는 자, 자유롭지 못한 자, 그럴듯한 남의 말에는 끄덕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인식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 '비평'을 포기하라. 그대들은 호사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비평으로는 한 치도 못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비평'을 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의 '비평적 체험'들 앞에 우선 마주서 볼 일이다. 그것은 때로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뒤의 잡담일 수도 있고, 때로 문득 귓가에 머문 대중 가요에 자극받아 일기장에 토로해보는 넋두리일 수도 있다. 또 때로는 심각한 표정의 토론일 수도 있고 제법 틀을 갖추어 교수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일 수도 있다. 다름아닌 자신의 비평적 체험이야말로 '비평'의 원형이다.

다만 '문화비평'이라는 텍스트가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체라는 공간에서 사회적으로 소통되어야 한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읽힐 것을 전제하지 없는 비평은 마스터베이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되지도 않을 '준비'에 목을 매달고 있는 희한한 풍경은 '발표지면'을 염두에 두고 고심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지만 '문화비평가 지망생'을 위한 지면은 어디에도 없다. 스스로 확보한 자기정당성이 없이는 비평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일단 신중하지만 당당하게 첫걸음을 떼보는 것이다. 무한한 실험과 도전의 과정이 그 앞에 있을 것이다.

소통을 위한 발표지면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다. 우선 무수한 대학 매체들의 지면이 기성 비평가들의 권위보다는 더욱 다양한 잠재적 비평가들의 실험과 도전에 열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설령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해도 대학 매체의 본질적 기능이 또한 그러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욱 치열한 실험과 도전으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매체 편집자들을 압박해야 한다. 또한 나아가 굳이 매체 권력에 기반하는 편집자들의 선택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대중매체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문화비평'은 그 자체로는 직업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다. 비평을 향한 비평자의 욕망이며, 현실을 향한 발언일 뿐이다. 이미 PC 통신이라는 비정형적인 매체를 통해 실험과 도전으로 충일한 비평들이 소통되기 시작하고 있다. 더이상의 망설임은 현실을 투명하게 응시할 용기도 없고 자신의 현실을 비약적으로 재구성할 만큼 자유롭지도 못한 자의 핑계일 뿐이다. '비평'을 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일이다.
발표지면 고대문화,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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