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성과 한 여성이 사랑에 빠졌다. 관습상 축복받을 일이다. 빗나간 사랑 때문에 숱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지만 어느 누구도 사랑에 빠졌다는 그 사실 자체를 시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이 아닌 하필 그 사람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느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그런데 한 남성(오빠)과 한 여성(누이)이 사랑에 빠졌다. 흔하디 흔한 가족내 성폭행 이야기가 아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으로서 말 그대로 사랑에 빠졌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 사실만으로는 어느 누구의 공리적인 이해를 침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기껏 관용어린 시선을 받는다고 해봤자 “하고 많은 사람 놔두고 왜 하필”이라는 사실상 요령부득의 질문이 고작이다. 이제 거꾸로 묻자. 당신들은 왜 이렇듯 상반된 태도를 취하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관습상 결코 축복받을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은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상황을 조금만 틀어서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 물론 선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정한 형벌을 모두 받았다. 그런데 아무도 그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도둑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배가 고파진 그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도둑질을 하자 일자리를 거부했던 자들은 보란 듯이 외친다. “내 말이 맞았지?”라고! 교육받기를 원하는 한 아이에게 자기 이름을 써보도록 요구했다. 다른 아이들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도 그려내는데 그 아이만은 단지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없었던 탓에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이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은 거절되었다. 어차피 가르쳐줘도 모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두꺼운 책을 거침없이 읽어댈 때까지도 이 아이는 문맹이었다. 교육을 거부한 자는 더욱 자랑스럽게 확언한다. “역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니까!” 어떻든 처음 한번의 도둑질은 그의 잘못이었다고 하자. 남들 다 아는 것을 몰랐던 것도 그 아이의 책임이었다고 치자. 그런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진 것이 도대체 어쨌단 말인가. 정말로 마땅히 당해야 할 불행인가?
물론 모든 사회적 관습이 꼭 필연적인 이유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습에서 타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역시 별다른 이유없이 ‘고의로’ 무시해 치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관습을 거스를 수밖에 없는 이유보다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가 빈약할 경우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다른 사회적 강제의 힘을 빌지 않으면 이 관습은 사라지거나 적어도 변화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없는 공백을 대신해주는 사회적 강제가 작용한다면 그보다 타당한 이유를 가진 어떠한 개별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관습은 유지된다. 이 때의 사회적 강제란 바로 ‘도덕률’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도덕은 두 가지 기반 위에서만 작동한다. 즉 어떤 관습을 거슬러야 할 이유가 따라야 할 이유를 압도할 만큼의 위협이 발생하거나 또는 압도할 수도 있는 잠재적 위협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습이 존속되어야만 할 필요가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있을 때이다.
<벌거숭이 임금님>에서 사람들은 왕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사실’이라는 가장 강력한 타당성의 근거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옷에 대한 적극적인 찬미나 소극적인 침묵을 충분히 압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만이 ‘도덕’이 작동할 필요를 유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이면에는 사기꾼들의 이해관계와 왕의 권위라는 사회적 필요가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오빠와 누이동생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이 때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실제적인 근거인 반면에 그에 대한 사회적 금지에서는 그것을 압도할 만한 어떠한 타당한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근친상간의 금지는 아마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덕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왕은 누구이고 사기꾼은 누구이며 그들의 이해관계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한 사랑을 나름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인류애’라는 말이 웅변하듯이 칭찬받을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단 한 사람의 더구나 이성으로 제한되어 있는 ‘사랑’도 분명히 있다.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은 아닌 것이며,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다 같은 사랑이되 다만 ‘일정한 상대’ 이외의 사람에 대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어떤 방법’이 제한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누구든지 여러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며, 또 동성을 사랑할 수도 있고 그러한 우정 또한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일이거니와, 특히나 가족을 남달리 사랑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이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들은 결코 ‘성애’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오누이는 서로에게 한 남성과 한 여성이어서는 안 된다.
지루하지만 똑같은 논리를 되풀이해 보자면, ‘성애’에 관한 아주 오래된 이 관습에 꼭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개인에게 있어서라면 마치 도둑질 자체가 꼭 나쁜 짓이어서가 아니더라도 전과자에게 더이상의 기회가 가혹하게 제한된다는 이유만으로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을 꺼릴 이유로 충분하듯이, ‘사회적 비난’이나 그 내면화로서의 ‘도덕적 양심’만으로도 이미 관습을 따라야 할 더이상의 이유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도 한 개인에게 “당신은 어째서 당신이 보고 있는 바 그대로 왕이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않는가”라는 힐난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왕은 벌거벗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에 대해 ‘자신이 보고 있는 바를 무시하면서까지’ 비난하고 이를 통해 끝내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당신은 왜 여러 사람과의 성애를 추구하는가”라고 묻는 당신은 도대체 왜 단 한 사람과의 배타적 성애만을 고집하는가? 또는 “당신은 왜 동성을 사랑하는가”라고 묻는 당신은 그렇다면 왜 이성만을 사랑하는가? “당신은 왜 친누이와 사랑에 빠졌는가”라고 묻는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한사코 성애로는 표현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요령부득이라면 애시당초 당신의 질문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도대체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을 개인적 불이익이라는 근거 말고는 더이상의 어떠한 사회적 필연성도 제시할 수 없으면서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는 행위들에 대하여는 꼭 그래야만 하는 근거를 끈덕지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왜 왕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가”라고 묻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신은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면 나 또한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
‘도덕’이라는 사회적 강제력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는 상황이 온전하게 정당화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어떤 관습이 누구에게나 승인될 수 있는 또는 설령 전폭적인 승인을 거절하는 사람조차도 일정한 합의 수준에서 양해할 여지는 있을 만큼의 타당한 근거를 내제하고 있다면, 굳이 ‘도덕’의 힘을 빌 필요도 없이 충분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동차 함께 타기’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비난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양심에 부끄러울 일은 더더욱 아닌데도, 그리고 특별히 ‘선행’이랄 것도 없는 이 행위에서 ‘도덕적인’ 자기만족이나 심지어 우월감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 필요성에만 동의한다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도덕적 강제가 아닌 자유의사에 의한 선택이 작용한다.
다름 아닌 ‘도덕’이 동성애와 근친간의 성애와 심지어 유일한 상대에 배타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성애까지를 금지하고 있다면, 단순히 어떤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이들 금지된 행위들에 대하여 ‘배타적 이성애’라는 관습적 행위가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도록 강제하면서 그 부자연스러움을 정당화하는 기능뿐 아니라 나아가 그보다 더욱 의미심장하게도 마치 사기꾼의 탐욕과 왕의 위선처럼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그 필요의 진정한 정체를 가장 확실하게 은폐하는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신에게는 사회적 비난과 그에 따르는 명백한 불이익과 차별을 무릅쓰고 하물며 스스로의 양심에조차 반하는 행위들을 굳이 감핼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나는 감히 그것을 선동할 의사도 전혀 없거니와 그 이유를 애써 캐묻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 당신은 도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특정한 행위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비난할 권리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나는 그조차도 중지하거나 자제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 다만 당신에게 일말의 ‘도덕적 양심’이 살아 있다면 대답하라. 그 양심을 필요로 하는 -- 그리고 그 정체를 당신의 양심 속에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감춰두고 있는 왕은 누구이고, 사기꾼은 누구인가.
오로지 일부일처의 배타적 혼인관계 안에서의 성애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필요는 물론 없을 것이다. 다만 일부일처와 그 직계 자녀로 구성되는 혈연가족이라는 ‘하나의’ 관습이 그 대신 선택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생활양식보다도 ‘실제로’ 우월하다면 막연하기 짝이 없는 ‘도덕’ 따위가 아니라도 이 관습은 충분히 유지될 것이라는 점은 다시한번 확인해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혈연가족이라는 제도의 유지 존속 재생산을 위해 비단 ‘성애’에 관해서 뿐 아니라 온갖 자질구레한 도덕적 강제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로부터 이미 이 관습이 어떠한 우월한 가치(자유롭다거나, 아름답다거나, 또는 효율적이거나 등등)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가 물보다 진한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명제를 부인할 때 패륜부덕에 인간망종으로까지 이어지는 도덕적 질타가 어김없이 뒤따르고,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양심상(!) 차마 끝까지 부인하기조차도 주저스러룰 수밖에 없다면, 단언컨대 적어도 항상 피가 물보다 진하지는 않을 것이며, 더욱 참혹하게도 굳이 피가 물보다 진해야 하는 이유조차도 애써 ‘도덕’ 뒤에 숨겨야 할 만큼이나 추악할 것이다. 나는 피가 물보다 진할 리 없다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불온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야 어떻든 피가 물보다 진해야 할 이유만이라도 타당한 근거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제시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동의하거나 최소한 양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죽 그 근거가 궁색했으면 또는 하도 추악해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면 ‘도덕’이라는 순환논리 속에 꽁꽁 감춰두고 있는가 말이다.
탐욕스러운 사기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혈연가족의 성별 분업 구조가 자본에게 초과이윤을 확보해 준다는 원리는 이미 깊이있게 논구되어 왔다. 성적인 억압이 가족제도와 관련된 그 어떤 도덕률보다도 강력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도덕적 강제를 통해 절대시되어 왔던 배타적 이성애가 단지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관습으로 상대화하고 그동안은 극심한 소외를 경험했던 다른 가족형태들의 존재가 인정된다면 성별 분업에 기반한 착취 구조는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혈연가족은 세대재생산을 포함하여 마땅히 사회보장 제도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들(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는 경제적 최소생활의 보장뿐 아니라 정치적인 공정성도 포함된다. 인권에 대한 부당한 사회적 차별이 없다면 굳이 가족과 같은 정서적 안전장치가 왜 필요한가.)을 거리낌없이 개별가족의 책임으로 전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개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혈연이라는 생득적 신분관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피가 물보다 진해야 하는 진짜 이유이며, 동시에 혈연가족의 폭력적 속성을 유감없이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다. 선택적이지 않은 생득적 신분관계가 삶의 질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전근대적 폭력’ 이외의 다른 말이 필요한가.
그러나 가족의 존재가 서로에게 경제적 혹은 정서적 사회보험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 구성에 합의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왕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다른 아무 이유도 없이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복종한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그가 내 생계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또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더라고 이 험악한 세상에서 그 역시도 나를 끝내 져버리지는 않으리라는 기대효과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서 복종할 뿐이라고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한다면 본의와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복종의 ‘철회’를 의미하게 된다. 혈연관계의 숙명적 절대성이 훼손되고 가족의 기능이 상대화하여 여느 사회적 관계와 비교가능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사회적 비용 지불의 책임을 더이상 개별가족에게 무작정 전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의 혈연관계로부터 사회보험의 기능을 실제로 제공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매우 위선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가족관계의 승인이 실제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절대적 도덕률 때문이건 현실적 보험 기능에 대한 공리적 판단 때문이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어떻든 그는 오로지 절대적 도덕률에 의해서만 그 관계를 승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혈연가족으로부터 이미 소외된 개인에게서 나타난다. 그에게 가족의 본질을 도덕적 절대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공리적인(또는 여타의 상대적) 가치에 입각하여 우월한 제도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큰 현실적 차이를 내포한다. 그는 타인들의 도덕적 양심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할 수 없지만, 그가 경험하는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서라면 사회적 항의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그는, 아버지가 마땅히 아버지로서 베푸는 시혜에 관해서라면 고작해야 신세타령밖에 할 수 없겠지만, 만일 마땅히 사회가 부담해야 할 책임을 단지 아버지가 대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사회적 권리 보장에 관해서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회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당장에라도 “왕은 벌거벗었다”고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은 아니라고 외치고 싶어지겠지만 예상되는 결과는 훨씬 더 참혹하다. 집도 절도 없는 주제에 감히 절대적인 혈연관계를 함부로 상대적인 잣대로 해부하려 들다니, 과연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로다!”
왕이 벌거벗었다는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함부로 발설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왕과 백성들의 입장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가족에 대한 논의들이 탐욕스러운 협잡을 숨기기 위해 ‘도덕’을 끌어들이는 사기꾼의 정체만을 줄곧 추적해 왔기 때문에 그 와중에 자신의 권력을 위해 위선을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왕의 결정적 역할을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혈연관계의 절대적 도덕에 대한 묵시적 동조로써 가족관계를 승인하고 있는 자들이 단지 자신조차도 가족 내에서 어떠한 종류든 또는 크든 작든 불합리에 부딪치고 있다는 경험적인 근거를 내세워 스스로를 백성의 입장에 슬쩍 끼워넣는 바람에 왕의 자리가 흔적없이 실종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려나 ‘도덕적 양심’이 가장 주요한 억압기제로 작동하는 가족제도에서, 전복해야 할 기득권 세력이 결코 ‘한 줌도 안 되는’ 사기꾼들만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 혈연관계로부터 끝내 못 벗어나는 당신들의 알량한 도덕, 당신들의 쥐꼬리만 한 기득권, 궁색한 변명으로 잔뜩 웅크린 당신들의 추악한 위선을 향해 단 한마디의 헌사로써 진실의 비수를 내리꽂는다. “벌거벗은 임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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