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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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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삶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작성자 똥개

말에 드러나는 생활상

'열다'와 '닫다'의 어원이 '열(10)'과 '다섯(5)'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손바닥을 열면 열이고 닫으면 다섯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니 무척 흥미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증거는 없으니 과학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구체적인 증거가 분명한 관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마리'와 '머리'의 어원이 같다든가, '남다'와 '넘다'의 어원이 같다든가 하는 것이나 '사랑하다'가 '생각하다'라는 뜻이었다든가 '스승'이라는 말이 '무당'이라는 뜻의 말에서 연유하였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말에는 말을 쓰는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재미있는 보기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작은어머니'라는 말은 '숙모'(叔母)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지기는 했어도) '서모(庶母)'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작은집'은 '숙부댁'뿐 아니라 '첩'의 뜻이 있다. 이 점에 주목하면 먼 옛날의 가족 제도를 짐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생활주변을 돌아보며 우리가 실제로 쓰는 말에 어떤 의식이 담겨 있을까를 살펴본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의식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좀체로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여대생'이라는 말은 있어도 '남대생'(?)이라는 말은 없다. '여의사'는 있어도 '남의사'(?)는 없는 것도 같은 현상일 것이다. 여기에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 대학생이나 남자 의사는 따로 지칭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여자 대학생이나 여자 의사는 따로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은 특별한 모습이라는 우리의 생활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계속 그런 표현이 쓰이고 있다면 수의 다소와는 관계없이, 즉 아무리 여자 의사가 많아진다 해도, 그것을 특수한 현상으로바라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말을 쓰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의사'나 '여대생'에 대한 일반적 편견을 받아들이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당장 쓰지 말자거나 할 수는 없으며 또한 말로 표현되는 것 자체가 그리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실제로 '작은어머니'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혼동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먼 옛날이 아닌 지금 사람들의 가족제도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사실에서 확인되듯이, 어떤 시기의 의식이 변화한다 해도 그 의식을 담았던 말은 화석처럼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면, 이러한 말들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을 반성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밖에도 우리 사회의 일반적 의식이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말들에 마주치게 된다. 그러한 말들을 그저 무심히 넘기지 말고 찬찬히 되살펴 본다면, 우리의의식을 반성해 보거나 또는 그러한 의식이 생겨나는 바탕이 되는 우리사회의 모습에 대해서까지도 더 깊이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안전선의 안팎

말은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사물과 말하는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시된 사물에 대한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정서를 담아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머니'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과 말하는 사람(또는 듣는 사람) 사이에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테면 영어의 ‘mother’가 아닌 '어머니'라는 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얼마전까지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었던 귀에 익은 안내방송 문안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보자.: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안전선이 승강장에 그어진 노란색 선을 가리킴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으나, 안전선의 밖이 선로쪽을 가리키는지 승강장쪽을 가리키는지는 지시적 의미만으로 볼 때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문장의 맥락으로 보아 '당연히' 선로반대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뿐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관계를 표현하는 측면을 살펴보자. 안전선을 기준으로 바깥쪽이 선로의 반대쪽을 의미했다면 안쪽은 선로쪽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말을 한 사람은 열차 또는 선로를 중심으로 열차가 역에 들어오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승객의 입장에서 안전을 걱정해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시설물의 편에서 속된 말로 “걸치적거리니까 비키라”는 아주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승객을 객체로 여기고 시설운영자를 주체적 입장에 세우는 관료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시설물이든 시설을 운영하는 제도적 기관이든 사람 아닌 것을 승강장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보다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딘가에 안전선이 그어져 있다면 안쪽이 안전하고 바깥쪽이 위험하리라고 느껴지는 것이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일반적인 언어감각이다. 안전을 위해 안전선 밖으로 나가라는 이 문안은 이러한 정서적 공감에 대하여 은연중 혼란을 유발한다. 우스개소리지만 정서적 언어감각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 얼핏 듣는다면 이 안내방송이 정작 걱정하고 있는 것이 승객이 아니라 시설물의 안전이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안내방송을 계속 듣다 보면 무의식중에 안전선에 대한 느낌이 뒤바뀌어 바깥이 안전하고 안쪽이 위험하리라고 느껴지거나 적어도 우리말이 축적해온 안과 밖이라는 말의 풍부한 정서적 공감을 잃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얼마 전부터 이 문안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표현만 바꾼다고 해서 고압적이고 관료적인 태도나 나아가 깊은 생각없이 우리말의 폭넓은 의미망을 파괴하는 무책임 자체가 사라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주위에서 오고가는 말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누구나 겉으로 드러나는 지시적인 의미를 넘어서 더 깊이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혹시나 우리가 지양해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가 담기지나 않았는지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제법 글솜씨가 있다는 사람들의 글에서도 심지어 꽤 이름있는 작가의 글에서도 '이름모를 새'라든가 '이름모를 꽃'과 같은 표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곤 한다. 게다가 '까치'나 '참새'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기보다 '이름모를 새'라고 하면 왠지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곰곰이따져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낱말)은 말하는 이와 그 사물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모', '벼', '쌀', '밥'이 서로 다른 사물을 가리키지만 영어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rice' 한 낱말로 충분하다. 말장난이 아닌 이상 어떤 사물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미 그 사물과의 관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름모를 새'라는 표현은 그 새와 말하는 이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을 멋스럽다고까지 여긴다면 그 멋이란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겉멋'일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름을 아는데도 괜한 겉멋에 들떠서 '이름모를…….'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보다 정말로 그 새나 꽃의 이름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이것은 어휘력이 빈곤해서가 아니라 마치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만났을 때 처음얼마동안 '이름과 얼굴이 따로 노는' 경험을 하듯이 사물과 이름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스꽝스럽게도 '까치'라는 낱말을 뻔히 알지만 진짜 까치를 보고도 '이름모를 새'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고 관계가 분명해 질수록 '이름과 얼굴이 따로 노는' 시기가 극복되듯이, 주위의 사물에 늘 관심을 가지기만 한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을 언제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만큼의 관심조차도 없다면 이미 그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사물일 것이고, 제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치장해 봤자 실제로는 '아무것도 의미하고 있지 않은' 헛말밖에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새나 꽃은 사람에 따라 생활과 직접 관계가 없을 수도 있으니 굳이 모든 사람이 그 많은 이름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라면 어떨까. 이를테면 아프거나 가려워 도움을 받고자 할 때 '이름모를 그곳'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실제로 어처구니없게도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몸을 가리키는 낱말에서조차 어휘력의 빈곤을 느끼곤 한다. '오금을 펴지 못한다'거나 '오금이 저리다'는 말의 뜻을 비유적으로는 알아도 '오금'이 구체적으로 어느 부위를 가리키는지 아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가래톳'이나 '욕지기' 같은 낱말은 그 말이 주는 어감 때문인지 뜻을 잘못 알고 사용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회목'이나 '미주알', '거웃', '자분치' 따위의 낯선 낱말들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낱말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은 적당한 표현을 못 찾아서 이리저리 돌려 말한 경험이 있는 말들일 것이다.

이런 낱말들은 제대로 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게 되고 나중에 되살려 쓰려 해도 영 어색한 표현이 되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우물쭈물 대충 얼버무리고도 “새겨 들으라”고 되레 큰소리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물들도 사람처럼 이름을불러주어야 참된 관계가 열린다.

'아버지'와 '딸'은 반대말일까?

어떤 낱말의 뜻을 설명하라고 하면 보통은 사전에서처럼 상세하게 풀어서 말하게 되지만 얼른 설명해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이럴 때 가장 편리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비슷한말, 반대말 찾기이다. 비슷한 말로 설명할 때는 아무래도 원래 낱말보다 좀더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쉬운 말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하나마나한 설명이 되기 때문에 어느 만큼은 풀이의 성격을 가진다. 그에 비해 반대말을 제시하기는 좀더 손쉽다. 아마도 '반대된다'라는 개념이 누구에게나 가장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반대말에는 언뜻 상상하기 힘든 복잡한 뜻이 숨어 있다.

'아버지'의 반대말을 생각해 보자.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들'이라고 해도 된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말이 '직계가족‘ 중 ’1대 위‘의 ’남자'라는 적어도 3개의 의미요소로 분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라고 했을 때 반대되는 점은 '1대 위'와 '1대 아래'이다. '어머니'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가 반대되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반대되는 ‘딸'을 '아버지'의 반대말이라고 하지는 않으며, 나아가 '직계'와 반대되는 '방계'로서 '1대 위의 남자'인 '삼촌(아저씨)'를 '아버지'의 반대말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흔히 반대말이라고 하면 서로 반대되는 점만을 보기 쉽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반대되는 점은 꼭 한 가지뿐이고 나머지는 공통점이라야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는 '직계가족 중 남자'라는 점이 공통점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계가족 중 1대 위'가 공통점이다. 그리고 나아가 직게가족이라는 공통점은 다른 요소보다 절대적으로 전제되며, 직계가족이 아니면 아예 반대말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반대말들도 모두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수컷'과 '여자'를 반대말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춥다'와 '덥다'는 언뜻 생각할 때는 전혀 공통되는 의미요소가 없을 것 같지만 '기온'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온도'를 표시하는 말이라도 '뜨겁다'와 '춥다'는 반대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반대말이라고 해서 서로 반대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되는 한 가지 점만 빼고는 모두 공통점인 것이다.

'입다'의 반대말을 '벗다'라고 하지 않고 '안 입다'라고 말하는 우스개가 나온 것도 실은 '반대말'에 이렇게 복잡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안 입다'도 '입다'의 반대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벗다'보다는 반대의 뜻이 약하기 때문에 우스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입다'와 '벗다' 사이의 '옷을 걸친 상태를 바꾸는 동작'이라는 공통점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입다'와 '안 입다'가 가진 공통점은 그보다 훨씬 추상적이어서 반대의 뜻이 약한 것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반대말들을 그냥 서로 뜻이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말고 무엇이 공통점일까를 생각해 보곤 하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성격이 정반대라고 여겨지는 두 사람을 놓고 보통은 반대되는 점만을 찾아내어 열거하는데, 만일 반대되는 점을 한 가지씩 찾을 때마다 공통되는 점을 몇 가지씩 찾아낼 수 있다면 사람들의 성격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은 넓어지지 않을까. 갑은 예쁘고 을은 못생겼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갑과 을은 모두 눈에 띄는 외모를 가졌다는 점이 공통되는 것이다.

또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반대된다'는 말에도 사실은 여러가지 뜻이 있다. 먼저 '남자'와 '여자'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반대의 뜻이 가장 강할 것이다. 또 '오른쪽'과 '왼쪽'처럼 서로의 관계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아버지'와 '아들'도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춥다'와 '덥다'처럼 연속된 지시대상의 양 끝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그 사이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이 수도 없이 있을 수 있다. '착하다'와 '악하다', '좋다'와 '싫다'같은 말들이 있다. 조금 더 정밀하게 이야기하면 두번째 뜻과 세번째 뜻을 아울러 가지면서그 중간쯤에 있는 반대말도 있다. '길다'와 '짧다'나 '크다'와 '작다'처럼 서로 비교하는 말들은 '춥다'와 '덥다'보다는 훨씬 더 상대적이지만, '오른쪽'과 '왼쪽'처럼 서로 긴밀하게 상대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도 일반적으로는 반대말로 잘 생각되지 않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반대말로 쓰이는 낱말쌍들이 있다. '빨강'의 반대말을 '파랑'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반대의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반대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썼끼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빨강'의 반대말이 '노랑'일 수도 있고, '흰색'일 수도 있고, '검정'일 수도 있다. 물론 '빨강'과 '파랑'이 미술에서 사용하는 '색상환'의 반대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랑'과 '보라'를 반대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런 경우도 반대말일 수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상황에 의존하겠지만, 굳이 낱말의 뜻만으로도 설명할 방법을 찾는다면 먼저 '빨강'과 '빨강이 아닌 모든 색', '파랑'과 '파랑이 아닌 모든 색'의 대립이 전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반대의 뜻은 가장 약해진다.

그런데 반대말을 이용하여 낱말뜻을 쉽게 풀이할 수 있다는 점을 거꾸로 이용하면 상대적인 한에서 반대말일 수 있는 두 낱말이 마치 절대적인 모순인 것처럼 설명하거나 또는 심지어 반대말이 될 수 없는 것을 반대말인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어떤 현상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가르치다'와 '배우다'는 상대적인 관계로서만 반대말이 될 뿐인데도 흔히 가르침과 배움이 마치 배타적인 일처럼 생각되기도 하며, 어떤 견해에 대하여 '동의'와 '반대'라는 양끝점 사이에 다양한 생각들이 펼쳐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흑백논리가 횡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심한 보기로 '똑똑하다'와 '무식하다'를 흔히 반대말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지식의 양'이라는 공통점을 전제로 하면 '무식하다'와 '유식하다'로, 그리고 이와는 달리 '이해력의 정도'를 공통점으로 하면 '똑똑하다(슬기롭다)'와 '멍청하다(어리석다)'로 반대말을 삼는 것이 옳다. 이 점을 혼동하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지식의 양'과 '이해력의 정도'가 항상 일치한다는 편견을 자기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쓰고 있는 말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호프와 바캉스

몇년 전부터 생맥주를 주로 파는 주점을 '호프'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지 않다. 소주와 맥주를 함께 취급하는 주점에 '소주방 & 호프'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이미 '호프'는 맥주를 팔고 있다는 뜻 이상을 가지지 않는 듯하다. 호프가 사실은 맥주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광장'이라는 뜻의 독일어일 뿐이라면 아마도 처음에는 독일식으로 꾸민 제법 너른 공간의 생맥주집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네의 허름한 술집을 일컫는 데도 어김없이 '호프'가 사용된다. 맥주안주로 제격인 '치킨'만 해도 그렇다. 영어로 닭 또는 병아리의 통칭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련만, 어쩐 일인지 그저 튀겨낸 통닭을 의미할 뿐이다.

프랑스어 '바캉스'는 단순히 휴가라는 뜻이지만 아마도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겨울에 바캉스를 간다고 하면 매우 우스꽝스러운말이 될 것이다. 프랑스어에서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미 한국어의 '바캉스'는 여름휴가 특히 피서여행만을 가리킨다. 또한 고급스러운 연립주택을 흔히 '빌라'라고 하지만 이는 별장이라는 뜻이며, 휴가지의 숙박처로 이용하는 '콘도미니엄'은 대규모 공동주택(우리말로는 '아파트')을 뜻한다.

이렇듯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에 들어와서 뜻이 한정되거나 심지어 엉뚱하게 바뀌는 외래어들이 우리 주위에는 무척 많다. 여기에서 적어도 두 가지의 사실이 확인된다. 먼저 이들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위해서건 또는 어떤 다른 이유에서건 무작정 내몰아야 할 '외국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겨울에 바캉스를 떠나고, 또는 뜰에서 치킨을 기른다면 '외국어 남용'의 혐의를 받아 마땅하겠지만 오히려 우리말의 맥락에서만 온전히 뜻이 통하는 낱말들을 우리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또한 따라서 이들 외래어가 우리말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의 뜻을 일부러 무시하고 본래의 뜻으로만 써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그 외국어를 알고 있는 사람의 잘난 체에 지나지 않는다. ‘호프’가 이미 우리말에서 의미를 가진다면 독일어로 무슨 뜻인지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어원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면 그 말이 독일어라는 사실 자체를 알아야 할 필요조차도 없다. 우리말을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말에서 실제로 쓰이는 의미만 정확하게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흔히 우리말을 사랑하자고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뜻이 통하지 않을 만큼 특별히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한자어다, 일본말이다 하면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물론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세대가 일본어를 모르는 세대라면 전혀 못 알아들을 일본어를 부끄러움도 없이 내뱉거나, 한문투를 섞어 공연히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점잖고 격에 맞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이미 일정한 의미를 획득한 낱말에 대해서까지 새삼스럽게 어원을 들춰내어 배척하는 것은 진정한 '우리말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말을 제대로 가려서 쓰자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한자어와 일본어는 물론 온갖 외국어의 낱말에 정통해야 한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더욱 끔찍하게도 못 배운 사람들은 그저 외국어라도 배운 사람들이 우리말이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시키는 대로나 하라는 뜻일테니, '우리말 사랑'은커녕 외국어 지식의 자랑말고는 남는 것이 없다.

이런 오해가 생겨나는 것은 외래어의 기능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라디오처럼 우리말에 적당한 낱말이 없어서 외국어에서 '빌어다' 쓰는 말만을 외래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우리말에 이미 비슷한 뜻을 가진 낱말이 있는데도 외국어를 사용해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그런데 위에서 든 보기에서처럼 낱말의 뜻은 말을 쓰는 맥락에 따라 결정되고 또 변화하는 것이지 본래의 뜻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어떤 낱말이 우리말에서 이미 거리낌없이 쓰이고 있다면 그 말을 필요로 하는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필요해서 쓰는 낱말에 대해서 굳이 본래의 뜻에 매달려 같은 뜻의 낱말이 우리말에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의미없는 일이다.

학교 문법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자면 '하나, 둘, 셋'은 '일, 이, 삼'과 같은 뜻이고, '첫째, 둘째, 셋째'는 '제일, 제이, 제삼'과 같은 뜻이며, 이들 사이에는 토박이말과 한자어라는 차이밖에 없다. 진실이 그러하다면 한자어보다는 순우리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누구나 끄덕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말들의 실제의 쓰임은 훨씬 더 복잡하다. 이를테면 “나는 이 건물의 오층에 산다”라는 말을 “나는 이 건물의 다섯층에 산다”고 바꿀 수 있을까. 대개의 경우 '일, 이, 삼'은 '하나, 둘, 셋'의 뜻보다는 오히려 '첫째, 둘째, 셋째'(또는 '제일, 제이, 제삼')의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는 한자어가 본래의 뜻과 무관하게 우리말의 맥락 안에서 의미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닭튀김을 굳이 '치킨'이라고 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멀쩡한 맥주집을 전혀 엉뚱한 뜻을 가진 '호프'라고 하는 것은 더욱 언짢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저 통칭으로서의 '닭튀김'과 특정한 요리방법으로 튀겨낸 '치킨'의 뜻이 꼭같지는 않다. 그저 '맥주집'이라고 통틀어 말하는 것과 '호프'라고 말할 때의 뜻의 차이를 명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말맛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말의 풍부한 표현을 가로막는 태도이다.

또한 외래어의 잦은 사용으로 우리말이 죽어간다는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빌라'는 '별장'이라는 뜻이 아니기에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섬으로써 말을 없애지 않으며, 심지어 '고급 연립주택' 정도의 뜻이기에 '연립주택'이라는 낱말에도 그다지 위협을 주지 않는다. 다만 왜 굳이 '빌라'를 '연립주택'과 구분할 필요가 생겨났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 말에 대해 훨씬 더 사려깊은 태도이다. 말이라는 것은 누가 쓰라고 해서 쓰거나 쓰지 말라고 해서 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생기면 만들어지고 필요가 없어지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뜻이 다른 두 낱말을 놓고 왜 그렇게 뜻이 달라져야 했는지를 되살펴 보는 대신 다르지 않다고만 되풀이 떠들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쩌면 '빌라'가 외국어라는 이유로 '뜻이 같은'(사실은 다른) 우리말(연립주택 또는 다세대주택)로 고쳐써야 한다고 막연하게 고집하는 한, 이 말을 필요로 하게 된 사회적, 심리적 맥락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실종될지도 모른다.

한글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대학 교수라는 분이 "우리말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로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심지어는 한글날 아침 전국으로 방송되는 라디오에서 "우리말이 만들어진 지 5백여 년"이라는 망발이 들리기도 한다. 무의식중에 일으킨 착각이려니 실소하고 넘어가기에는 말과 글자를 혼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들이 너무나 심각하다.

한자를 쓰지 말고 한글만 쓰자는 주장이 마치 한자말까지 부정하자는 억지처럼 여겨지는 것도 말과 글자를 혼동하기 때문이고, 한글로만 써서는 한자의 풍부한 조어력을 이용하기가 수월치 않다는 이상한 논리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도 말과 글자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문자에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던 그 옛날의 갑골문자 시대도 아니련만 글자가 말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러나 정작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문화일 뿐 그 사이에 우열이 없다고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래서 또렷하게 한글이 과학적이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 근거를 물으면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과학적이라고 믿어버리는, 사실은 매우 비과학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은 지금의 우리말을 적는 데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게에서 가장 과학적'이지는 않다.

다만 15세기의 '훈민정음'이 그 당시의 우리말을 적기에 아주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으며, 훈민정음 이외의 어느 문자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훈민정음이 서양에서는 17~18세기에 이르러서야 발견된 음운학의 기본 개념과 원리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일인데 굳이 민족적 자부심을 위해 엉터리 논리나 억지 신념까지 동원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한글도 이를테면 네 글자가 사라진다든가 하는 변화를 겪었고, 우리말은 전문 지식이 없으면 15세기 문헌을 읽지조차 못할 만큼 훨씬 더 많은 변화를 보았다. 따라서 한글의 과학성은 절대적 명제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상대성을 전제로 파악하는 것이 올바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1443년에 만들어진 훈민정음을 3년간의 실험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왕조실록의 “1446년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을 완성했다”는 기록은 '훈민정음'이라는 글자가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훈민정음이 음운학의 정밀한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사료가 바로 이 책이다.

한글날의 기원도 왕조실록의 이 기록에 따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정해졌는데, 훈민정음의 과학성을 밝히는 결정적 문헌인 만큼 이 날을 기념한다고 해서 굳이 시비삼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명시한 역시 왕조실록의 1443년 12월(양력으로 1444년 1월) 기록이 무시되거나 그 의미가 폄하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발표지면 미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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