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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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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승리하건 천국도 지옥도 없다
작성자 똥개

일찍이 강준만은 “민주주의는 한 판 승부가 아닙니다.”라고 갈파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의미에서 (그 본래 취지가 무엇이었든과 전혀 무관하게) 언젠가 신현준이 “‘그날도 평소 같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음을 품고 투표일에도 '하던 대로' 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했던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물론 나는 정치 자체를 냉소하거나 정치에 무심한 사람은 전혀 아니다. 나는 분명하게 지지하는 정당도 있고, 선거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공개적으로 기꺼이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평소에는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정치에는 도통 애정도 관심도 없다가는 ‘선거’ 때만 되면 갑자기 정치 의식(?)이 높아지는 이 나라 유권자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민망하기가 그지없다.

나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서 나라꼴이 천당에서 지옥으로 달라질 수 있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민주주의가 ‘법치’에 기반한다면 말이다. 좋다. 백걸음을 양보해서 이 나라 정치 현실이 팔자 좋게 민주주의 타령이나 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저열해서 ‘반민주 세력’부터 정치판에서 쓸어내야 한다는 인식에 동의한다고 치자.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반민주 세력’은 도대체 무엇으로 쓸어낼 것인가. 설마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으로?

중학생도 알고 있는 상식으로 말하자. 대통령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의 수반이다. 그야말로 독재 정권 시절의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한, 예컨대 입법부가 놀고 있다면 대통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난 5년간의 소수 여당 집권 경험을 통해 신물나게 겪었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해 김대중 대통령이 그나마 자신의 정치적 소신대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행정부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사형 집행’이 임기중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정도뿐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는 정치인이고 유권자고 정작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 선거는 마치 차기 대통령 선거의 예비 선거인 양 치르고는,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그것으로 세상이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북새통을 떨어댄다.

나는 이회창 후보에게 묻는다. 입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과반수 의석을 가지고 있는 원내 제1당의 총재보다 더한 권력이 이 나리에 어디 있다고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 오겠다’고 엄살을 피우는가. 지난 5년 동안 당신들이 해 놓은 짓들을 돌이켜 보라. 그것은 행정부의 과도한 권력에 대한 정당한 견제가 아니라 입법부의 다수를 장악한 권력자의 ‘횡포’였다. 김대중 정부 실정에 대한 적어도 절반 이상의 책임은 당신들에게 있다.

나는 노무현 후보에게 묻는다. 적어도 2004년 봄까지 국회는 한나라당의 수중에 있는데, 노무현이 당선되면 무슨 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인가. 그 수많은 장밋빛 공약들도 국회가 예산을 안 주면 말짱 공약(空約)에 그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정계 개편? 결국 권력의 양지만을 쫓아다니는 ‘철새’들을 데려다가 거수기로 써먹고는 하는 꼴 봐서 논공행상하거나 토사구팽하겠다는 얘기 아닌가.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참담한 건 권영길 후보다. 어느 토론회에서 바로 위와 똑같은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약 당선된다면 혁명적 조류에 휩쓸려서 저희 민주노동당의 정책이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국회의원들은 철새와 다름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권영길이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당에 많은 의원들이 몰려들 것이다." 국회의원이 대통령에게 줄을 서는 구시대 정치 행태를 가지고 언필칭 '혁명'을 하시겠다? 제정신인가?

제발 다들 정직해졌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누가 된다고 해도 이 나라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적어도 내 피부에 와 닿는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은 (적어도 어떤 정치 세력이 국회나 지방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가와 비교할 때) 아주 미미하다. 그리고 그게 정상적인 민주주의다. 입발린 정치적 수사일망정 ‘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라면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런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해대는 것일까. 거기에 한국 정치의 비극이 있다. 거짓말일망정 ‘당장 할 수 있다’고 떠드는 후보와 진정성을 담아 ‘당장은 못 하겠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하는 후보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쪽에 더 솔깃하겠는가. 적어도 당신이 5년만에 돌아오는 단 한 번의 선거로 당신이 가진 주권을 ‘대권’을 거머쥔 한 사람에게 양도하고 다음 선거까지 5년 동안은 정치에 신경 딱 끊고 먹고 사는 일에만 전념하기를 원한다면.

물론 이 나라의 정치판은 ‘여의도유치원’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만큼 저열하다. 그러나 그것이 독재에 기생하고도 승승장구하는 철면피들이나, 시정잡배만도 못한 수준의 저질들이 득시글거리고 있기 때문이기만 한가. 아니 도대체 그런 자들에게 정치를 하라고 내어맡긴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바로 당신이 아닌가. 혹시나 이 대목에서 ‘난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신있게 발뺌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인제가 왜 비난받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하고도 그 결과를 승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선거 보이콧하고 ‘당신들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고 독립 운동을 하라! 도대체 당신의 ‘이웃’이 그런 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하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는 그런 자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한 자들이 당신에게 불구대천의 ‘적’이 아니라 늘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할 ‘이웃’이 분명하다면, 설령 그 자들이 아무리 저열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때로 양보할 수도 있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일 뿐이 아닌가.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왔다갔다 할 것 같은 심각한 착각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제 차분하게 자문해 볼 일이다. 어느 후보가 나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다면, 그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모두가 적어도 실존적으로는 나의 ‘적’일 것이다. 정말 그런가. 그 사람은 심지어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당신과 죽이 잘 맞는 동료일 수도 있다. 당신의 삶을 지옥으로 추락시킬 수도 있는 자들과 ‘평소’라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것은 별개 문제라고? 세상에는 정치와는 무관한 영역도 많다고? 맞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의 삶이 온통 정치로만 채워져 있지 않는 한, 당신이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심지어 적대하는 정치 세력이 집권을 한다 해도 결코 지옥이 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당신이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 해도 천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천국의 희망이나 지옥의 공포 따위는 벗어던지고 신현준의 충고처럼 ‘그날도 평소 같이’ 그렇게 심상하게 임할 일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날’만 지나고 나면 정치는 나 몰라라 하지 말고 강준만의 충고처럼 ‘평소’에도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면서 (삶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일부임에는 분명한) 정치에 관한 한 이견을 가진 ‘이웃’들과는 적절한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기를 꺼리지 말 일이다. 그것이 소위 ‘대중 정치’ 시대에 양식 있는 ‘대중’이 할 일이다.

발표지면 컬티즌, 2002.12.
단행본수록 만장일치는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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