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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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드롬은 없다
작성자
똥개
신드롬(syndrome)은 본래 의학 용어이다. 병명을 붙일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병인은 알 수 없지만, 일정한 공통성을 가진 병적 징후가 나타날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증후군'이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비단 신체적인 증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인 병적 징후에도 곧잘 쓰인다. 그래서 '피터팬 신드롬'(성년이 되어도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어른 아이' 같은 남성들이 나타내는 일군의 심리적 징후)이니 '수퍼우먼 신드롬'(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다 지친 여성이 나타내는 일군의 심리적 징후)이니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가 대중 매체를 통하여 접하는 '신드롬'이라는 말의 사용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사회 문화적인 현상 일반에 대해서도 곧잘 '신드롬'이라는 말이 붙어다니곤 하는 것이다. 최근의 예만 보더라도 '얼짱 신드롬'이니, '아침형 인간 신드롬'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회자되었다. 사실 이런 말들이 가리키는 현상들에 '신드롬'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적절할지조차 의문이다.
그것은 우선 '신드롬'이 아무리 말의 뜻이 확대되어 사회 문화 현상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 해도, 원래 의학 용어로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잃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정에 기인한다. 즉, '신드롬'이라는 말에는 적어도 '정상'(건강한 상태)에 대비되는 '이상'(병적 징후) 현상이라는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다. 어떤 사회 문화 현상에 대해 그 의미를 제대로 따져보기도 전에 미리 '이상 현상'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들어가는 셈인 것이다. 또는 설령 그러한 현상이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 문화적 조류라 하더라도, 단지 '낯선 것'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일 뿐인 것이다. 문화의 다양화라는 지평에서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현상을 두고 '신드롬'이라는 이름부터 붙이고 드는 것은 그래서 무척이나 불순하다. 이쯤 되면 '무엇이든 다 신드롬이라 부르고 싶어하는 현상' 자체를 '신드롬 신드롬'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신드롬'이 일련의 공통된 '현상'은 발견되지만 그 뚜렷한 원인을 지목하지 못할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의 지면을 장식하는 온갖 '신드롬'들은 과연 일련의 징후라고 한데 묶여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할 때가 많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어차피 사회 문화적 현상의 원인이란 복합적이게 마련이어서 애당초 뚜렷하게 밝혀낼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뚜렷한 원인을 모르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병적 징후를 포착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신드롬'이라는 범주화가 필요한 것이라면, 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회 문화 현상들이 어느 만큼씩은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특정한 현상만을 따로 떼내어 특별히 '신드롬'이라고 명명할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신드롬'이 남발되는 극심한 언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데에는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신드롬'들이 대중 매체를 매개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에 주목해 보자. 그다지 동의할 수 없기는 하지만, 정말로 이런 현상들이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회 병리 현상'이라면, 비록 여러가지 복잡한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지라도 그 원인에 진지하게 천착하고 이러한 징후를 적어도 완화하거나 폐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머리를 맞대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드롬'은 호사가들을 위한 가십의 소재일 뿐이다. 그러니 실은 별 큰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신드롬'이니 뭐니 공연히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대개의 '신드롬'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매체의 호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가 '신드롬'을 제조하는 데는 두 가지쯤의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대중 매체 자체의 장사를 위해서이다. 대중들에게 흥미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들은 장사를 한다. 오래된 경구처럼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즉 똑같은 대상이라도 무언가 신기하고 특별한 것처럼 포장을 해야만 기사거리가 된다. '신드롬'이라는 명명은 그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포장술이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예쁜 얼굴을 자랑하고 또 거기에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하면 하나마나한 얘기가 된다. 그러한 현상은 인터넷 이전에도 있었고, 인터넷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이 새삼스러운 뉴스가 될 것이 없다. 같은 말이라도 "얼짱 신드롬, 인터넷을 강타하다"라고 써야만 일단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부수적 경제 효과이다. 예컨대 대대적으로 '얼짱 신드롬'이 제조되면, 디지탈카메라(또는 카메라폰)의 보급 확대가 그 배경으로 지목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디지탈카메라(또는 카메라폰)의 간접 광고 효과를 통한 수요 창출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것은 모든 문화적인 '유행'이 만들어지고 또한 소비되는 방식이다. 다만 '유행'이라는 밋밋한 말 대신에 '신드롬'이라는 좀더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뿐이다. 어느새 대중들은 그저 '유행'이라고만 하면 또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다 말겠거니 심상하게 넘기지만, 거기에 '신드롬'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으면 그저 '유행'만은 아닌 무언가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물론 이 대목에서 '병리 현상'이라는 '신드롬'의 원래 의미는 완전히 전목되어 무의미해진다. 또는 정말로 '병리 현상'에 가까운 문제라 해도 정작 그러한 현상을 더욱 광범위하게 부추기고 확산시키는 주범은 바로 그것을 '신드롬'이라고 명명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대중 매체들이다.
더 웃지 못할 일은, 뚜렷한 실체가 없는데도 허구적으로 만들어지는 '신드롬'들이다. 예컨대 '웰빙 신드롬'의 경우가 그렇다. '웰빙'이라고 지칭할 만한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이것이 '병리 현상'을 지칭하는 '신드롬'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대상인지도 일단 의문이거니와, 설령 단순히 '유행'이라는 말의 '유행스러운'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해도, 정말로 대중 매체들이 그렇게까지 요란하게 떠들 만큼 실제로 유행하는 현상인지 자체에도 심각한 의심이 간다. 일부 유한 계급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삶의 방식을 묘사해 놓고는 그것을 '유행'이라고 하니 공연한 문화적 위화감만 한껏 부풀려지는 것이다. 가능하면 상품 논리로부터 벗어나자는 그럴듯한 선동이 오히려 이른바 '웰빙 산업'의 시장을 확대해 주는 기막힌 역설이 발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드롬'이라는 명명의 효과이다.
따라서 '신드롬'의 목록이 어디까지, 또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예측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모든 언어적 인플레이션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대중들이 더이상 '신드롬'이라는 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신드롬'들이 만연하게 되면, 아마도 '유행'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더 자극적인 용어가 필요할 것이며, '신드롬'이라는 말도 일종의 '병리 현상'을 가리키는 본래의 의미 맥락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해서, 틀림없이 사회 구성원 중의 일부가 향유하는 문화 현상을 특정한 가치관에 따라 함부로 '정상'과 '이상'으로 가르려는 폭력적 편견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요컨대 '신드롬'은 없다. 있다면 산업화된 문화 자본의 상품 논리와 가십거리를 팔아 장삿속을 채우려는 대중 매체의 탐욕이 빚은 포장술이 있을 따름이다. 또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피어나는 문화적 감수성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속없이 '유행'에 기꺼이 휩쓸려 덩달아 춤 추는 것으로 마치 첨단 문화의 향유자라도 된 듯 스스로를 기만하는 데 익숙해진 대중들의 허위 의식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신드롬'의 목록이 끊임없이 제조되고 있는 작금의 풍경 자체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병적 징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신드롬 신드룸'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낯선 것'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 나아가 '유행'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정체성에 기반한 문화 향유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