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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적 산문  Critical essay
사회문화 비평 성격의 산문을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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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한국, 여성과 남성은 왜 화해할 수 없나
작성자 똥개

조금 아쉬운, '지금 여기'의 스케치 : Mr.한국남의 재탄생을 기다리며

‘남성’에 관한 담론이란, 모습을 달리했을 뿐인 ‘여성’에 관한 담론이다. 또는 반대로 이야기해도 마찬가지다. ‘여성’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동시에 ‘남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주제의 내용을 다룬다고 해서 그 사회적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요컨대 ‘무엇을 말하는가’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이다. 특히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계량화하여 국가별로 비교했을 때 ‘뒤에서 세는 게 빠른’ 한국 사회에서라면, ‘남성’보다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도 대중문화 영역에서 남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살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컨대 1960년대의 신성일과 1990년대의 한석규나 최수종 사이의 거리는 꽤 멀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2000년대 이후의 스타들은 그들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관찰일 따름이다.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매트릭스’ 속의 허깨비들은 대중의 눈길이 ‘매트릭스’ 바깥의 현실로 향하는 것을 견고하게 가로막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전혀 다른 사회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해 사회경제적 자원이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사회에서, 더구나 모든 가치가 경제적 교환가치로 환원되고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더더욱, 남성의 ‘성적 매력’이란 궁극적으로 ‘경제적 능력’에 다름아니라는 준엄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으로 질주하던 1960~70년대는 한마디로 ‘기회’의 시대였으며, ‘거칠고 강인한’ 마초스러움을 더 많이 가진 남성일수록 그 기회를 놓고 벌어지는 다른 수컷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판매고 1위를 달리던 여성잡지의 슬로건 “성공하는 남편, 사랑받는 아내”로 상징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고 성장이 일정한 한계에 이르렀으며 전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아진 데디가 향상된 소득수준만큼 문화적 욕구도 커진 ‘소비’의 시대가 활짝 열렸을 때, ‘돈을 벌 줄만 알지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전통적인 남성들은 더이상 매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이전 시대보다 ‘온화하고 포용력이 있어 보이는’ 남성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배경이다.

물론 그 사이에 여성의 교육수준도 높아지고 사회적 발언권이 고양되기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양성 사이의 관계에서 ‘여성이 더이상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마초’를 경원하는 전투적인 여성들의 등쌀에 남성들이 변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떠밀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점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남성 판타지)를 주로 소비하는 계층이 ‘남성들과의 경쟁’을 통해 (남성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자신의 경제력을 확보하려는 투쟁의 대열에 뛰어든 전문직 종사 여성들이 아니라 그보다는 교육수준이 낮거나 일찌감치 ‘유리 천장’의 위력을 절감하고 그것을 내면화한 (전통적으로 여성의 성역할로 간주돼 온) 하급 사무직/판매직 종사 여성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1990년대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의 두 남성 주인공 태수(최민수)와 우석(박상원)에 빗대, 우석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보다 세련된 ‘태수=남성성’의 모습일 뿐”이며 “현실에서라면 ‘우석’은 그저 태수가 입고 있는 옷일 뿐이다. 우석이라는 옷을 걸쳐입었다 해서 태수가 태수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던 것도 그래서이다.* 또는 같은 드라마에서 여성 시청자들의 열광을 받았던 ‘여성화된 남성’ 재희(이정재)에 대해서도, 현실의 ‘재희’들은 (드라마에서처럼 헌신적인 ‘여성적 남성’이 되는 대신) “오히려 수세적일망정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여성화된 남성’이란 허구적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내 글, <남성성이라는 딜레마 - 백재희에 관한 고찰>,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삼인, 1997.

이러한 전제를 다시 명확히 확인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빚어내고 있는 남성들과 그 배경을 음미해 보자. 마찬가지로 그 사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회경제적 변화를 먼저 살펴야 한다.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사태가 일어났고,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다. ‘사오정(45세 정년)’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고, 전체적인 경제 규모는 외형상 회복이 되었다지만 내적으로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는 않아서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오정’ ‘이태백’의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을뿐더러 점점 심화되어 왔다. 특히나 여성 노동의 현실은 더욱 참혹해서. 남성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고용 안정성이 허물어졌다.

전통적인 ‘공세적 남성우월주의자’들이 구시대의 유물로나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도박’에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인생역전’의 기회 따위는 더이상 없다. 여성이 여전히 남성의 경제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 조건에서, 패가망신이 자명해 보이는 남성이 ‘성적 매력’을 가질 리가 없다. 게다가 1990년대를 풍미하던 ‘순해빠진’ 남성들도 마음놓고 미래를 맡기기엔 ‘2% 부족한’ 불안감이 있다. 사회의 시스템이 안정적이라면 얼마든지 그 매력을 발산할 수 있었겠지만, 겉으로는 안정돼 보이는 직장도 언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서 ‘소비’는 더이상 미덕이 아니다. ‘벌 만큼 벌면’ 제대로 쓸 것처럼 보인다는 건 ‘벌어들일 방법’이 막연한 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제 믿을 것이라곤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과거에 쌓아놓은 ‘기득권’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건, 10살 안팎에서 심지어 20살 가까이 연령 차이가 나는 커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성별적 문제는 곧잘 세대간의 문화적 차이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연령 위계의 문제로 슬그머니 대치된다. 다시 말해 양성 관게에서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한다 해도, ‘(자신은 익숙하지 않지만) 그 세대에선 당연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로 손쉽게 치부되거나  ‘역겨운 남성우월주의’로 여겨지기보다는 ‘어른이(니까) 알아서 하시는 일’쯤이 되고, 그 자체가 ‘성적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득권’이 남성의 성적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대중문화 트랜드에도 당연히 반영된다. ‘식스 팩’이니 ‘짐승돌’이니 하는 유행어를 낳았던 근육질 남성에 대한 주목은, 구시대적 ‘마초’에 대한 회고적 동경도 아니고 또는 현실에선 존재한 적도 없는 ‘여성화된 남성’에 식상한 변덕스러운 반작용도 아니다. 이때의 근육이 힘겨운 ‘노동’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은 돈 들여가며 시간 투자해 가며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다. 즉 그렇게 ‘자기 관리’를 할 만큼의 시간과 돈이 넉넉하다는 ‘기득권’의 상징이다. 또는 크나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온 “180cm 이하는 루저”라는 발언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의 ‘성적 매력’의 실체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건 단순히 성장기의 영양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았을 것이라는 ‘기득권’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키만 크다 뿐이지 별로 가진 게 없는’ 사람일지라도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득권’의 시대엔, 당장 가진 게 없더라도 ‘없어보이는 찌질이’보다는 겉으로라도 ‘있어보이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이 도도한 ‘기득권’의 시대에 조금도 ‘성적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구현하고 있는 남성성이다. 이미 한국판 ‘네오나치’라고 부를 만한 ‘수세적 남성우월주의’는 일상적으로 만연하고 있다. 새 밀레니엄의 벽두에 그러한 흐름이 전면화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공무원시험에서 군필자에 대한 가산점 부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을 게기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그 배경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이태백’ 사회,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했다 해도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오정’ 사회에 대한 깊은 불안과 절망이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서로 ‘성적 매력’이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상대이기 이전에 제한된 밥그릇을 놓고 싸워야 하는 가시적인 경쟁자일 뿐이다. 게다가 자신이 ‘성적 매력’을 느끼곤 하는 제 또래의 여성들이 자신을 전혀 ‘남성’으로 의식하지 않은 채 ‘루저’ 취급까지 하고 있는 것이 어김없는 현실이라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기도 하다. 그렇게 남성의,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신성동맹’은 점점 더 강화된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나 여겼던 전통적인 ‘공세적 남성우월주의자’들이 한사코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오는 것만을 통제하려 했던 구시대의 ‘동맹’보다, (심지어는 끊임없이 자신의 힘에 부치는 ‘남성적 매력’의 과시를 요구하는 자신의 ‘여친’까지를 포함한) 여성 일반에 대해 정서적으로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리고 남는 것은 악순환이다. 남성 동맹이 강화될수록, 여성들은 여성에게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남성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자신의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 ‘남성들에게조차 막연하기 짝이 없는’ 일자리를 놓고 다투기보다는 점점 더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경제력을 ‘기득권’으로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일부’ 남성들에게 정서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대다수 남성들의 피해의식을 증폭시키며 남성 동맹을 강화한다. 게다가 그것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자기파괴적 피해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간파하고 있는 남성들에게도 운신의 폭을 좁힌다. 어차피 ‘기득권’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가 적어도 ‘남성우월주의자’는 아니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여성들로부터 외면당한 그가 남성 동맹의 패거리에조차 끼지 못한다면 점점 더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이고 더욱 한심한 ‘루저’의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양성이 화해할 길을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는 이 남성 동맹을 해체하거나 최소한 완화할 수 있는 열쇠는, 대다수의 남성과 대다수의 여성이 놓여 있는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다. 그래도 여전히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남성은 피해의식 속에서 남성우월주의로 무장할 테고, 여전히 남성보다 불리한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비주체적인 삶을 받아들이겠지만, 최소한 제 힘으로 노력해서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안정적인 삶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들이 지금보다는 많아진다면, 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형이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기회가 적어도 지금보다 공평해지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그야말로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하는 남성의 ‘성적 매력’이나 여성의 ‘성적 매력’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발표지면 폴 아케르만, <Mr.남성의 재탄생> (사람의무늬, 2011) 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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